1. 우리고장 동명의 유래 (대구 수성구 고산동 http://www.gu.susong.taegu.kr/lpgm2/dong-011.html
)
가천동(佳川洞) - 성명미상의
사람이 정착하였는데 조선조 때 와서 아산장씨(牙山蔣氏)가
많이 거주하였다 하여 원당골(院當谷)이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금호강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경치가 아름다워 마을
이름을 가천(佳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기(新基), 내매(內梅)
- 1950년경 아산 장씨가 개척하고 살았는데 동네 서쪽으로 흐르던 욱수천이
동쪽으로 흐르게 되어 서쪽에 새로 동네가 하나 생기니 이곳을 신기(新基)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신기마을의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부르게된 내매(內梅)마을이
있고 지금의 동양염공 남쪽 예전의 제일모직 공장 경계에는 고을이 망했다는
망곡(亡谷)골짜기가 있다. 또 마을골이라는 심곡지(心谷池)와 독인지(獨人池)가
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新基)와 내매(內梅)를 합쳐 신매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Subject : 대구 고산,경산의 간단한 계보도입니다. --------------------------------------------- 관련자료에 들어가보니 가천,내환에 터닦은 조상은 누군지 모른다고
되어있더군요.빈약하자만 저에게 간단한 자료가
있습니다.
1세(장서)--->2세(응시)--->3세(공수)--->4세(숭:경북의성으로천거)--->5세(세분,천분,득분)--->6세(득분아들
균)--->7세(자방)--->8세(성발)--->9세(을유)--->10세(차남 흥부(동래부사역임))--->11세(차남
방도)--->12세(간)--->13세(차남 자원(덕봉공):이무렵경산으로이주)--->14세(장남 시번:청도에거주.차남
시영:경산계속거주)--->15세(광정)---> --------------여기서부터고산정착----------------- 16세(장남
유인:내환 정착.차남 유신:시지
거주)--->17세(천배)--->18세(여란)--->19세(익한,위한,주한,창한,진한)--->3남 주한(고산
가천이주), 4남 창한(고산 신매이주)
[ 2001.1.10 장경국(덕봉공 30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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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시-관광지-북부지역-양동마을 ( http://kyongbuktour.or.kr/kyoungju/korean/north5.html )
마을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승되어온 이야기에 의하면 양동은 역대로 '외손이 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즉 고려시대에는 오태사에서 장태사로, 조시대에는 유복하에서 손소로
다시 이번으로 계속해서 외손 쪽으로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신라시대에 아산장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5,6호의 작은 마을을 형성 하였고 그때부터 양좌촌이라 부르게 되었 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근거가
분명한 입향조는 손소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손소는 1495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467년 함경도 길주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 다. 그는 뒤에
안동부사와 진주 목사를 지냈으며 지금으로부터 520년 전에 장인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지금의 월성손씨 종가로 지었다고 한다.
3.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주요 전설 및 유래(
http://www.uisung.kyongbuk.kr/1/1-2-21-7.htm )
고려말(1380년)
장성발(蔣成發) 선생의 후손이 선조의 묘 있는 곳을 찾았으나 수목 이 짙어서
찾을 길이 없었는데 매너미 재에서 학을 날렸더니 금시 찾아 냈다고 하여 지금도
가르켜 매너미재로 불리고 있다
4. 연개소문(淵蓋蘇文/?~665)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장군.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 엄 (蔣儼)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보장왕
4)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蓋牟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5.고산풍물(http://samulnoli.co.kr/go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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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황선재옹이
말씀하시고, 황선장 보존회장이 정리한 글이다. 마을에 전해져 오는 전설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을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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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풍물(風物)이 자생적으로 전승되어 오는 내환동(內患洞)은
얼마전까지 경산군 고산면에 속한다. 지금은 도시확산으로 광역화되면서 대구에 편입되었다. 내환동은 고려시개부터 곡계(谷溪)라 불리우는 옛
"서울나들"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농촌의 자연부락이며 각성(各姓)마을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약 800년 전쯤 아산將氏, 밀양朴氏, 청주韓氏
순으로 들어왔다 한다. 곡계는 그 후 내환(內患)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대덕산 기슭의 심천(속칭 심칭이골)을 발원지로 하여 마을을 가로 지르는
실개천이 다섯덤(웃각단, 아랫각단, 대밭각단, 꿩지)을 꼬지 꿰듯 관통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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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제 축문은 달성서씨 모광 어른께서 축문을 지으셨다.
축문이 만들어진 시기는 조선중기로 그 분께서 내환동에 오셔서 제를 지내는 것을 보시고 축문을 쓰셨는데 축문에는 상당은 천룡지신을 중당은
동사지신, 하당은 이한지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셨다. 현재 고산 풍물의 축문이 그 분이 지의셨던 축문이다. 그 분의 후손이 삼대까지
서당 훈장을 하셨다. 천구백팔십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던 내환동의 풍속이었다. 지금의 나이 드신 분들은 정확하게 제 지내는 것을 보고 자랐으며
직접제를 올리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무서움에 밤에 천룡샘까지 가지 못하는데 그 날 두
사람은 하나도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상당(성지골), 중당(대밭뒤), 하당(숲곡각덤)이 있다. 정월 대보름에 매년 동신제를 지내며 정월 초
이레 여드레에 풍물을 치면서 처음 상단, 다음 중당에서는 대나무 신내림을 받아 하당으로 가게 되나, 하당에는 다시 대 신내림을 받아 대가 가장
깨끗한 집을 찾아간다.(과부집 제외)
첫째집을 제관집으로 청하고, 두번째 집을 축관으로 정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대주는 정한수를 올려놓고 재배한다. 제관 축관 집에서 술을 대접하면 풍물 한마당을 하면서 흥을 돋군다. 제수는 장에(오일장,
경산), 구장(동장)이나 그 외 깨끗한 사람이 옹기그릇 제기(동에 지기부족분)를 구입, 제물은 청어 세마리, 자반(미역), 나물, 과일 등을
구입하고 돼지 한 마리를 사다 제관집에 둔다. 제관, 축관 집은 금줄을 치고 황토를 대문밖 양쪽으로 서너군데 뿌리고 상주나 외인을 피하고 정성을
들인다. 술, 담배는 금하고 부부입방도 금하고 외출을 금한다.
저녁마다 인기척이 없는 인기척이 없는 한밤에 냉수로 목욕을
하고 제관 축간을 정한수 떠다놓고 손을 적셔 외 새끼를 꼬아 상, 중, 하당 모두 금줄을 새끼로 치며(음력 정월 열나흩날) 창호지를 잘라
중간중간 꼽는다. 탁주는 양조장 술로 쓰지 않고 제관집에서 삼사일 전에 담그며 떡(백짐)은 중당, 하당에만 쓴다.
열낫날 밤 열한시 지나 상당에 지레솥(질그릇 솥)을 걸고
밥을 짓고 미역을 참기름을 튀기고 술만 가지고 가서 상당제를 지낸다. 독축을 하고 밥솥째로 수저를 건다. 그 뒤에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한다고 하며 촛불은 등에 넣어 사용(예날은 기름불)이때 상당네 제관축관외 외인은 가지 않는다.
중당제는 중당 옆에 지레솥을 걸고 여러 사람이 같이 밤을
새워 지킨다. 돼지 잡아 떡만 놓고 제를 지낸다. 이 때 돋축을 하고 무사안녕의 소지를 올린다. 입경순서대로 아산장씨, 청주정씨, 청주한씨
순으로 빌고 가축의 무병까지 빈다. 중당제가 끝나고 제관댁으로 가서 제구를 가지고 하당으로 간다. 밥 세그릇, 나물 일체와 과일을 갖춘다.
하당제가 끝나고 제관댁으로 간다. 음복을 하고 식사를 한다. 이때는 보통 칠팔명이 된다. 돼지고기 부속물은 안주로 하되 온마리는 그냥 두었다가
대보름날 동회를 마치고 동민이 모두 같이 모여 술과 같이 먹는다.
그리고 나면 달이 뜨고 대덕산 꼭대기에는 아이들이 달불을
놓고 풍물패는 용(龍)기를 앞세우고 가가호호 지신을 밟으며 액을 불리치고 복을 빈다. |
6. 경북 김천시 아포읍 http://city.kimcheon.kyongbuk.kr/lpgm05/tradition/tradition2.html
1) 배서리
연실(蓮實)마을은 옛날 '배서리'라고 했는데 마을 안에 우물을 파면 마을
이 망한다고 한다. 지금도 멀리 떨어진 들판에 옛우물이 그대로 있다.
2) 화조대
인 4리는 봉소(鳳巢)마을인데 조선시대에 마을 한가운데 '화조대'가 세워
졌다.
이때부터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담배도 금하고 옷깃을 여미고 지나가고,
불미스런 행동을 한 사람은 멀리 돌아서 갔다고 한다. 여기서 화조는 과
거에 급제하면 나라에서 내리던 꽃으로 만든 화관을 말한다.
3) 제지(祭地)
옛날 장씨(蔣氏).장씨(將氏) 두 장사가 천근이 넘는 바위를 들어다 마을
복판에 놓고 돌방아를 만들어 이웃 사람까지 방아를 찧게 하였으므로 그
방앗간 앞에 공덕비를 세우고 죽은 뒤에도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그 자
리를 지금도 제지(祭地)라고 부른다.
4) 정록(鄭祿)골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던 정세마라는 사람이 늙어서 관직에서 물러나 묘
자리를 찾는데 나라에서 띄운 연이 떨어진 곳이 명당이라 하여 그곳이 구
암(九岩)마을 앞 정씨의 산 소가 되었고, 지동(智洞)마을 북쪽들은 그
에게 녹(祿)으로 내린 땅으로 정록골이라 한다.
7. 월평리(月坪里)
갈뫼봉(438m) 서편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청송군(靑松郡)과 경계를 이루는
꼭두방재(41 5m)에 이르기까지 밖골, 안골, 우마동, 살마골, 꼭두방과 같은 작은 자연부락이 산재(散在)하고 있 다.
1914년 소월, 고평,현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월평리(月坪里)라 하였다.
⊙골밖·바드내·외평(外坪)·하평(下坪) 첫 을로 당제(堂祭)는 안골에서 지낸다.
⊙안골·안바드내·소월리(所月里) 하평(下坪)
입구에서 북쪽 골짜기로 접어들어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월성이씨(月城李氏)가 200 여 년 전 개척한 마을이라
전한다.
⊙양지마을·가나무지이·우마(牛馬)동 큰 가중나무가
있었다 하여 가나무지이라 불렀다 하며, 또는 세금을 잘 내지 않는다고 관리들이 우마동(牛馬洞)이라 비하하여 불렀다고도
한다.
⊙꼭두방·복두방(福頭房)·고평(高坪) 청송군과의
경계인 꼭두방재가 이 마을에 위치한다. 200여 년전 해주오씨(海州吳氏)가 개척하여 복두(福頭)마을이라 하였으며, 고지대 마을이라 하여
고평(高坪)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이 마을 서쪽 장자메기라는 골에 아산장씨(牙山將氏) 몇 집이 개척하여 살다가 떠난후
절강편씨(浙江片氏)들 이 살았으며 그들이 떠난 후에 현 지역에 해주오씨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동제사는 단오날,
꼭 두방마을에서는 5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골안은 골밖마을과 합동으로 200여 년생 상수리 나무 당산목에서
지낸다.
8. 울진군 근남면 산포3리
3) 검은개(산포3里) (http://www.uljin.go.kr/gunji/a/a0949.htm)
1600년경에 홍천용씨(洪川龍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별감(別監)을 지낸 장(蔣)선비라는 사람이 목동(牧童)을
데리고 와서 이 곳의 경치 좋은 바위 밑에서 거문고를 탓다고 하여 금호(琴湖)라 하였고, 그 후 화재(火災)가 발생하여 마을이 전소(全燒)되어
검게 보이므로 흑포(黑浦)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망지등(望知登), 목동바위(牧童岩)가
있다.
(1) 망지등(望知登)
바다 속의 고기떼를 찾기 위하여 망(望)보던 산봉우리를 망지대(望知臺)라 한다.
(2) 목동바위(牧童岩)
1700년경에 별감(別監)을 지낸 장(蔣)선비가 목동(牧童)과 함께 이 바위 밑에서 시(詩)를 읊으며 풍류(風流)를 즐겨 이
바위에 새겨놓은 “梨谷春風 琴湖秋月”라는 시구(詩句)가 남아 있다가 해안도로개설로 바위가 깨어졌다.
(3) 촛대바위(燭岩)
동해안에 빼어난 경관을 이룬 이 바위는 해안도로 개설시 제거가 불가피한 설계로 집행 당시 향토출신 부군수 장학중이 현장으로
수차 보존을 호소하여 중장비 기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살렸다. 이 암(岩) 위에 소나무가 있어 마치 촛대와 같은 모양의 바위라고 하여 이후부터
‘촛대바위’라 이름하였는데 오늘날 관광명소로 이름 높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