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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너무 지루하게 내려 남쪽 밭에서 자라는 보리가 상할까 염려되오. 요즈음 어버이를 모시는 형의 몸이
편안한지 알 수 없구려. 서재에서 글을 읽는 그 깊은 운치로 자위하며 기뻐하시오. 전번에 보내 온 편지를 받았으나 회답할 길이 없어
아직까지 답서하지 못하고 울울한 생각이 심하던 차에 뜻밖에 또다시 형의 편지가 이르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날씨가 춥고 한 해가 저물어가는데,
기거가 편안하다 하니 위로되는 마음 이루 형언할 수 없소. 듣건대 요즈음 용문(龍門)을 유람한다 하니, 몹시 부러운 마음에 정신만 그리 달려가
있을 뿐입니다. 추요(蒭蕘)주D-001에게 묻는 것은 《시경(詩經)》에 일컬은 말인데, 고명(高明 남을 높여 일컫는 말)이
고사(故事)를 물어 오니, 자신이 대답하지 못함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기에 앞서 부지런히 학문하는 것을 축하하오. 어찌 감히 아는대로 말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별지(別紙)에 나열합니다.
어록(語錄)은 어느 때에 나왔는가요?
선가(禪家)들이 설법(說法)한 것을 그 문도(門徒)들이 기록한 것을 어록이라 하는데,
송의 학자들이 이를 모방하여 정자(程子)ㆍ주자(朱子)가 모두 어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자연 심상한 말로 되어버렸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욱 그 뜻을 몰랐습니다. 퇴계(退溪)와 미암(眉巖) 등 여러
선정(先正)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뽑아내어 방언(方言)으로 해석해 놓았는데, 후세에 와서 명물(名物)을 분별하지 않고 통틀어 어록이라
부르니, 나는 이를 매우 그르게 생각합니다.
대개 사람의 이름을 지음에 있어 오행상생법으로
한 것은 당ㆍ송 시대에 시작된 것 같으나 그 근원을 분명히 알 수 없고, 자를 짓는 것은 상고(上古)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제지(帝摯)의 자는 청양(靑陽),
우(禹)의 자는 고밀(高密), 고요(皐陶)의 자는 정견(庭堅) 같은 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별호(別號)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가요?
별호의 시초는, 백양(伯陽)을 노자(老子)라 하고 왕허(王詡)를 귀곡 선생(鬼谷先生)이라
한 것 같은 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대의 숭상하는 것이 각각 근거가
있는가요?
주(周)는 예(禮)를, 진(秦)은 법(法)을, 한(漢)은 기절(氣節)을, 진(晉)은
청담(淸談)을, 당은 시를, 송은 학(學)을, 원은 사(詞)를, 명은 팔고문(八股文)을, 청은 박아(博雅)를 숭상한 것에서 역대 숭상의 연혁을 알 수 있습니다.
풍수(風水)의 설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합폄(合窆)의 예가 주공(周公)
이상의 세대에도 있었는가요?
풍수의 설은 진 나라 저리자(樗里子)로부터 시작되어 곽박(郭璞) 때에 성행하였고, 합폄의
예에 대해서는 주공 이상의 세대에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은행나무[銀杏樹]를 한 글자로 명칭할 수 있는가요?
은행나무를 한 글자로 별칭한 것은 없으며 그 열매는 은행(銀杏), 그 재목은
문행(文杏), 그 잎은 압각(鴨脚)이라 합니다.
'篾' 자의 음이 무엇이며 뜻은 무엇인가요? '篾' 자의 음은 멸(滅)이며 뜻은
《비창(埤倉)》에 '대를 얇게 쪼개는 것이다.' 하고, 《서경(書經)》고명(顧命)의 부중멸석(敷重篾席)에 대한 주(註)에는 '도죽(桃竹) 가지로
만든 자리[席]다.' 하였습니다.
'●'자는 음이 무엇이며 뜻은 무엇인가요?
'●'자의 음은 섭(聶)인데 염(念)이라고도 하니, 곧 배[舟]를 끄는 새끼로
'백장(百丈)'이라 하기도 합니다. 《남사(南史)》
주초석전(朱超石傳) 주(註)에 '백장은, 큰 대나무를 네 갈래로 쪼개어 그 팔뚝같이 굵은 것을 삼끈으로
잇대어 묶어서 배를 끄는 기구를 만든 것이다.'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가냘픈 대나무 줄이다. [苒弱竹篾●]' 하였으니, 곧
백장입니다.
이는 대체로 대를 쪼개어 꼬아서 만든 새끼의 명칭입니다.
이미 봄이 되었는데
아름다운 얼굴을 대하지 못하여 마음이 울울하던 차 편지가 이르렀습니다. 온 집안이 새해를 맞아 경사롭다 하니 천만 번 축하하는 바입니다. 어버이
곁을 떠나 나이만 더하게 되니 편안치 못한 그 심정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기(禮記)》에 '널리 배우고 자세히 따져 물으라
[博學審問]' 하였는데, 그 말은 남아 있으나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어진 지 이미 오랩니다. 재주 있는 사람은 교만하여 배우지 않고, 우매한
사람은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묻지 않으니 이 모두 사람이 아닙니다. 넓고 넓은 이 대지에 보이는 곳과 발이 닿는 곳이 모두 알 수 없는 물건이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형의 박통(博通)한 학식이 부족하다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요(蒭蕘)에게 물음을 기탄하지 않으니,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어찌 감히 아는대로 대답해 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집에 장서가 없어서 다만
억대(臆對)에 불과한 처지라, 만 가지를 빠뜨리고 하나를 겨우 들어 주는 것이 해박한 그대의 식견을 흡족하게 넓혀 줄 수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불법(佛法)이 한 명제(漢明帝) 이전에도 중국에 들어올 조짐이
있었는가요?
진(秦) 나라 때 중 실리방(室利房)의 무리가 왔었는데 시황(始皇)이 이상하게
여기어 가두었더니, 밤에 금인(金人)이 문을 부수고 탈출시킨 일이 있으며, 한 나라 곽거병(霍去病)이 언지산(焉支山)을 지나다가
휴도왕(休屠王)이 천제(天祭) 지낼 때를 위해 받들던 금인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으니, 그렇다면 불법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명제의 영평(永平)
10년(67)에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화법(畫法)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가요? 《운급칠첨(雲笈七籤)》에 '사황(史皇)이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하였는데, 사황(史皇)은 곧 창힐(蒼頡)입니다. 창힐 이후 작자(作字)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요? 장회관(張懷瓘)의 십체서(十體書) 단안에 고문(古文)은 창힐(蒼頡),
대전(大篆) 및 주문(籒文)은 사주(史籒), 소전(小篆)은 이사(李斯), 팔분(八分)은 왕차중(王次仲), 예서(隸書)는 정막(程邈), 장초(章草)는 사유(史游), 행서(行書)는 유덕승(劉德昇),
비백(飛白)은 채옹(蔡邕), 초서(草書)는 장백영(張伯英)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략을 든 것이요, 이밖에도 글씨를 지은 사람이 많으나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상보는 법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주(周)의 내사(內史) 숙복(叔服)
이전에도 사람을 상보는 술법이 있었는가요? 주의 사일(史佚)이 처음으로 사람을 상보았다고 하는데, 《물원(物原)》에 보입니다. 칠언(七言)의 작품이 백량대(柏梁臺) 이전에도 혹
있었는가요? 칠언은 3백편의 시 중에도 많이 나오고, 또 초광 접여(楚狂接輿)의 가봉(歌鳳), 영척(甯戚)의 고각(扣角), 항우(項羽)의
해하(垓下), 한 고조(漢高祖)의 대풍(大風) 같은 것들이 모두 칠언의 원조입니다. 선술(仙術)과 도술(道術)은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가요? 도가가 곧 선가인데 도가의 말을 상고하면 선은 황제(黃帝)로부터 생겼다
합니다. 제(題)와 발(跋)이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제와 발은 무슨 의미인가요? 발의 명칭은 당 나라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당의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어떤 책이나 문장을 읽고 그 뒤에 쓰는 명칭이 곧
발의 시초입니다. 송에 와서는 구양수(歐陽脩)ㆍ증공(曾鞏) 이후에 비로소 발에 대한 말이 있는데 '제는 액(額)으로서 앞에 쓰는 것이 제가
되고, 발은 족(足)으로서 뒤에 쓰는 것이 발이다.' 하였으니, 내 생각도 그러합니다. 인질을 교환하는 법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좌전(左傳)》에 '신의가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인질을 교환하는 것도 무익하다.' 하였는데, 춘추 시대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좌전(左傳)》 은공(隱公) 2년 조에, 주(周)와 정(鄭)이 인질을 교환한 것이 바로 인질 교환의 시초인데 그 이전에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돈의 시초와, 우리나라에서 주전(鑄錢)한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주전하기 전에는 어떻게 생긴 모양의 돈을
썼는가요? 정어중(鄭漁仲 어중은 송(宋) 나라 정초(鄭樵)의 자)이 지은 《고금수문도(古今殊文圖)》에 황제(黃帝)의 화폐와 제곡(帝嚳)의
화폐에 그려진 글자 모양을 인용하였으니, 돈의 기원은 오래된 것입니다. 유독 평준서(平準書)에 인용한 우(虞)ㆍ하(夏)의 화폐와,
식화지(食貨志)에 인용한 태공(太公)의 '구부환법(九府圜法)'으로 시초를 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신라(新羅)ㆍ고려(高麗) 이후로
돈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ㆍ해동중보(海東重寶)ㆍ삼한통보(三韓通寶)ㆍ조선통보(朝鮮通寶) 등의 명칭이 있는데, 어느 때에 무슨 돈을 썼는지는 서적이
구비되지 못하여 상고할 수 없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세종께서 장영실(蔣英實)에게 주전(鑄錢)을 명하여 한때 사용하다가 이내 없어져
저폐(楮幣)만 사용하였고, 숙종(肅宗) 6년(1680)에 다시 주전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공(子貢)이 그림을 잘
그렸다는 말이 어떤 책에 나오는가요? 자공이 그린 부자(夫子)의 화상이 궐리(闕里)에 있는데,
공상임(孔尙任)의 출산기(出山記)에
보입니다. 위서(緯書)를 누가 지었는가요? 공자가 지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니 믿을 수 있는 것인가요? 참위(讖緯)는 한(漢) 나라
때에 생겼습니다. 성인의 글을 경(經)으로 명칭을 붙이니, 오괴(迂怪)한 자들이 위서를 짓고 공자의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라,
《원신계(援神契)》ㆍ《운두추(運斗樞)》의 말 따위는 모두 허황하여 칭도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동한(東漢)의 하하량(夏賀良)의 무리 가운데
위찬(僞撰)한 자들이 많은데, 이는 대개 모두 좌도(左道)입니다. 낭당(郎當)은 분명히 무슨 모양을 가리킴인가요? 옛날에 '춤추는
옷자락이 너무 낭당하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 깜찍스럽다[齷齪]는 뜻인 듯합니다. 전우(箭羽 화살에 꽂은 깃)에 이름을 새기는 일이 언제
시작되었는가요? 전우에 이름을 새기는 일은 당(唐) 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서(唐書)》왕충사전(王忠嗣傳)에 '충사가 속장(屬長)을 불러 병사(兵使)의 직을 내리고 사졸에게 주면서, 활과
화살에도 성명을 기록하였다가 그 군사가 돌아왔을 때 활과 촉을 유실한 자에 대해서는 모두 이름을 적어 처벌하게 하였다.' 하였고,
《오대사(五代史)》에 보면, 양(梁)의 육사탁(陸思鐸)도 전괄(箭筈)에 성명을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고려 시대에 김돈중(金敦中)의 화살이 임금의
수레 앞에 떨어지므로 드디어 대옥(大獄)이 일어나 여러 사람을 오살(誤殺)하였는데, 만약 화살에다 성명을 새겼더라면 돈중은 결코 죄를 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로 보면 고려 시대에는 이름을 새기지 않은 듯합니다. 일자사(一字師)라는 것은 언제 생겼는가요? 당(唐) 나라 정곡(鄭谷)의 매시(梅詩)주D-003에,
앞 마을 깊은 눈 속에/前村深雪裏
두어 가지 매화 지난밤에 피었네/昨夜數枝開
라고 한 것을 제기(齊己)라는 중이
보고 말하기를 '수(數) 자를 일(一) 자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곧 일자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치(雉) 자 곁에 화살
시[矢]를 붙인 것은 무슨 뜻에서입니까? 꿩의 걸음이 화살처럼 곧은 것을 의미함인가요? 구종석(寇宗奭)은 '꿩이 화살처럼 곧게 날아가다가
떨어지므로 글자에 화살 시 자를 붙였다.' 하고, 그대는 '꿩의 걸음이 화살과 같다.' 하니, 이 역시 전인들이 모르던 것을 발견함이오. 꿩의
성질이 경개(耿介)하기 때문에 나는 것이나 걷는 것이 다 곧고 삐뚜러지지 않습니다. 속칭 마가목(馬檟木)은 원래 무슨 글자를
쓰는가요? 마가목은 채찍이나 지팡이를 만드는 줄만 알 뿐 무슨 물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와 함께
《본초강목(本草綱目)》ㆍ《군방보(群芳譜)》ㆍ《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등의 책을 싸들고 전부(田父)ㆍ야수(野叟)를 찾아다니면서 그 속명을
실험하여 도경(圖經)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세상 선비들이 나의 말을 들으면 웃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나, 이러한 일은 그대와 나만이 함께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조수가 교미하는 것을 자미(孶尾),
마우(馬牛)가 교미하는 것을 풍(風)이라 하였는데, 곤충이나 뱀의 교미에 대해서는 무슨 글자를 써야 하는가요? 곤충이나 뱀의 교미에
대해서는 특별히 지적한 글자가 없으나, 《시경(詩經)》에 적적부종(趯趯阜螽)이라 하였으니, 적적은 부종이 교미하는 것이라 하는데 이는 모전(毛箋
한(漢)의 모장(毛萇)이 주를 낸 《시경》)을 따른 것입니다.
뱀의 교미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으나 그냥 교(交) 자만 쓰는 것이 옳으리라 봅니다. 중국 방언에 노새[驢]와 돼지[猪]가 서로 교미하는 것을
도(跳), 돼지와 개[狗]가 서로 교미하는 것을 주습(走襲), 개의 교미를 연(連), 돼지의 교미를 공지(拱地)ㆍ포지(刨地), 고양이와 호랑이가
교미하는 것을 주앙(走仰), 소가 교미하는 것을 주(走) 또는 타란(打欄)ㆍ도란(跳欄)이라 하여 다 묘리가 있으므로 아울러
언급합니다. 무릇 서적에 있어 장황(裝潢 서적에
의장을 입히는 것)과 간서(刊書)와 초서(鈔書)의 시초가 어느 시대부터 나왔는가요? 황(潢)은
장(漿)으로 종이를 물들이는 것입니다. 가사협(賈思勰)의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장황법(裝潢法)이 있으니, 가사협은
후위(後魏) 사람인데 그 이전의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간서(刊書)는 제(齊)의 중 보월(寶月)로부터 시작되었고, 초서(鈔書)는
소진(蘇秦)ㆍ장의(張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습유기(拾遺記)》에 보입니다. 곤의(袞衣)의 곤(袞) 자는 무슨 의미인가요? 곤은 아름답다[卷]의 뜻인데 '용의 머리가
아름답다[龍首卷然]'는 공영달(孔穎達)의 말이 있습니다. 행리(行李)의 리(李) 자를 무슨 뜻으로 통용하는가요? 《통아(通雅)》에
행리는 행사(行使)라고 하였으니, 곧 행장을 챙기는 것입니다. 《좌전(左傳)》소공(昭公) 13년 조에
'제후가 군사를 휴식시키는 것은 좋게 일을 하려 함인데, 행리의 명령이 이르지 않는 달이 없다.' 하였습니다. 희공(僖公) 30년
촉지무(燭之武)가 '행리지왕래(行李之往來)'라 말한 것에 대한 주에 행리는 사인(使人)이라 하였습니다. 이동양(李東陽)이
지은《자가록(資暇錄)》에 '사(●)는 사(使) 자의 고자(古字)인데 행리를 고쳐 행사(行使)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인(故人)의
호칭은 어느 시대에 나왔으며, 족하(足下)의 호칭은 또한 무슨 의미인가요? 《한서(漢書)》에 유후(留侯 장양(張良)의 봉호)가 고제(高帝)에게 이르기를 '지금 봉작한 사람은
모두 소하(蕭何)ㆍ조참(曺參) 등 고인(故人)이다.'고 하였는데, 고인 두 글자는 아마 이때 시작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족하(足下)는
폐하(陛下)ㆍ전하(殿下)와 같은 뜻으로 존자(尊者)를 감히 지척하지 못하는 뜻에서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관계(官階)가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가요? 관직의 품계는 신라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품계에 있어 문(文)ㆍ무(武)를 분간하지 않았으니,
대서발한(大舒發韓)ㆍ서발한(舒發韓)ㆍ이찬(伊粲)ㆍ소판(蘇判)의 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포교대(布絞帶)의 너비가 재최(齊衰) 이하는
4촌(寸)에 불과하고 복(服)에 따라 각각 가는 것과 굵은 것이 있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많이들 전폭대(全幅帶)를 두르니 특별한 예(禮)라도
있는가요? 포대에 전폭을 쓰고 고리를 만들지 않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나쁜 풍속입니다. 새해가 되어도 옛 친구를 보지 못하니 그
얼마나 서글펐겠습니까? 곧 형의 편지를 받고 형의 옴[癬疥]이 아직 쾌차하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이는 제가 경험한 병이라 몹시 염려됩니다. 제는
모시고 편안한 편이나 외각(外閣)에서 편집하는 책을 아직 마치지 못하고, 또 이문원(摛文院)에 올라 5천여 권의 책을 교열해야 하니 몇 달이
걸려야 마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과 눈이 함께 피로하니 어찌해야겠습니까? 훌륭하다, 그대의 물음이여! 경(經)에 '묻기를 좋아하면
너그러워진다.' 하였고, 전(傳)에 '널리 배우고 상세히 찾아 물으라.'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약허(若虛)를 이르는 말일 것입니다. 이문원으로 달려가야 하기에 자세히 답하지 못합니다.
나올(羅兀)은 우리나라 제도인가요?
나올은 유모(帷帽)가 본명이며 멱리(羃罹)라 하기도 하는데 당ㆍ송 때부터
있었습니다.
보내 준 편지를 받았는데 추위가 혹심하구려. 형이 옴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생각하니 몹시 염려됩니다. 제때에 비상(砒霜)을 태워 훈(薰)하여 더 성하지 못하게 하시오. 훈할 때 또한
조심하여 중독되지 않게 하기를 바랍니다. 제는 《열성지장(列聖誌狀)》의 편교(編校)로 날마다 운각(芸閣)에 들어가야 하니 여가가 없음에야 어찌하겠습니까? 물어 온 여러 조항은
삼가 별지에 나열하였습니다. 요즈음 세상에 남에게 묻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날로 퇴보해 가는 자도
가만히 앉아 묻기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아는 체하니 서글픈 일입니다. 등불 밑에서 붓을 불며 이만 씁니다.
철(腏) 자의 음과 뜻은 무엇인가요?
철자의 음은 철(輟)이요, 《설문(設文)》에는 '뼈 속의 고기를 긁어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광운(廣韻)》에는 '뼈 속의 기름이다.' 하였고, 또 '음은 세(彗)라고도 읽는데 뜻은 같다.' 하였습니다. 《집운(集韻)》에 또
음은 철(綴)이요, 주위(株衛)의 반절음(半切音)인데 강신(降神)의 뜻이라 하였습니다. 상고하건대 본래
철(餟)로 썼는데 또한 철(醊)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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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D-001] 추요(蒭蕘) : 짐승을 먹이는 꼴과 땔나무.
여기에서는 곧 꼴이나 땔나무나 하는 미천한 사람을 가리킨다. [주 D-002]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 오행이 서로 생(生)하는 법. 곧
금은 물을 생하는 것[金生水], 나무는 불을 생하는 것[木生火], 물은 나무를 생하는 것[水生木], 불은 흙을 생하는 것[火生土], 흙은 금을
생하는 것[土生金]을 가리킨다. [주 D-003] 당(唐) 나라 정곡(鄭谷)의 매시(梅詩) : 《오대사보(五代史補)》에, 정곡(鄭谷)이 원주(袁州)에 있을 때 제기(齊己)가 시를 가지고 그에게 갔는데, 그
조매시(早梅詩)에 "앞 마을 깊은 눈 속에 두어 가지 매화 지난 밤에 피었네.[前村深雪裏 昨夜數枝開]"라 하였다. 정곡이 이것을 보고, "두어
가지라 하면 이미 이른 매화[早梅]가 아니니, 이 수(數)라는 글자를 일(一)로 고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제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절을
하고 굴복하였으므로 사림(士林)이 이로부터 정곡을 일자사로 추앙하였다고 한다. 청장관은 아마 정곡과
제기를 서로 바꾸어 생각한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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