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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인물 소개
아산蔣씨 족보에 등재된 인물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蔣씨들 족보에 없는 우리 蔣씨들 중국인 蔣씨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공 서(壻)의 증손 숭(崇)이 고려조에 정록대부(正祿大夫)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역임하였고, 숭의 아들 득분(得芬)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서운관사(書雲觀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거쳐 판군기시사 (判軍器侍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의 6세손 균(均)이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으며
균의 아들 자방(自芳)이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삼사부사(三司副使) 겸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역임하였다. 자방(自芳)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성길(成吉)이 판도판서(版圖判書),
평장사(平章事)를, 둘째 아들 성발(成發)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전공전서(典工典書)를
역임하였으며, 세째 아들 성휘(成暉)가 전서(典書)를, 네째 아들 성미(成美)는 전법전서(典法典書)를,
다섯째 아들 성우(成祐)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는 등 모두 전서를 역임하였으므로
그들의 출생지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은 5전서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는 천문기상기기(天文氣象機器), 자격루(自擊漏), 측우기(測雨器)등의 발명으로 유명한 과학선현 영실(英實) , 청렴결백 하였고
행의로 이름이 드러난 참의공 돈의(敦義), 조선 성종조에
경기병사(京畿兵使)를 지냈으며 문무의 재질을 겸비하였고 태산 북두와 같은 명망을 가진 절제공 처용(處勇), 선조조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도총부부총관·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었을 때는 이이첨을 찾아가 임금을 잘못 보필한 죄를 책망하였다는
귀래정(歸來亭) 입국(入國) , 천품이 영민하며 학문에 힘쓴 참봉공
세린(世璘), 지방의 비적을 토벌 섬멸하여 국가의 걱정을 제거한 평산공 효범(孝範), 군량운수를 책임지고 힘에 지쳐서 생명을 바친 찰방공 경신(敬臣), 효성과 우애를
선천적으로 타고 났으나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은 참의공 영(瑛) , 난리가 났을 때에 몸을 내세워 굳게 맹세하고 의병을 일으킨 시암공 형(珩), 문학으로
명망이 높았고 난리를 당하여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화왕산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광암공 계현(啓賢), 공신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산림에 은거한 사평공 희춘(希春), 죽음을 각오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이 된 부장공 희양(希陽), 선조조(宣祖朝)에
옥포만호(玉浦萬戶)를 거쳐 부사(府使)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 울산 소모대장(蔚山召募大將)으로
전공을 세워 칠공신의 한 사람이 된 후완(後腕), 숨어 살면서 행의가 높아 후학들을 교도한 이요재공 방익(邦翼),
주역에 통달하여 학계에 으뜸이 된 귀계공 시하(時夏)와 같은 분들이 있고, 이밖에도 문장과 도학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는데 의병을 두번이나 일으키고
나서는 물러가서 명나라를 위하여 의리를 지킨 조경암공 문익(文益), 가정에서 교육을 받아가지고 마침내 큰 학자가 되어 일반에서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리려고 논의까지 한 세심공 희적(熙績)등이 있다.
근세에 와서는 영사공 석후(碩垕)는 효성이 지극하여 추모정으로 현판을 걸었고, 곡계공 해붕(海鵬)은 선생에게서 수업하여
학자 중에서 존경을 받았고, 화담공 희직(熙稷)은 학자의 영향을 받아서 학문과 행의가 높았다. 헌문(憲文)은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세풍(世豊)은 6.25 전쟁시 선두전차를 격차하고 산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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