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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13대조의 산소 앞에 옛적부터 자그마한 비석이 있었고 전면에는 "『전서장성발지묘』"라고 새겼고 왼쪽면에는 『영락11년 계사
2월26일립』" 이라고 새겼었다.

공의 아우의 이름이 성미인데 나에게 외선조가 된다. 형제분이 모두 정경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 집안의 내력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이제와서 이를
고증할 길이 없다. 공이 고려왕조에 벼슬했다는 것은 연대로 따져서 알 수 있고 벼슬이 전서였다는 것도 무덤 앞에 있는 표석을 보고 알 수
있으며, 본관이 아산이라는 것과 할아버지는 이름이 자방, 벼슬은 예빈경, 아버지의 이름은 균, 벼슬이 판도판서였다는 것은,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알 수 있다. 전하는 말로는 또 공이 살던 곳이 하사촌 교동이라기도 하고, 또는 구산 목촌에 있다고도 한다. 동리 들어가는 바위
위에다 판서동이라고 새긴 것이 있다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런 것을 알아낼 이인을 만날길 없으니
한탄스럽기만하다.[영락 이후 7회의
을사(1785)년 월 일 상락후인 김종덕씀]
산소에서 남쪽으로 십리쯤 되는 곳에 교곡리가 있다. 이곳은 우리 중간선조께서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다.
점곡은 겨우 상리, 중리, 하리 3개 부락으로 된 면이다. 여기서 하리를 교곡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선조 오형제가 모두 전서를 지내어 한 세대에
영예를 누리었다. 그러므로 마을 앞에다 커다란 무지개 다리를 가설하여 귀인들은 다리 위로 천인들은 다리 밑으로 통과하게 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을 이름을 「다리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또 앞 산 바위 위에 「오전서동」이라는 네 글짜를 커다랗게 새겨 놓았다 하는데 지난 임자년(1732)
홍수에 바위가 무너져 버려서 지금은 찾아볼 길 없다. 그러나 선조께서 대대로 거주하던 터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여기에 기록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한다.[숭정기원후 네 번째 신미년(1811) 10월 하순 17대손 인복 삼가 씀]

이 재실이 교곡에 있으나 우리가 추모하는 바는 고운사 기숡에 있기 때문에 이름을 모운재라 하였다.[신유년(1921) 9월 18대 손 래홍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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