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비변사등록

광해군 10년(1618년) 윤4월 18일 아뢰기를,

“평안병사는 성우길(成佑吉)이 논계(論啓)를 받은 이후 본도의 군무(軍務)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불행히도 지금 징병에 관한 일이 있어 소집에 대한 일을 오로지 본도 병사(兵使)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새 병사의 부임이 매우 시급합니다. 속히 정사(政事)를 행하여 차출(差出), 1-2일 안에 부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처음 방어사(防禦使)로 칭호(稱號)한 것은 바로 오늘날 사변을 위해서 입니다. 목사 정산뢰(鄭山雷)는몸에 중병이 있을 뿐 아니라 명성도 뚜렷하지 않으니 지금 방어에 대한 직임을 감당하기는 결코 어렵습니다. 만포첨사(滿浦僉使) 장후완(蔣後琬)은 도임한 이후 잔혹 흉포하고 탐오하여 인심을 잃었으니, 서새(西塞 : 서쪽 변경)의 문호(門戶)와 같은 곳을 이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모두 체차(遞差)하고, 무장 가운데 뛰어난 명성이 있는 자를 엄정히 가려 보내는 것이 타당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산뢰는 지금 아직 체차하지 말고 사세를 관망하여 살펴서 하도록 하라. 장후완의 일은 본도 방백(方伯)에게 하유(下諭)하여 사실을 조사, 치계(馳啓)하게 한 뒤에 의처(議處)하라." 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 5월 29일 아뢰기를

"좌부승지 이위경(李偉卿)의 계사에, 엎드려 김경서(金景瑞)의 장계를 보니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며 머리끝이 쭈삣해 짐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은 곧 이러한 때입니다. 우리의 방비에 있어 조금도 늦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런데 중문(重門 : 2중문)으로 하여 지키며 폭객(暴客 : 폭도)을 기다리는 일이 (1구절 결) 3∼4개월이 되도록 완결된 곳이 없으니 국가의 일이 그 어찌 되겠습니까? 서변(西邊)을 지키는 장교(將校)는 거의가 토병(土兵)을 괴롭히는 자들로서 일부 믿을만한 곳은 모두가 담이 무너지고 성첩(城堞)이 떨어져 나간 곳입니다. 만약 효기(繞騎)로 멀리 몰고 나와 유린하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까마귀 흩어지듯 분쇄될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4자 결) 또 변상(邊上)의 요충에는 궁마(弓馬)가 있어야 하고 여력(膂力)이 있는 장사(將士)가 있어야 승리할 수 있는 장책(長策)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는 서북의 수령을 모두 무변(武弁 : 무관)으로 차송하고, 그 가운데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나고 재략이 으뜸인 자를 선발 담당케 하며, 성곽을 수선하고 그 인리(人利 : 맹자 공손축 편에 天時는 地理만 못하고 지리는 人和만 못하다 라는 데서 인용한 인화 ·지리의 두가지의 약어)를 얻게 할 것이며, 때로는 강직하고 위망(戚望) 있는 사람으로 어사(御史)를 삼아 서북(西北) 남삼변(南三邊)으로 파견하여 비기(肥己 : 私腹을 채움)만을 일 삼고 직사(職事)를 폐추(廢墜)시키는 무리를 적발하도록 하여 팽아(烹阿 : 전국시대 제의 위왕이, 맡은 바 선정은 하지 않고 왕의 측근에게 뇌물을 바쳐 칭찬을 구한阿大夫와 칭찬한 측근에게 烹刑을 가한 故事에서 나온 말로 맡은 바 소임은 다하지 않고, 윗사람에게 아부만 하려는 자의 처단을 비유하여 일컬음)의 법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만포첨사(滿浦僉使) 장후완(蔣後琬)은 현재 사핵(査覈 : 조사, 심리)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 진(鎭)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을 알고 약졸(弱卒)을 착취함이 전보다 배타 더할 것이며 기계(器械), 성첩(城堞)의 수선에는 태만할 것입니다. 특히, 비변사로 하여금 계례(計慮) 있고 근간(勤幹)한 자를 의천(擬薦)하도록 하여 1∼2일 안에 발송하고, 장후완(蔣後琬)은 그 진(鎭)에 그대로 충군(充軍)하여 변맹(邊氓)이 수화(水火)에서 벗어난 것처럼 마음을 후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비변사로 하여금 의처(議處)하계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계사 가운데 서북의 수경을 무변(武弁)으로 차송하라는 문제는 더욱 오늘날의 급무(急務)로서 안주(安州)의 경우는 이미 처치하였으나 현재 궐원(闕員)인 개천(价川) ·맹산(孟山) 등 읍은 이조로 하여금 역시 나이 젊고 용력있고 아울러 자목(字牧 : 사랑으로 다스림)할 능력이 있는 자를 특별히 선발, 신중히 차출할 것이며, 변경 가까운 각 읍을 일시에 바꾸면 일이 소요스럽게 되니 그 자리가 궐원되는 대로 무인을 차송하는 것이 타당하습니다. 또 함흥(咸興) ·평양(平壞)은 모두 구도(舊都)로서 성을 쌓아 지키는 곳입니다. 함흥의 경우는 감사(監司) 외에 문관 판관(文官判官)만이 있고, 평양은 서윤(庶尹)과 판관(判官)이 모두 문음관(文蔭官) 입니다. 이 두 곳의 판관을 우선 체차하고, 무변 가운데 나이 젊고 계려(計慮)있고 명망이 있는 자를 직질(職秩)의 고하는 논하지 말고 잘 가려 서둘러 차송하는 것도 타당하며 만포첨사 장후완(蔣後琬)은 본사(本司)에서 일찍이 들은 바 있어 체차를 계청하였으나 위에서 본도(本道)에 사핵하라 명하셨으므로 지금 다시 따로 논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수령(守令)을 체차하는 문제는 타도 수령의 궐원(闕員)을 기다려서 제수하라 장후완은 파직해야 하는가? 체차해야 하는가? 그 대신을 요즘의 예에 의하여 의천하라."

하였다.

 

인조 2년(1624년) 3월 8일 아뢰기를,

“접대도감(接待都監)의 계사에 대한복제(覆啓)에 전교하시기를, ‘조사(詔使)가 오지 않으면 그만이나 만약 금년 안에 나온다면 조용히 처리한다는 말은 지나치게 한만한 것 같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지금, 공사(公私)가 모두 가난하고 또 흉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때에 폐해가 백성에게 미친다면 매우 우려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을 추수를 기다려서 처리, 조치하려 하였습니다. 지금 성교(聖敎)를 받드니 매우 윤당(允當)하옵니다. 조사(詔使)의 지대(支待)에 긴요한 물건을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해조(該曹)와 공동으로 참작, 마련하게 하여 계하(啓下)한 위에 해조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편의한 대로 준비하고, 부득이 외방(外方)에 분정(分定)해야 할 것은 적당히 복정(卜定 배정)할 것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아뢰기를,

"모도독(毛都督)의 송덕비(頌德碑)를 지난해 이미 세우기로 하였으나 지금까지 세우지 못하였으니 일이 매우 늦어졌습니다. 비문(碑文)을 대제학으로 하여금 짓게 하여 서둘러 내려보내 조사(詔使)가 오기전에 새겨 세우도록 하는 것이 의당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아뢰기를,

“이달 초 5일의 인견(引見) 때에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신이 서변(西邊)에 있을 때, 모도독(毛都督)이 신에게 게첩(揭帖)을 보낸 때도 있었고 신도 또한 게첩을 보냈으나 모두 계달(啓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역변(逆變)으로 말미암아 미처 상통(相通)하지 못하였으며 이곳에 온 이후에도 서로의 문안(問安)이 끊어지니 온당하지 않은 듯 싶습니다. 신이 거느린 군관(軍官)을 보내 안부를 묻고 싶으나 인신(人臣)에게는 사교(私交)의 도가 없습니다. 비변사로 하여금 의처(議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아뢴대로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장만(張晩)이 나온 이후, 마땅히 도독(都督)에게 안부를 묻는 예(禮)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이 계사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되 해조(該曹)로 하여금 급히 예물(禮物)을 보내게 하는 것이 의당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아뢰기를,

“전부원수(前副元帥) 이서(李曙)가, 관하의 장관(將官)과 군졸로서 궤산(潰散)하여 도망친 자의 별단(別單)을 서계(書啓)한 내용을 계하(啓下)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장후완(蔣後琬) ·황덕영(黃德韺)은 현재 수사 구속하는 중이요, 그 나머지 파총(把摠) 방선경(方善慶) 이하는 병조로 하여금 그 범행의 경중을 조사하여 충군(充軍 군역으로 보충함)하여 벌로 방수(防守)하도록 하는 것이 의당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아뢰기를,

“지금 철산부사(鐵山府使) 안경심(安景深)의 장계를 보면 도독(都督)의 차수비(差守備) 2인, 가인(家人) 1명이 예단(禮單)을 갖고 올라온다고 하였습니다. 접반관(接伴官) 1원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여 일 잘 보는 역관(譯官) 2인을 데리고 밤세워 발송(發送), 보호하여 오도록 할 것이며 접대하는 기구(器具)를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따로 한 곳에 설치하게 하여 접대하게 하는 것이 의당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아뢰기를,

“본사(本司)에서 초기(草記)로 통제사(統制使) 구인후(具仁垕)의 탑전(榻前) 계사에 대해 복계하니 전교하시기를, ‘아뢴대로 하라. 수령(守令)에게 벌(罰)을 시행하는 일에 있어 원근(遠近)을 물론하고 통제사로 하여금 주관(主管)하게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수령에게 벌을 시행하는 일에 있어 비록 통제사로 하여금 주관하게 한다 하더라도 순찰사(巡察使)는 한 도(道)의 주인으로서 알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령에게 벌을 시행함에 있어 원근을 물론하고 관찰사와 협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의당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아뢰기를,

“지금 평안감사 이상길(李尙吉)이, ‘도독(都督)에게 칙서(勅書)를 가져 온 허입례(許立禮)를 접반(接半)하고 문위(問慰)하는 등에 관한 사신을 밤낮을 가리지 말고 내려보내달라'고 치계(馳啓)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허입례는 비록 허국(許國)의 아들이긴 하나 섬(島)으로 나오는 것은 우리나라의 일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예를 만들어 접대한다면 도독에게 나오는 많은 차관(差官)들은 모두 바라는 마음을 가질 것이며 지대(支待)하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일찌기 접반사(接伴使) 윤의립(尹義立)의 장계에 의하여 이러한 뜻을 복계(覆啓)하여 행회(行會)하였습니다. 허입례(許立禮)가 섬에 도착하여 문위(問慰)에 대한 예(禮)에 관하여 언급(言及)이 있게 되면 도독차비역관(都督差備譯官) 등으로 하여금 ‘대인(大人)이 나온 사실을 조정(朝廷)에서 듣지 못했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 의당할 듯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사낭청(司郞廳)이 체찰사(體察使)의 뜻으로 아뢰기를

"듣자오니 통제사 구인후(具仁垕)가 근왕(勤王)을 위하여 올라올 때, 쌀 1척석을 병량(兵糧)에 보태려고 배에 싣고 오다가 경성(京城)에 도착하니 적난(賊難)은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중지하고 도로 입고(入庫)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인후에게 통고하여 올려 보내도록 전일 이미 탑전(榻前)에 계달(啓達)하였었습니다. 보장(保障 강화(江華)) 또는 상성(上城 남한산성), 또는 연병(練兵 훈련도감)에 전혀 군실(軍實 무기와 군량)이 없어 조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쌀 1천석을 속히 올려 보내도록 구인후(具仁垕)에게 하유(下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숙종 30년(1704년) 7월 16일 정원에서 아뢰기를

"훈련대장 윤취상이 전직인 어영대장 때에 받았던 명소패를 이미 반납하였습니다. 군병을 거느리는 소임은 한 시도 총찰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되는데 어떻게 하릿가?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상의하여 천거하게 하라."

하였다.

○ 어영대장 망:○ 김석연(金錫衍) 이우항(李宇恒) 이상전(李尙銓).

○ 이번 7월 15일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에 좌의정 이여(李畬)가 아뢰기를

"이것은 황해감사 임윤원(任胤元)의 장계입니다. 여기에 이르기를 `토산(兎山)은 본래 지극히 쇠잔한 고을로서 전토는 3백 결에 지나지 않고 백성은 1천 명도 못되어 일없는 평상시에도 모양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근래에는 농사가 연거푸 흉년이 들고 수령은 자주 바뀌어 고을의 물력과 백성의 사정은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제반 수응하는 일은 완신할 고을과 다름이 없게 하기 때문에 고을의 물력은 지탱하기 어려워 호원이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의 형세로 말하자면 백성들은 대부분 흩어지고 전토는 많이 묵어있어 남은 민호는 겨우 4백여 호이며 남은 전결은 겨우 70여 결에 불과하니 종전에 4∼5인이 담당하던 역을 지금은 한 사람에게 책임 지우고 4∼5결에서 응역하던 것을 지금은 한 결에 책임지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반 책응하는 일은 전보다 훨씬 무거우므로 모두가 대동미(大同米)에서 나오는데 대동미마저 지탱하기 어렵게 되자 첨가하여 책징하는 폐단은 세 가지, 네 가지가 더 되어 더러는 솟을 팔고 더러는 소와 말을 팔아 겨우 겨우 당장의 응역을 메우는데, 일후에 또 이러할 것을 두려워하여 거의 흩어져 떠나고 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이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전 경내가 장차 비어버릴 터이니 별달리 진념을 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반 잡역 중에서 본도에서 변통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감하고 의정부 중추부 기노소 등에서 복정(卜定)한 납약가(臘藥價)와 제호탕(醍醐湯)에 들어가는 꿀과 군기시에 내는 향사(鄕絲:명주실) 및 기타 각사에서 직접 배정한 물건과 별정한 물건들을 한 2년 동안 특별히 면제해 달라고 비변사에 치보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 본현 치패한 실상은 조정에서도 이미 익히 알고는 있으나 각사의 유래하는 전례는 본사에서도 졸연히 제감하기 어려우니 사유를 갖추어 치계하라고 제사하여 보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유를 매거하여 계문하오니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도록 분부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토산 고을은 본래 쇠잔한 데다가 연달아 흉년을 당하여 본래 모양을 갖추지 못하니 곧 폐읍이 될 것이라고 한 장계의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마땅히 각별히 보살펴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으니 각사에 분부하여 감면해 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토산은 본래 쇠잔한 고을이었다."

하였다. 예조판서 민진후가 아뢰기를

"쇠잔한 고을일 뿐이 아니라 연달아 흉년을 만나 모양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한 2년 제감을 청하였는가?"

하매, 이여가 아뢰기를

"2년 한하고 제감을 청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3년 한하고 감면해 주라."

하였다. 예조판서 민진후가 아뢰기를

"연년 진휼을 베푸니 진휼청의 비축도 모두 바닥이 났는데 삼남의 금년 농사가 또 흉작을 면치 못하겠다하고, 그 중에서도 충청도가 더욱 심하다고 하니, 앞으로 백성의 정상이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진휼할 물력을 불가불 미리 요리해 두어야 하겠는데 신 같은 비재(菲才)가 때마침 이 소임을 맡아 망연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으니 더욱 민망스럽습니다. 여러 도신(道臣)의 장계로 보면 평안도가 가장 나은 듯하므로 지금 그곳에서 곡물을 사오려고 하나 재력도 없고 또 폐단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이 때문에 망설이고 있습니다. 듣자니 비국의 구관목(句管木)으로 가을에 받을 것이 거의 3백 동이나 되고 호조의 노비 공목(貢木)과 병조의 여정목(餘丁木)의 수량도 많다고 하는데 본도에는 목화가 희귀하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모두 쌀로 대납하기를 원하고 있다 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한결같이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시중 가격으로 절가하여 쌀로 대신 받아 실어다가 진휼에 보태도록 하고 본목의 대충은 진휼청에서 변통하여 각 아문에 갚아주도록 하는 것이 극히 편리하고 타당할 듯합니다. 일은 비록 세세하오나 품정치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앙달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작년에 각 도의 피재읍에는 제반 신역을 견감해 준 것이 많았습니다. 그 재감(災減)한 대충은 의당 진휼청에서 상환해 주어야 하나 진휼청에도 여유가 없어 지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잔폐한 각사는 더욱 감내하기 어렵다고 하니 이 점은 고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작년에 진휼할 때에 호조와 병조의 무명 각 50동과 은화 5천 냥을 진휼청으로 하여금 빌어다 쓰게 하라는 명이 계셨으나 마침 변통할 길이 있어 병조의 은화 약간만 쓰고 그 여타는 모두 빌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호조의 무명 50동과 은화 5천 냥을 우선 빌어다가 재감한 대충도 해주며 진휼의 양식도 비축하고 병조의 은화와 무명은 추후 형편을 보아가며 빌어 올 요량입니다. 이 일은 비록 재가가 내린 일이오나 벌써 해가 바뀌었으니 불가불 다시 품정하여야 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의정 이여가 아뢰기를

"도성을 쌓기로 계획을 정한 뒤에 이처럼 전고에 없는 가뭄을 만났으니 공사를 중지하였다가 앞으로 사세를 보아가며 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미 떠놓은 돌은 조만 간에 실어다가 마저 쌓아야 하겠습니다. 당초에는 강도목(江都木) 2백 동을 3군문에 떼어 주기로 하였으나 강화부에서 계청하여 병조에서 강화로 보내야 하는 무명으로 대신 주게 하였는데 축성 공사를 중지한 뒤에는 병조에서 또 우선 떼어 주지 않기로 재가를 받았습니다. 다른 군문에는 우선 꼭 줄 필요가 없겠으나 그 중에서도 총융청만은 가장 물력이 모자라니 이 무명 1백 동의 이자로 쇠붙이나 수래, 소 등의 값을 치뤄주려고하고 있는데, 지금 만일 주지 않는다면 처지가 매우 낭패롭다 합니다. 이는 영영 주는 것이 아니고 그 군문에서 본색은 살려 갚아주기로 한 것인만큼 병조에서 1백 동을 한번에 내주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먼저 결정한대로 강화에 비축되어 있는 병조의 무명 1백 동을 총융청에 내주어 그것으로 요리하여 이식은 취하고 본색은 갚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북도의 불법 월경한 죄인들에게 형량을 감단(勘斷)하는 일이 처음에는 형조의 장관이 인혐하고 들어감으로써 오래도록 품결치 못하다가 요사이는 옥후가 미령하사 입시치 못하여 지금까지 미루어져 왔습니다. 오늘만은 꼭 품정하려 하였으나 형조판서 이익수(李益壽)는 어버이 병세가 한창 위중하고 판의금 홍수헌(洪受瀗)은 겸대한 일 때문에 불안하여 모두 함께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사세가 또 후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이익수는 어버이의 병환이 있으니 집무할 지속(遲速)을 예측할 수 없는데 사신 행차의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죄수들을 빨리 처결하여야만 문서도 지을 수 있으니 다음에는 이익수가 동참하지 못하면 차관으로 하여금 입시하게 하여 감율(勘律)하여도 방해로울 것은 없을 듯합니다. 대체로 이 죄수들은 사체가 중하다 하지만 전후로 사문사(査問使)가 나왔을 때의 등록대로만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차관으로 하여금 입시케 하고 품결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죄인 중에서 주문(奏文)에 들어있는 자는 그 생사를 심의할 때에 반드시 형조와 의금부의 관원이 동석하여야만 결정할 수 있으나 본도에 갇혀있는 파수꾼이나 향소(鄕所) 및 아전들은 경중에 차이가 있으므로 전부터 비국에서 직접 의결하였습니다. 이들은 갇혀있는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빨리 처결하여 석방하여야 하겠으니 오늘 우선 품의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이것은 북병사 이홍술(李弘述)의 장계인데, 모두 추안(推案:조서)에 있고 말이 번다하기 때문에 간추려 적어가지고 왔습니다. 아산보(阿山堡)의 군관 최일원(崔一元), 도훈도(都訓導) 한명선(韓命先), 색리(色吏) 황진석(黃進石), 금단군관(禁斷軍官) 박검(朴儉), 파수장(把守將) 박익성(朴益成), 파수군(把守軍) 박의일(朴義日) 김세흥(金世興) 등은 작년 12월 초7일과 초9일 두 번 불법 월경하였을 때에 막지 못한 죄이고, 아오지보(阿吾之堡) 군관 김시현(金時玄), 도훈도 겸 금단감관 김기웅(金己雄), 색리 정막동(鄭莫同), 파수군 오인숙(吳仁淑) 등은 12월 13일 월경할 때에 금단(禁斷)하여 잡지 못한 죄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오지 파수장 전대업(全大業)과 파수군 김의현(金義玄)은 이미 물고가 났습니다. 금삼사목(禁蔘事目)에는 불법 월경한 곳의 파수장과 대장(代將) 등이 적발하지 못하고 다른 경로로 발각된 자는 각별히 형추(刑推)한 뒤에 변방의 진보에 정배한다고 되어 있어 경오년(숙종16년(1690)) 옥사 때의 파수장들은 이 사목대로 정죄하였습니다. 이번에 월경하여 변란을 일으킨 일은 불법 채취에 비하여 죄상이 더욱 무거우나 이 사목대로 처치하

여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사목대로 처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그 중에서 최일원은 예진(禮進) 부자를 정탐하여 체포하였기 때문에 장계에서도 공로와 죄과가 상쇄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불문에 부쳐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자는 체포한 공로가 있으니 불문에 부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경원(慶源)의 향소(鄕所) 김정화(金鼎和), 종성(鐘城)의 향소 주적(朱摘)은 바로 죄인들이 살고 있는 고을의 민정(民丁)을 담당한 향임(鄕任)인데 경오년에 불법 월경 옥사의 죄율을 감단할 때에 부사가 이미 압송한 자들인데 좌수(座首)와 병방(兵房)이라고 해서 결코 불문에 부칠 수는 없다 하여 1차 형추하고 석방한 바 있으니 그대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정범 박인욱(朴仁旭)과 칠련(七連) 등이 살고 있는 마을의 약정(約正) 김준청(金俊淸), 통수(統首) 노(奴) 처태(處兌)와, 정범 유일(有一) 및 김기홍(金起弘)이 살고 있는 마을의 약정 김순영(金順英)과, 정범 유시만(柳時萬)이 살고 있는 마을의 향소 겸 통수 장번(蔣藩), 약정 정철운(鄭哲雲)과, 정범 김거륵(金巨勒)이 살고 있는 마을의 약정 허귀재(許貴才), 통수 김예일(金禮一)은 모두가 죄인과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경오년 월경한 옥사에 관한 죄를 감단할 때에 풍헌(風憲) 이정(里正) 약정(約正) 유사(有司) 등은 의당 그 기미를 알고 있었다고 여겨 1차 형추하고 도내에 정배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처치하여야 하겠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그 정을 아는 바가 차이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불법 채삼의 경우는 국경을 넘어가서 며칠을 머물렀으니 가고 오는 정상을 한 마을 사람이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므로 이로써 죄를 줌이 타당하였으나, 이번에 변란을 일으킨 일은 하루 밤 사이에 몰래 갔다가 몰래 왔으니 이웃에서도 몰랐을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이로 논하자면 이정 등은 그 죄가 조금은 가벼울 듯하나 변방의 법금은 지극히 엄하고 또 들어갈 때에는 아무리 몰랐다 하더라도 돌아온 뒤에는 알 도리가 없지도 않았을 터인데 숨기고 발고하지 않았으니 이 점은 죄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구례대로만 처치하릿가?"

하니, 임금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삼을 캐는 일은 며칠을 지나야만 돌아오게 되니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지만 이번에는 밤을 타서 갔다 왔으니 약정의 무리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죄인들의 죄범은 채삼보다 무거우나 이웃 마을에서 살필 수 있는 길은 채삼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돌아온 뒤에 고발하지 않은 죄과로 향소 등과 같은 죄로 처치하였으면 하는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이르기를

"재신들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판윤 이이명(李頤命)은 아뢰기를

"이는 비록 채삼으로 월경하였을 때의 인보(隣保)보다는 약간 가볍다 하겠으나 변방의 사체는 지극히 중한 것인데 지금 만일 법을 늦추어 준다면 뒤에는 필시 가벼이 알고 범할 것이니 한결같이 사목대로 처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예조판서 민진후는 아뢰기를

"넘어갈 때에는 비록 몰랐다 하더라도 돌아온 뒤에는 여러 곳에다 장물을 숨겨 두어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여 변장이 듣고 정탐하여 포착한 것이니 한 마을에 사는 사람이 모를 리가 없었을 터인데 끝내 고발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또 경오년의 전례도 부사에게 잡혀온 향소 등이 결국은 죄를 면할 수 없다고 말을 하여 한차례 형추(刑推)하였으니, 이번의 각 고을 향소도 이 예대로 형추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임(里任)의 죄는 향소에 비하여 훨씬 중한데 어떻게 똑같이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변상의 사체는 중한 것이고 이렇듯 법령이 해이하기 쉬운 때를 당하여서는 결코 늦추어 줄 수 없으니, 한결같이 경오년의 예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으며, 이여가 아뢰기를

"그 죄정만은 약간 가벼우나 변방의 법금이 지극히 중한 만큼 만일 한 번만 법을 늦추어 주면 후폐가 참으로 염려스러웁기 때문에 이렇게 앙품한 것입니다."

하매, 우윤 윤취상(尹就商)도 아뢰기를

"을축년 이후 20년간에 불법 월경이 벌써 세 차례나 있었습니다. 변상의 일은 내지(內地)와는 판이하게 다르므로 사목대로 정죄함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제신이 아뢴 사체가 중하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참작하여 도배(徒配)에 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형추는 제거하고 도배에 처하릿가?"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형추를 제거하면 결국은 법을 늦추는 결과가 됩니다."

하였고, 민진후가 아뢰기를

"이른바 형추라 하는 것은 신문하여 죄상을 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자복(自服)을 받은 뒤에 형추하고 정배하는 일이 많은데 이는 죄악을 징습시키겠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사실은 법전의 본의와는 다릅니다. 지금 정배를 하면 비록 형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늦추어질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참작하여 도배에 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경원(慶源)의 품관(品官) 최정추(崔廷樞)는 죄인을 교사하여 불법 월경한 날짜를 바꾸어서 진술하게 한 죄입니다. 그 정상이 지극히 통악스러우나 이는 적용할 율문이 있으니 본도로 하여금 율문을 참조하여 정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경원의 군관 채정열(蔡廷說)은 죄인이 몰래 부탁할 때에 간여한 바가 없는 듯한데 지금까지 그대로 갇혀 있다 합니다. 이는 석방하여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놓아보내라고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아산보(阿山堡)의 병방군관(兵房軍官) 이상후(李尙厚)와 유진장(留鎭將) 김일립(金日立), 무이통사(撫夷通事) 이경민(李敬民) 등은 당초에 호인(胡人)과 문답한 일이 있음으로 인하여 추핵하였으나 지금은 논죄할 만한 일이 없으니 참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놓아보내라고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박명산(朴命山)은 칠련(七連)의 형으로 모든 죄인이 자수(自首)할 즈음에 잘못 이름을 바꾸어 납초하였기 때문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똑같이 석방하라고 하였다. 이여가 아뢰기를

"김이만(金以萬)은 개성부의 장사치로서 삼을 사기 위하여 들어갔다가 일을 저지른 자입니다. 나라에서 인삼의 매매를 금하고 있는데도 법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일을 저지르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불법 월경자와는 다르다 하더라도 다시 율문을 상고하여 각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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