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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결혼관습
고려시대 까지는 결혼을 하면 남자가 처가에 가서 사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제도는 이조시대부터 부계사회로 변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조 중엽에 와서야 부계사회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남자가 처가에서 사는 유형에는 솔서(率婿) ·예서(預婿) ·서양자(婿養子) ·서류부가(婿留婦家) ·초서(招婿) ·췌서(贅婿)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데릴사위 혼인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딸만 있는 집안이 동족(同族:同姓)에서 양자를 입적시키고, 사위는 별도로 맞이하여 그의 노동력으로 가사를 돌보게 하는
솔서혼을 말한다. 데릴사위와 연관되는 혼인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⑴ 솔서(率婿):고려시대까지 이성(異姓)의 사위양자[婿養子]가 인정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부계혈연의 가계계승만을 인정하여 이성의 남자(대개
가난한 사람)에게 딸을 주어 데릴사위로 삼아 그의 노동력을 빌고, 양자는 같은 성씨에서 따로 취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데릴사위 혼속은 조선시대
특유의 것으로 추정된다.
⑵ 예서(預婿):대부분 집안이 가난한 어린 남자를 여자집에서 맞이하여 성장한 후에 혼인시키는 것으로, 고려 ·조선 시대에 일부에서 하던 혼인
형태이다. ‘민며느리[預婦]’와 반대인 경우이다. 고려시대 때 몽골에 처녀를 바친 공녀(貢女)와 조선시대의 왕가간택제도에 연유한 것으로서 혼인 후에 서양자 또는 솔서의 형태로
이행된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⑶ 서양자(婿養子):솔서와 혼동되는 것이 서양자의 경우이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부계혈연의 가계계승만을 고집하지 않았을 경우, 딸만 있는 집안에서
가계계승을 위하여 맞이한 사위양자를 말한다. 오늘날 민법에서는 서양자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지는 않으나, 처가 친가의 호주이거나 호주상속인인 경우
남편이 처가에 입적하고 자녀는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라 모가(母家)에 입적하도록 되어 있다(민법 826조).
⑷ 서류부가(婿留婦家):고구려 때부터 내려온 혼속으로,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자집으로 돌아와 사는 혼인형태이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남녀간에 혼담이 이루어지면 여자집에서는 ‘서옥(婿屋)’이라는 작은 집을 세우고, 날이 저물어 사위가 돈과 폐물을 가지고집 밖에서 여자와
동숙할 것을 청하면 부모가 사위를 서옥으로 안내하여 여자와 동숙하게 함으로써 결혼생활이 시작되는데, 남자는
자녀가 장대하여야 비로소 처자를 데리고 본가로 간다 하였다.
이러한 서류부가의 혼속을 사위가 처가에 장기간 머물며 노력을 제공하는 봉사혼(奉仕婚)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를 조선 중기 효종 때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 “사대부가는 고루구간(固陋苟簡)하여 사위가 처가에 유한다. 그러므로 처를 취하지 않고 장가든다”라고 표현하였다.
수천 년 내려온 서류부가의 혼속은 체류기간이 조선 후기에는 1∼3년으로 단축되었다.
⑸ 췌서(贅婿):중국에서는 데릴사위를 췌서라고 하였는데, 여자를 얻는 대가로 지불하는 빙재(聘財)를 노역으로 대신하는 노역혼(勞役婚:役婚)인 경우의 사위를 말한다. 이러한 혼인풍속(婚姻風俗)은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췌’에는 ‘혹 ·군식구 ·질(質:인질)’의 의미가 포함되어 췌서는 질서(質婿),즉 채무노예적인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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