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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 권채(權綵)와 이끝쇠가 죽었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폐인 지(祬)는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을 입어서 성명을 보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의당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죄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흉한 꾀를 내어 구멍을 뚫고 도망쳐 나가 형적이 망측하여 스스로 그 죄를 초래하였으니, 국인들이 함께 놀라고 왕법(王法)으로 꼭 베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비전의 분부가 내리고 조정 공론이 모두 같았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합계로, ‘은의의 정을 끊으시라.’ 한 것은, 실은 한 나라의 똑같은 공론이온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그 말을 바꾸어서 앞뒤가 모순되게 물러나겠다는 말들이 분분하고 사면하겠다는 계사가 연이었습니다. 이미 계속해서 계사도 올리지 않고 또 정계(停啓)주D-001도 하지 않아서, 대간 관원들이 사건을 논의하는 체면을 크게 잃어버렸으니, 사헌부와 사간원을 함께 갈아주소서.” 하였다.
○ 대사간 박동선이 사면으로 체직된 대신에 신식(申湜)을 임명하였다.
3일 ○ 사헌부가 아뢰기를,
“폐인 지는 그 심정과 행동이 뚜렷이 드러났으니, 국법으로 꼭 베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대비의 분부가 내리셨고 대의가 지극히 엄중한데, 어찌 일각인들 살려두어 뒷날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생기게 하겠습니까? 빨리 처치하시어 종묘 사직이 안정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우참찬 이귀(李貴)가 상소하기를,
“옛날 영웅들이 그 시대를 만회(挽回)한 것을 보오니, 모두가 한때의 인재들을 거두어 쓰는데 있었습니다. 선왕조 때부터 사림들의 논의가 나뉘어 동인과 서인이 되고, 폐조에 와서는 대북(大北)ㆍ중북(中北)ㆍ소북(小北)의 당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소위 대북이란 것은 다 흉악한 역적의 무리들이니 본디 말할 것조차 없으며, 중북ㆍ소북도 역시 사류(士類)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쓸만한 인재가 없다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소소한 흠을 버리고 등용하소서. 서인과 남인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류이지만 역시 정의가 서로 맞지 않아서 부딪치면 의심을 사게 되어 시국의 어려움을 같이 구제할 수 없으니, 어찌 국사의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중에 사류들이 폐비 문제에 관해 정청하거나 수의하는 날에 혹은 위세에 눌린 바 되어 혼자 반대하지 못했으니, 그 본심을 따져 본다면 어찌 모두 역적의 당이라 하겠습니까? 그 평생의 행신한 본말을 알아 보면 거개가 버리기 어려운 인재들이오니, 이제 와서 한 자쯤 썩었다 해서 전체 재목을 버리는 것이 어찌 큰 목수가 재목을 다루는 방법이라 하겠습니까?” 하였다.
○ 정사를 하여, 대사헌에 이귀, 집의에 이준(李埈), 사간에 조성립(趙誠立), 헌납에 유백증(兪伯曾), 정언에 김상(金尙), 장령에 조위한(趙緯韓), 우참찬에 오윤겸을 임명하였다.
4일 ○ 사헌부가 폐인의 일로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 차중룡(車仲龍)ㆍ향이(香伊)ㆍ금이(金伊)를 석방하고, 황대익(黃大翼)을 귀양보내고, 이민수(李敏樹)를 놓아 보내고, 이명(李溟)을 삭직하여 놓아 보냈다.
○ 정사를 하여, 헌납에 오숙(吳䎘)사피하여 체직된 유백증(兪伯曾)의 대신. 을, 부교리에 조희일(趙希逸)을 임명하였다.
5일 ○ 정언 김상(金尙)이 아뢰기를,
“폐인과 은의를 끊으라는 논의는 이미 사헌부에서 내었으나, 사간원의 많은 관원들은 모두 일이 있었으므로 신 혼자서는 논의에 간여할 수 없었기에 동료들이 출사하기를 기다려서 서로 논의하려 하였습니다. 이제 중론을 듣건대, 신이 눈치를 살피고 발의하지 않는다 하오니 청하옵건대, 체직하소서.” 하니, ‘물러가 기다리라.’ 하였다.
○ 막덕을 석방하였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폐인이 제 스스로 원한을 품고 땅을 파고 도망쳐 나가니, 전일에 묘당 재신들과 삼사에서 같은 사연으로 죄를 청한 것이 어찌 아무 소견없이 함부로 논의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성상께서 비답하시는데 불쌍히 여기시는 분부가 계시어서 간관 한 사람이 갑자기 자기의 의견을 변해서 사피하므로, 이 까닭에 사헌부와 사간원이 모두 당초의 사연을 뒤엎고 분분하게 사퇴하였습니다. 대간에서 논계한 것은 각기 소견을 개진해서 진실로 옳은 일이면 비록 온 조정이 잘못이라 하더라도 돌릴 수 없는 것이며, 만일에 옳지 못한 것이라면 비록 성상의 하교가 엄중하더라도 온 조정이 잘못이라는 것은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오늘에 있어서 모두 옳던 일이 내일에 있어서 모두 잘못된 일이 있겠습니까? 대개 오늘날의 이 논의는 같고 같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사단이 있습니다. 전에 재신과 양사며 옥당의 논의가 모두 은의를 끊으라 청하였고, 뒤에 양사에서 잘못임을 인책하였으니, 즉 은의를 온전하게 하는 것을 옳게 여겼고, 옥당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이 적이 생각하옵건대, 폐조는 임해군(臨海君)이나 대군에게 혈연 관계로는 동기였는데, 죄로 말하면 아무 범한 것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여러 소인들의 구함(構陷)하는 말만 듣고 차마 할 수 없는 처지에 차마 하는 것은 사람 중에도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지금 폐인 지(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혈속으로 말하면 임해(臨海)보다 소원하고 인간으로 말하면 독부(獨夫)의 자식이며, 죄로 말하면 은혜를 저버리고 천명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전하께서 곡진하게 용서한 것이 비록 지극한 은의(恩義)라 하더라도 여러 신하들의 대의로 단정하려 한 것은 어찌 국가 법전으로 당연히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인신들이 국가에 계책을 세우는 것은 당연히 종묘 사직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인데, 만일 뒷날에 흉인들이 이것을 빙자해서 범람된 생각을 가진다면 그 화를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오니, 전하께서는 쾌히 공론을 따르시어 여러 논의를 정하소서. 정언 김상은 동료가 출사하기를 기다려서 상의하려 하다가 약간 날짜를 늦추었으니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폐인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6일 ○ 대사간 신식(申湜)ㆍ집의 이준(李埈)ㆍ장령 윤황(尹煌)ㆍ정언 김상이 정사하였다.
○ 헌납 오숙은 일로 갈렸다.
○ 대사헌 이귀ㆍ장령 조위한(趙緯韓)ㆍ지평 심기원과 김자점이 피혐(避嫌)한 대개는, ‘대간들은 일이 없으면 출사하고 일이 있으면 회피하여 정고(呈告)가 연달으매, 신 등이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없으니, 갈아달라.’는 것이었는데, ‘물러가 기다리라.’ 하였다.
7일 ○ 옥당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이귀 등은 출사하게 하고 정고한 사헌부 관원들은 모두 체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였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부응교 이민구(李敏求)는 공론이 한창 벌어진 때에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아서 현저하게 일을 기피하는 자취가 있으니, 청하옵건대, 체직하소서. 중국으로 보내는 사신은 폐조 때에는 분주하게 모면하려고 은을 바치고 모면하기까지 하여 극도로 무리하였습니다. 이번 동지사 서장관은 전일에 제수되었다가 회피를 꾀한 자를 차송(差送)하였습니다. 폐인의 일은 당연히 단정하여야 할 것을 단정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의심만 하여 괴상한 공론만 백 가지로 나와서 만단으로 의심만 사오니, 어렵게 머물러 두시지 말고 속히 처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질병은 사람이 면하기 어려운 것인데, 어찌 병으로 정고한 것을 체차하겠는가? 폐인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정사를 하여, 대사간에 이현영(李顯英), 집의에 정종명(鄭宗溟), 장령에 이상급(李尙伋), 정언에 임연(林堜), 철원 부사에 이준(李埈), 삭녕 군수에 윤황(尹煌), 은계찰방에 김상(金尙), 헌납에 정백창(鄭百昌)을 임명하였다.
10일 ○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계하기를,
“폐인 지는 용서해서 종묘 사직에 화를 끼치게 할 수 없으니, 한 번 성상께서 윤허를 내리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11일 ○ 헌납 정백창이 정고로
체직된 대신에 김세렴(金世濂)을 임명하였다. 15일 ○ 전교하기를,
“이중로(李重老)에게 강화 부윤을 도로 제수하고, 이광영(李光英)을 양주 목사로
제수하라.” 하였다. ○ 부제학 정경세(鄭經世)ㆍ부응교 이민구ㆍ교리 심액ㆍ수찬 이경여 등이 상소한 대개는, ‘신 등이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합계한 공론에 당초의 주장을
바꿀 수 없으니 체직하라.’는 것인데, 비답하기를,
“조금도 실수한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6일 ○ 대사헌 이귀ㆍ대사간 이현영ㆍ집의 정종명ㆍ사간 정온ㆍ장령 이상급ㆍ지평 김자점ㆍ헌납 김세렴이 아뢰기를,
“신 등이 홍문관에서 상소한 것을 살펴보오니,
두 가지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곧 신 등을 법의 규례에 의거하라는 말이오며, 또 하나는 옛날 주공(周公)을 남들이 논의한 말인
것입니다. 이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이 말을 하는 자가 과연 폐인을 보전시켜서 망명(亡命)이라도 하여 구차하게 살릴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의친(議親)’이란 것은 사형 이외는 그래도 논의할 수 있겠습니다.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주공과 같은
성인으로도 그 형제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사형하여 일찍이 용서한 일이 없었습니다. 어찌 주(周) 나라 시대의 법전을 고수하지
않겠습니까? 홍문관이 먼저 차자에서 말한 바, 설령 단서가 명확하지 않고 증거가 구비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땅을 파고 도망치려 한
것은 극히 음흉하오니, 묘당이나 대간에서 은의를 끊은 자로 논죄하여 당연한 형벌을 주려는 것이 참으로 알맞는 논의일 것입니다. 논의를 드린다는
차자에 단지 성덕만 칭송하고 은의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옳고 은의를 끊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결단은 못하다가, 지금에 와서 말을 바꾸었다
하오니, 혹 당초의 의견이 비록 굳었다 하더라도 의리로 강구해 보고 경중을 살펴보면 일월같은 변경이라도 사람들이 모두 흠앙할 것입니다. 옛
전례로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계한 지가 수일이 되어도 홍문관에서 쾌하게 찬동하는 공론을 하지 않으면 양사에서는 즉시 피혐하는 법입니다. 그러하오나
신 등이 5~6일을 미루며 지금까지 말없이 있었던 것은 혹시나 기한이 경과되어 아무 말 없을까 하였더니, 오늘날에 와서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때에 처음으로 소장이 나왔습니다. 신 등이 보잘것 없어서 참으로 서로 감동시키지 못했고, 말이 서로
미덥지 못하여 공론을 펴지 못하게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물러가 기다리라.’ 하였다. 17일 ○
장령 조위한ㆍ지평 심기원이 아뢰기를,
“홍문관에서는, 전하의 의사를 순종하려 하고, 양사에서는 법에 근거하여 죄를 청합니다.
다투는 바는 공론이며 단연코 다른 뜻은 없지만, 종묘 사직을 위해서 깊이 생각하는 데는 홍문관의 공론이 혹시나 미치지 못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체직하소서.” 하니, ‘물러가 기다리라.’ 하였다. ○ 홍문관의 차자는 ‘사헌부와 사관원 관원들을 출사하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8일 ○ 사헌부가 아뢰기를,
“정평 부사(定平府使) 장후완(蔣後琬)은 뇌물로 벼슬을 얻었고, 백성들을 침탈하고 포학하는 짓을 일삼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금성
현령(金城縣令)이결(李潔)은 사람됨이 용렬해서 정사를 하인들에게 맡기며, 금구 현령(金溝縣令)성희구(成僖耈)는 사람됨이 간사해서 백단으로 폐해가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다. ○ 홍문관의 차자는, ‘폐인 지의 일에 쾌히 공론을 따르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이러한 공론이 너희들에게서 나올 줄은 내가 짐작하지 못했노라. 이번에 차사(箚辭)를
보니 괴상하고 놀랍기 그지없다. 이러한 논의를 하지 말아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 정언 임연(林堜)을 정고로 체직하고 송상인(宋象仁)을 대신 임명하였다. 20일 ○ 사헌부가 아뢰기를,
“용궁 현감(龍宮縣監)원득회(元得會)가 그 자제들을 내어놓아 이속들의 처를 겁간하게
하였으니, 사판에서 삭제하고, 봉산 군수(鳳山郡守)는 뇌물로 수령을 얻었으며 정사를 이속들에게 맡겼으니,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 사간원이 아뢰기를,
“거제 현령(巨濟縣令)윤은걸(尹殷傑)은 탐욕을 거리낌없이 부렸으니, 사판에서 삭제하고,
행사용(行司勇)두기문(杜起文)은 천한 아전으로 벼슬하였으며 부역을 피하려고 박자흥의 집에 의탁하였으니 충군(充軍)하도록 계하하소서. 또 귀양도
보내지 않는다면 세도만 믿고 날뛸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으니, 잡아 가두소서.” 하였다. 21일 ○ 조강 때에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이, 폐인 지(祬)의 일을 합계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득이 따르노라.” 하였다. ○ 부제학 정경세의 상소는, ‘병이 중해서 삼사가 합계하는데 참여하지 못했으니, 체직시켜 달라.’는 것이었는데,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2일 ○ 의금부가 아뢰기를,
“폐인 지를 처치하는 일에 대한 계사에, 대의(大義)로 처벌한다는 말만 있고 정한
율(律)은 없사오니, 대신들에게 논의해서 정하시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윤허하였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보령 현감 박진(朴瑨)은 아비가 염병으로 죽자 나가서 피하며 염(斂)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탐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여, 한 고을이 비다시피 되었습니다. 사재 직장(司宰直長)· 정준(鄭儁)은 행실이 어그러졌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다. 23일 ○ 폐인의 일을 대신에게 논의하니, 우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차마 못하시는 지극한 은정을 삼사의
공의에 굽히시어 부득이 좇으시었으면 오직 유사가 품의해서 처치할 일이오나, 자살하게 하는 것도 특별하신 분부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니,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ㆍ원임대신
기자헌(奇自獻)ㆍ정창연(鄭昌衍)은 병으로 수의하지 못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였다. 24일 ○ 사헌부가 아뢰기를,
“위장(衛將)이정배(李廷培)는 제집에서의 행실이 흉패하고 관부에 있으면서는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다. 25일 ○ 폐인 지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전교에,
‘의복ㆍ금침ㆍ관곽을 폐빈(廢嬪)의 예대로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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