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장씨(牙山 蔣氏) 묘소

시조 아산군 묘소를 찾아서

임진왜란을 격으며 피난 중에 선조들의 귀중한 문집과 시조 아산군의 유품도 잃어 버리고 시조묘소도 찾아보지 못한 채 수 백년이 지나서, 1868년에 일가들 중 대표를 선발하여 천리길 아산으로 걸어서 시조묘소를 찾아 나섰다. 다음은 당시의 감격스러운 기록을 번역한 것이다. 시조능은 그 지역의 마을 사람들이 신당을 지어 장승상당이라고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반대로 신당을 철거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7년에 와서 현지 마을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신당을 철거하고 보수공사를 실시할 수 있었다.

 

효효재공 묘소와 모운재

공의 아우의 이름이 성미인데 나에게 외선조가 된다. 형제분이 모두 정경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 집안의 내력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이제와서 이를 고증할 길이 없다. 공이 고려왕조에 벼슬했다는 것은 연대로 따져서 알 수 있고 벼슬이 전서였다는 것도 무덤 앞에 있는 표석을 보고 알 수 있으며, 본관이 아산이라는 것과 할아버지는 이름이 자방, 벼슬은 예빈경, 아버지의 이름은 균, 벼슬이 판도판서였다는 것은,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알 수 있다. 전하는 말로는 또 공이 살던 곳이 하사촌 교동이라기도 하고, 또는 구산 목촌에 있다고도 한다. 동리 들어가는 바위 위에다 판서동이라고 새긴 것이 있다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런 것을 알아낼 이인을 만날길 없으니 한탄스럽기만하다.[영락 이후 7회의 을사(1785)년  월 일 상락후인 김종덕씀]

 

인재공과 사정공 묘소

인재공 선생께서는 조선조 세종 27년 을축(1445년)에 경북 의성현 원유동에서 삼형제 중 차자로 출생하셨다. 유시부터 통민호학하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은사로 수학하여 학문이 대진하고 학덕을 겸비하였다. 성종 5년 갑오(1474년)에 등과하여 웅천(진해) 현감에 오른 후 여러 고을 현령 군수를 거쳐 중종 원년 병인에 어모장군 대동도에 올랐고 행 군기시부정을 역임하고 중종 6년 신미 5월에 왜노들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우니 조정의 삼공과 예조에서 수차 대책을 논의하여 어전에 의계하니 중종께서 명하기를 군기시부정 장처인을 파견하여 위용으로 제제하라 전교하니 선생께서 난국을 수습하여 큰 공을 세우셨고, 중종 7년 임신(1512년) 3월에 삼척도호부사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궁핍을 걱정하시며 선정덕치를 다하고 농상과 어로의 권장으로 생계를 자족케 하니 향당이 모두 경복하고 칭송하였다.

 

평해군수 장양(蔣諒)의 묘소(호구혈 명당)

장양은 임란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운 장후완(蔣後琬)의 셋째 아들로 1681년 4월 1일부터 1683년 7월 15일까지 평해군수를 역임한 사람이다. 군위 땅 어딘가에서 이장(移葬)해 왔다는 그의 분묘는 예로부터 호구혈(虎口穴) 터로 일컬어져 오는 명혈(名穴)중의 명혈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명묘가 무려 200년도 더 넘게 실전(失傳)아닌 실전을 경험했다는 게다. 봉분이 무너졌던 것도 아니고, 후손이 끊겼던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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