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야언1 : 세종(世宗)

○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가 세자로 있을 때에 매번 글을 읽을 때면 반드시 1백 번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 같은 것도 또 1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병이 들었을 때에도 글 읽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병이 점점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조리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그것을 천백번이나 읽었다.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어 안 읽은 책이 없었고, 학문에 빛나는 공덕을 이룸이 백왕(百王) 중에서 가장 뛰어났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글 읽는 것이 유익하지만,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 같은 것은 임금으로서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만년에는 정사를 돌보는 일에 지쳐 조회(朝會)는 보지 않았으나, 문학에 관한 일에 더욱 생각을 두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고, 차례로 여러 가지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병요(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등이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모두 임금의 재결(裁決)을 거쳐 이루어진 책으로서, 하룻 동안에 열람한 것이 수십 권이나 되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운행함과 같이 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필원잡기》
○ 세종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신 고령(申高靈 신숙주)ㆍ성삼문(成三問) 등에 명하여 언문을 지었는데, 초종성(初終聲)이 여덟 자, 초성(初聲)이 여덟 자, 중성(中聲)이 열한 자로서 그 자체(字體)는 범자(梵字 인도글자)를 본떠서 만들었다. 우리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의 말소리에 대해서 한자(漢字)로는 적을 수 없는 것까지 다 통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홍무정운(洪武正韻) 의 모든 글자도 언문으로 다 썼다. 드디어 5음(音)으로 나누어 구별하였는데,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이다. 순음에는 가법고 무거운 차이가 있고, 설음에는 정(正)과 반(反)의 구별이 있으며, 글자에는 또한 전청(全淸)ㆍ차청(次淸)ㆍ전탁(全濁)ㆍ불청불탁(不淸不濁)의 차이가 있어, 아무리 무식한 여인이라도 똑똑히 깨치지 못하는 이가 없었으니, 성인께서 사물을 만드신 지혜는 범인의 힘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데가 있다. 《용재총화》
○ 세종이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제정하였는데, 중추부사 박연(朴堧)이 도와 이루어진 것이다. 박연은 앉아서나 누워서나 항상 손을 가슴에 얹어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율려(律呂)의 성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10여 년 만에 비로소 이룩하였는데, 세종이 매우 중히 여겼다.
세종은 또 자격루(自擊漏 시계의 한 가지)ㆍ간의대(簡儀臺 천문대)ㆍ흠경각(欽敬閣 물시계를 두었던 집)ㆍ앙부일구(仰釜日咎 해시계) 등을 만들었는데 제작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였으며, 그것은 모두 임금의 재량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임금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자는 없었으며, 오직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남다른 재주와 솜씨를 운용하여 임금의 뜻과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상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우리 세종의 제작을 왕성하게 하기 위하여 때에 맞추어 태어난 인재들이다.” 하였다. 《필원잡기》. 아래의 대목도 마찬가지이다.
○ 세종이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뜻을 두었는데, 그 주석이 미진하고 구두가 분명하지 않음을 염려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널리 여러 서적에서 채집하여, 사건마다 주를 달아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註)》와 《원위석문집람(源委釋文集覽)》등의 서적에 의거하여 간추려 문장을 다듬었고, 부족한 곳이 있으면 또 다른 책에서 추려다가 보충하였다. 또 문자의 뜻이 난해한 곳이 있으면 본사(本史)의 전구(全句)를 주석하되, 글귀 밑에 쓰기도 하여 구두(句讀)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글자의 풀이와 음의 옮김에 있어 자세히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의 재결을 얻은 것이다. 이름을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하였고, 《강목통감(綱目通鑑)》도 마찬가지인데, 그 훈의(訓義)의 정밀함은 비할 데가 없다.
○ 세종 기해년 5월에 충청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비인현(庇仁縣) 도두곶(都豆串)에 침입하였는데, 만호(萬戶) 김성길(金城吉)이 술에 취하여 막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고, 그의 아들이 힘껏 싸우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하였다. 정사년에 황해도 관찰사는 보고하기를, “절도사(節度使) 이사검(李思儉) 등이 해주(海州) 연평곶(延平串)에서 적정(敵情)을 살피다가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적이 말하기를, ‘우리는 조선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 가려다가 식량이 떨어져 여기에 왔으므로 식량을 주면 물러가겠다.’ 하기에, 이사검이 쌀 5섬과 술 10병을 주었다.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으므로〉 또 쌀 40섬을 보내 주었더니, 비로소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하였다.
두 임금(상왕과 주상)이 유정현(柳廷顯)ㆍ박산언(朴山言)ㆍ조말생(趙末生)ㆍ이명덕(李明德)ㆍ허조(許稠) 등을 불러, 그들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대마도(對馬島)를 섬멸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모두들, 빈틈을 타서 치는 것은 불가하고 적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서 쳐야 한다고 하였으나, 조말생만은 홀로 빈틈을 타서 치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만일 그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항상 침략을 당할 것이니, 옛날 한 나라 고조가 흉노(匈奴)에게 욕을 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빈틈을 타서치고 그 처자들을 잡아 가지고 제주(濟州)로 군사를 돌려, 적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들과 배에 남아 있는 자들을 아울러 구속하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모두 무찔러, 나라 안의 왜인으로 하여금 경솔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약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뒷날의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고, 곧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삼아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搏)ㆍ이숙묘(李叔畝)ㆍ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로 삼고, 유온(柳溫)을 좌군도절제사(左軍都節制使)로, 박초(朴礎)ㆍ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右軍都節制使)로, 김을화(金乙和)ㆍ이순몽(李順夢)을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로 삼아,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의 병선 2백 척과, 하번 갑사패(下番甲士牌)와 별시위패(別侍偉牌) 및 수성군(守城軍)ㆍ영속(營屬)ㆍ재인(才人)ㆍ무자리[水尺]ㆍ한량(閒良)ㆍ민간인[民]ㆍ향리(鄕吏)ㆍ일수(日守)ㆍ양반(兩班) 중에서, 배를 탈 줄 아는 군정(軍丁)들을 거느리고 왜구(倭寇)가 돌아가는 길을 맞아서 치되, 6월 초8일에 각도의 병선(兵船)이 함께 견내량(見乃梁)에 모여 대기하기로 약속하고, 또 호조 참의(戶曹參議) 조치(曺致)를 황해 체복사(黃海體復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 중에서 일에 늑장을 부리거나 시기를 놓친 자를 사찰하게 하였다. 상왕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로 삼고, 참찬(參贊) 최윤덕(崔潤德)을 삼군절제사(三軍節制使)로, 사인(舍人) 오선경(吳先敬)과 군자정(軍資正) 곽재안(郭在鞍)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이 달 기사 일에 떠날 때 두 임금이 한강정(漢江亭) 북쪽에 납시어 전송하고, 안장ㆍ말ㆍ활ㆍ살ㆍ옷ㆍ갓ㆍ신 등을 내려 주었다. 경인 일에 이종무가 아홉 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巨濟) 마산포(馬山浦)에서 떠났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돌아와 거제에 정박하였는데, 배가 모두 2백 27척이요, 군졸은 모두 1만 7천 2백 85명으로, 65일 동안 먹은 식량을 가지고 갔다. 계사일 오시(午時)에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이르니, 적이 바라보고 본도(本島 대마도) 사람이 이익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다 하여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대군이 잇따라 와서 두지포(豆知浦)에 이르니, 적은 넋을 잃고 도망쳐 버리고, 다만 50여 명만이 맞아 싸우다가 패하여, 식량과 물자를 버리고 달아나 요새로 들어가 내려오지 않았다. 적에게 먼저 귀화(歸化)한 왜인 지문(池文)을 보내어, 글로써 도도웅와(都都熊瓦)를 회유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길을 나누어 수색하여, 크고 작은 적의 배 1백 29척을 빼앗아, 그 중에서 쓸 만한 것 20척을 고르고 나머지는 불살랐다. 또 적의 집 1천 9백 39채를 불사르고, 목을 자른 것이 1백 40명, 사로잡은 것이 21명이었으며, 밭에 있는 곡식을 베고, 그들에게 잡힌 중국인 남녀 1백 31명을 포획했다. 여러 장수들이 포획한 중국인에게 물어서, 섬 안에 기근이 심하고 경황이 없는 때라 아무리 부자라 해도 한두 말의 쌀만 가지고 달아난 형편을 알았으므로, 오랫동안 포위하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목책(木柵)을 훈내곶(訓乃串)에 설치하여 오가는 길목을 막고, 오랫동안 머무를 뜻을 보였다. 유정현이 종사관 조의구(趙義昫)를 서울로 보내어 대마도에서 싸움에 이겼음을 알리니, 삼품(三品) 이상의 관원이 수강궁(壽康宮)에 나아가 축하하였다. 이 종무 등이 두지포에 정박해 있으면서 날마다 편장(偏將)을 풀어서 뭍에 내려가 적을 수색하고, 다시 적의 집 68채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목을 벤 것이 9명이고, 중국인 남녀 15명과 우리나라 사람 8명을 포획했다. 적은 밤낮으로 우리에게 항거할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기해 일에 이종무는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삼군으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뭍에 내리게 하여 그들과 일전을 벌이려고 좌우 군을 감독하였다. 먼저 내려간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 박실(朴實)이 적과 서로 만났는데, 적은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병(伏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높은 데 올라가서 싸우려 했으나, 복병에게 공격을 받고 우리 군사가 패하여 편장 박홍신(朴弘信)ㆍ박무양(朴茂陽)ㆍ김언(金諺)ㆍ김희(金喜) 등이 전사하였다. 이에 박실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배에 오르자, 적이 추격하여 우리 군사가 전사하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 수십 명이나 되었다. 우군절제사 이순몽(李順蒙)과 병마사 김효성(金孝誠) 등도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아내자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중군(中軍)은 끝내 뭍에 내리지 않았다.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무를까 두려워 글월을 보내어 군사를 물리고 수호할 것을 요구하고, 또 말하기를, “7월 사이에는 항상 큰 바람이 일어나니, 대군이 오래 머물러 있음은 좋지 않소.” 하였다.
가을 7월 병오 일에 이종무 등이 수군을 이끌고 거제로 돌아와 머물렀다. 경술일에 이종무를 찬성(贊成)으로 삼고, 이순몽을 좌군총제(左軍摠制)에, 박양(朴陽)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올리고, 여러 절제사도 모두 승진시켰다. 7월에 동정원수(東征元帥) 장천군(長川君 이종무)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는 길에, 밀양부(密陽府)지동(池洞) 앞길을 지나는데, 박실(朴實)의 부인이 방에 있다가 울타리 너머로 울면서 계집종들을 시켜 길가에 나가서 발을 돋우고 서서, “내 남편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게 하였다. 장천군이 말고삐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하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며 말하기를, “그것은 나의 죄가 아니요, 여러 장수들이 가벼이 나아간 탓이오. 원하건대 낭자는 나를 허물하지 마시오.” 하였다. 길가는 사람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이 때문에 눈물을 뿌렸다. 김종직(金宗直)의 《이존록(彝尊錄)》
○ 14년 겨울 10월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朴葵)가 말을 달려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야인(野人) 4백여 기(騎)가 여연(閭延)에 갑자기 침입하여 인민을 노략질하므로, 강계절도사(江界節度使) 박초(朴礎)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잡혀 갔던 26명, 말 30마리와 소 50마리를 다시 빼앗았는데 전사자는 13명입니다. 마침 날이 저물어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노하여 곧 상호군(上護軍) 홍사석(洪師錫)을 보내어 정세를 살피게 하고, 전사한 장수와 병사에게 쌀과 콩을 내려 주었다. 이난(李爛)의 《유편서정록(類編西征錄)》. 아래 대목도 같다.
○ 박규(朴葵)가 또 장계를 올리기를, “여연(閭延)과 강계(江界)의 백성으로 포로 된 자가 75명이요, 전사자가 48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영의정 황희(黃喜),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우의정 권진(權軫), 이조 판서 허조(許稠), 호조 판서 안순(安純)을 불러 이르기를, “포로로 잡혀 간 민가가 비록 죽음은 면하였으나, 유리(流離)되어 생업을 잃었으니 내 매우 걱정이 된다.” 하고, 그들을 구호할 계책을 의논하니, 황희 등이 조세와 부역을 30년 동안 탕감하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관에서 옷과 식량을 주며, 친척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기르게 하되, 만일 친척이 없을 경우에는 살림살이가 넉넉한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구휼하게 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건주위 지휘(建州衛指揮) 이만주(李滿住)의 관하 올량합(兀良哈)과 천호(千戶) 열아합(列兒哈) 두 사람이 문첩(文牒)을 가지고 포로 된 남녀 7명을 거느리고 여연에 와서 말하기를, “이만주가 성상의 뜻을 받들어 토표(土豹 스라소니)를 잡았는데, 홀라온 올적합(忽剌溫兀狄哈) 등 1백여 기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여연과 강계에 들어와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이만주가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산골짜기의 요로를 막아, 모두 빼앗아 보호하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어 데려가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정부(政府) 육조(六曹) 및 삼군(三軍)의 도진무(都鎭撫)를 불러 그 처치 방법을 의논하니, 황희(黃喜)ㆍ허조(許稠)ㆍ안순(安純)과 판중추부사 하경복(河敬復), 찬성(贊成) 이맹균(李孟畇)ㆍ성억(成抑), 공조 판서 조계생(趙啓生), 호조 좌참판(戶曹左參判) 김익정(金益精), 공조 좌참판(工曹左參判) 정연(鄭淵), 예조 우참판(禮曹右參判) 유맹문(柳孟聞) 등이 강계 등지에 통사(通事)를 보내어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하였다.
○ 15년 봄 정월에 이만주가, 포로가 되어 갔던 남녀ㆍ어른ㆍ아이 등 64명을 송환하면서 강계에 이르러 아뢰기를, “선덕(宣德) 7년(1427년) 12월 29일에 난독 지휘(㬉禿指揮) 타납노(咤納奴)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보고하기를, ‘홀라온이 1백 50여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난독 땅을 약탈하며 지나간다.’고 하기에, 내가 이 말을 듣고 본위(本衛)의 인마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별빛이 밝은 밤에 전진하다가, 천사(天使) 장도독(張都督)과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만나 함께 수정산(守定山) 입구까지 뒤쫓아 포위하여 머물러 길을 막아서 포로를 다시 빼앗았습니다. 관리를 시켜 송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홍사석(洪師錫)이 여연(閭延)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여연 절제사 김경(金敬)과 강계 절제사 박초(朴礎)는, 적의 침범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책(木柵)이 헐었어도 수리하지 않아서 적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죽이고 노략질하게 만들었으며, 도절제사 문귀(文貴)도 규찰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관청에 회부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의금부(義禁府)에서도 아뢰기를, “도관찰사(都觀察使) 박규(朴葵)와 경력(經歷) 최효손(崔孝孫)이 국경 순찰을 게을리 하여, 성(城)과 보루(堡疊)를 완전히 수리하지 못하여 적의 침입을 불러들였으니 모두 잡아서 문초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이를 따랐다. 의금부 제조 등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박초ㆍ김경 및 백호(百戶)ㆍ천호(千戶)ㆍ진무(鎭撫)의 우두머리 등은, 우리 백성이 죽고 잡혀 가는 것을 보고도 나아가 싸우지 않았으니 그 죄는 크다. 마땅히 법에 따라 처리해야겠지만, 그간에 혹 길이 험준한 탓으로 때맞추어 가서 구원하지 못했거나, 혹은 힘으로 겨룰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후퇴할 경우는 사정상 용서하지 않을 수 없으니 거론하지 말라. 경들은 죄과를 살피되 정리(情理)에 맞추어 경중(輕重)의 알맞음을 잃지 않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박초와 김경의 죄는 마땅히 중형에 처해야 하고, 천호(千戶) 정유(丁宥)와 진무(鎭撫) 김영화(金永禾)ㆍ김봉천(金鳳天)의 죄도 박초와 김경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경들의 의논에 따르겠다.” 하여, 드디어 문귀(文貴)는 울산으로 귀양 보내어 군(軍)에 충당하고, 박규(朴葵)는 함열(咸悅)로 귀양 보냈다.
○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고, 김효성(金孝誠)을 도진무(都鎭撫)로, 최치운(崔致雲)을 경력(經歷)으로, 이숙치(李叔畤)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윤덕ㆍ효성ㆍ치운 등이 하직할 때, 상이 불러들여 보고 이르기를, “오랑캐를 제어하는 방법은 예로부터 별 묘책이 없으므로, 삼대(三代)의 제왕들도 그들이 오면 어루만져 주고, 가면 추격하지 않아 그저 회유책을 쓸 뿐이었다. 문헌(文獻)이 없어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으나, 한(漢) 나라 이래로 역사에 상고할 만한 것이 있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흉노(匈奴) 따위는 마치 마른 가지를 꺾듯 할 것 같지만, 백등(白登)에서 포위를 당하여 겨우 몸만을 구하여 화친을 논의하였고, 여태후(呂太后) 역시 여주(女主)로서 영특하였는데도, 묵특(冒頓) 의 글이 비록 매우 무례하였으나, 도외시하고 화친하였을 뿐이요,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사방의 오랑캐에게 일을 많이 벌여, 드디어 천하를 헛되이 소모하였다. 이러므로 옛 사람은 오랑캐를 모기에 비유하여 그저 몰아냈을 따름이었다. 옛 사람이 이렇게 한 까닭은, 나라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벌도 쏘면 독이 있듯이, 피차간에 죄 없는 백성들에게 차마 전쟁의 폐해를 입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은 이와 달라서, 임인 년에 우리 여연(閭延)에 침입하였다가, 그 뒤에 홀라온(忽剌溫)에게 쫓기어 저들의 소굴을 잃고, 가솔들을 이끌고 강가에서 살기를 빌기에, 나라에서 그들을 가엾게 여겨 허가하여 주었으니, 그 은혜가 크다 하겠는데, 이제 배은망덕하게도 변방의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극악무도한 그 죄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토벌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징계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사방 변방에 걱정거리가 없으니, 맹자가 말하기를, ‘적국(敵國)이 침노하는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기 일쑤다.’ 하였으니, 오늘의 일은 비록 야인이 한 짓이기는 하나, 실은 하늘이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제 이만주(李滿住)ㆍ동맹가(董猛哥)ㆍ윤내관(尹內官)의 글에 모두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하였으나, 지난번에 임합라(林哈剌)가 여연(閭延)에 와서 말하기를, ‘도망친 우리의 종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제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비록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하지마는, 실상은 이들의 무리가 꾀어서 한 것이리라. 옛날 경원(慶源)에서 한흥부(韓興富)가 야인에게 죽을 때에, 하륜(河崙)은 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조영무(趙英茂)는 쳐야 한다고 하였는데, 태종이 영무의 계책에 따라 토벌하였고, 기해년에 대마도(對馬島)를 칠 때에, 어떤 이는 치는 것이 옳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옳지 않다 하였으나, 태종이 대의(大義)로써 결단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니, 비록 그 소굴을 소탕하지는 못했으나, 그 적들이 결국 우리의 위엄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최치운이 오랫동안 나를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니, 경은 막중(幕中)에서 그와 더불어 고사를 논하라.” 하고, 최윤덕에게 안장과 말 및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김효성에게는 말을 하사하였다.
○ 여연의 사변이 있은 뒤로부터 상이 변방 일에 유의하여, 자주 무사(武士)를 모아서 후원(後園)에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상이 장차 야인(野人)을 칠 생각으로, 대신들의 뜻을 떠보려고 은밀히 정부에 명을 내려, 육조 참판 이상의 관원과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 등으로 하여금, 각각 야인 토벌에 대한 방략을 진술하게 하였으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지신사(知申事) 안숭검(安崇儉)에게 결정된 토벌 계획을 밀봉하여 새나가지 않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삼군을 거느릴 만한 장수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들 아뢰기를, “최윤덕이 중군을 거느리고 이순몽(李順蒙)이 좌군, 최해산(崔海山)이 우군을 거느리게 하소서.” 하니, 이순몽이 아뢰기를, “군사의 진퇴는 오로지 중군에 달려 있는데, 신이 좌군을 거느리면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최윤덕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신을 부장(副將)으로, 해산을 좌장으로, 이각(李恪)을 우장으로 삼아, 선봉의 정예(精銳) 5,6백 기를 거느리고, 먼저 적의 땅으로 들어가 형세가 칠 만하면 치고, 불가하면 물러나서 후군을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였더니, 맹사성(孟思誠)도 그대로 말하자 임금도 그 말에 따랐다. 드디어 최해산에게 명하여 먼저 가서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놓게 하였다. 사목(事目 공사에 대한 규칙)을 들어 윤덕에게 유시를 내렸는데, “그 하나는, 도절제사가 장계한 야인에 대한 공초(供招)를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되풀이하여 생각하니, 파저강(婆豬江)의 침입은 홀라온을 사칭한 것이라는 것은 정상이 드러나고 명백한 일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살면서, 지난날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간사한 마음을 품고 악독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변방 백성을 죽이고는 도리어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핑계하여 후환을 모면하려 하는 것은, 위로는 중국을 속이고, 아래로는 우리나라를 속이는 것이다. 그 죄악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의논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침입이 홀라온이 한 짓이라는 말이 황제에게 들리면, 파저강 야인을 지목하지 않고서 그들을 칠 수 있다고 하나, 내가 생각하기에 황제는 한결같이 인(仁)한 자와 함께 하는데, 어찌 야인이 속이는 말을 믿고, 허물을 우리나라에 돌리겠는가. 혹시 따지게 되면 마땅히 사실대로 아뢰고, 또 태종 황제가 내린 성지(聖旨)를 인용하여 아뢰면 마침내 허락을 받을 것이다. 군사는 3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되, 2천 5백 명은 평안도에서 내고, 5백 명은 황해도에서 내며, 기병과 보병의 수효는 상황에 따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또 하나는, 강물이 깊어서 군사가 건너기 어려울 때에, 만약 여울 위로 건널 만한 곳이 있으면 그렇게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두세 곳에 부교를 만들 것을 논의하라.
또 하나는, 강계(江界)와 여연(閭延) 등지의 강가에 무지한 백성들이 일찍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그 땅에 몰래 들어간 것을 관리들도 몰라서 금지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사를 당하여 중요한 정보가 새나가고 있으니 작은 일이 아니다. 관리에게 밀령을 내려 더욱 엄하게 검찰 하도록 하라.
또 하나는, 사람을 시켜 그 부락의 다소와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을 알아본 뒤에, 가서 칠 시기를 결정하라.
또 하나는, 부교를 만들되 민가의 장정을 징발하지 말고, 근처 각 관가의 배를 부리는 사람을 시켜 운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순몽은 말하기를, “최해산이 먼저 강가에 이르러 백성을 시켜 벌목을 하게 하면, 서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저들의 의심을 살 것이다.” 하였다. 황희(黃喜)ㆍ권진(權軫)ㆍ하경복(河敬復), 병조 판서 최사강(崔士康) 등은 말하기를, “얼음이 녹으면 반드시 저들이 모두 밭갈이에 힘쓸 것이니, 마땅히 이 해산으로 하여금 먼저 그곳에 가서 성책(城柵)을 순찰하는 중이라 둘러대고, 몰래 모든 일을 준비하여 뜻하지 아니한 때를 대비하면서 수군과 육군을 모아서 만들게 할 것이지, 굳이 다른 사람을 다시 보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 곧 최해산에게 유시하기를, “처음에는 경이 가서 부교(浮橋)를 만들도록 명을 내렸으나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무단히 벌목을 하면 인심이 동요되어 저들이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경을 성책 순심사(城柵順審使)로 삼으니, 목책(木柵)을 신설할 터를 골라서 정한다고 둘러대고, 강가를 돌아보면서 심사숙고하여 군사가 오기를 기다려 급히 부교를 만들되, 만약 다리가 튼튼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사람과 말이 함께 바지게 될 것이니 보통 일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 된 이는 큰일을 당하면 반드시 여러 사람에게 계책을 묻고 널리 여러 사람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경들은 각기 방략을 말하여 보라.”하니, 조뇌(趙賚)ㆍ김익정(金益精)ㆍ권도(權蹈) 등이 아뢰기를, “사변을 예측할 수 없어 임시의 계략도 미리 세울 수 없으니, 임기응변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은 장수에게 맡기고, 그 부장(副將) 이하는 그의 호령을 들어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하였다. 맹사성(孟思誠)ㆍ권진(權軫)ㆍ조계생(趙啓生)ㆍ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정예를 골라 재갈을 물리고 급히 달려 길을 나누어서 나란히 쳐 나아가며, 그 부락을 습격하고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는 것이 상책이요, 대군이 진을 치고 북을 치면서 전진하면, 저들이 장차 두려워하여 온 부락을 거두어 도망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이니, 어찌 감히 항거하겠습니까. 병정들의 무용(武勇)을 빛내어, 그들로 하여금 무서움을 알게 하면 감히 다시는 변방을 엿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중책입니다.” 하였다. 황희ㆍ안순(安純)ㆍ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군사가 몰래 강을 건너가 뜻하지 아니한 때에 엄습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다리를 만들어서 군사를 건너게 하면, 적이 먼저 알게 되어 복병이 갑자기 일어난다면 승패를 헤아리기 어렵고, 비가 와서 물이 차면 진퇴양난에 빠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은 이미 잘 알았다.” 하였다.
이전에 상이 박호문(朴好問)ㆍ박원무(朴原茂)를 이만주(李滿住)ㆍ심타납노(沈咤納奴)ㆍ임합라(林哈剌)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적이 쳐들어올 때의 허실(虛實) 및 종류(種類)의 다소와,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길의 멀고 가까운 것들을 정찰하게 하였는데, 이제 돌아와 복명하였다. 임금이 맞아들여 비밀히 야인의 소식을 물어보니, 박호문이 길의 구부러지고 곧음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부락의 많고 적음 등을 두루 진술하고, 또 아뢰기를, “전에 야인 부락에 가서 정세를 보았을 때는 모두 집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었으나, 지금은 달래어 생업에 안정하게 하여 저들이 생각지 못한 때에 습격하려 합니다. 또한 대군이 강을 건너려면 그때는 강물이 몹시 빨라서 부교(浮橋)를 놓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호문의 아룀을 듣고 더욱 칠 결의를 하고, 정부 육조(六曹) 및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를 불러 박호문의 말을 가지고 의논하였더니, 이순몽(李順蒙)ㆍ정연(鄭淵)ㆍ박안신(朴安信)ㆍ황보인(皇甫仁)이 아뢰기를, “홀라온에게 포로로 잡혀 간 사람을 빼앗아 사람을 시켜 들려 보내 온 것은 그 뜻이 가상할 만하니, 술과 음식을 보내어 위로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전과 같이 강을 건너 가 농사를 짓게 하되, 그 연장을 감추어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형적을 나타내지 말게 하고 사태를 관망하게 하소서.” 하니, 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이 계획이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술과 음식을 보내면 도리어 의심을 사게 하여 무익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맹사성과 조계생이 아뢰기를, “저 적들은 완악하고 교활하여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일찍이 집을 비우고 산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비록 여러모로 달랠 수는 있으나 속여서는 안 됩니다. 또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지금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군사를 일으키어 한 모퉁이를 치게 되는 날이면,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다 알게 될 것이니, 어찌 그 부족을 다 멸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하루 사이에 길을 나누어 함께 나아가 초전에 공격하여 그 죄를 성토해야 합니다.” 하였다. 황희가 아뢰기를, “소득이 잃은 것을 보상하지 못하여 수고로움만 있고 아무 공로가 없다면 도리어 적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니, 전날 말씀드린 계책대로 도절제사로 하여금 잡혀간 사람과 마소와 가재들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되, 만일 듣지 않으면 죄를 선언하고 토벌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서움을 알게 하는 동시에, 편안히 농사지을 수도 없이 멀리 도망치게 한다면, 명분도 서고 듣기에도 좋아 곧음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할 수 없다면 반드시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4월에 풀이 자랄 때를 이용할 것이며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 하였다. 황희 등이 아뢰기를, “물살이 빠른지 느린지와 배와 부교 중 어느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실로 곤란한 일이니, 장수로 하여금 배나 부교 중에서 편의에 따라 만들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옛 사람이 싸움을 할 때에는 모두 간첩을 두어 그 정세를 살피게 하였다. 나도 몰래 사람을 보내어 저 사람들의 정상을 파악한 연후에 치려고 하노라.”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옛날에 간첩을 쓴 것은 같은 중국 사람으로서 옷이나 음식에 차이가 없고, 말소리도 서로 같아서 그 속에 섞여 있어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야인은 말이나 옷, 음식 등이 전혀 다르고, 또 인구의 수가 많지 않아 그들과 섞이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만약 잡힌다면 더욱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 3월에 최윤덕(崔潤德)이 최치운(崔致雲)을 보내어 아뢰기를, “지금 내전(內傳)을 받자오니, 파저강(婆豬江)의 야인을 토벌하는 일에 군사 3천 명을 낸다고 하는데, 신(臣)이 가만히 생각건대, 적지는 험하여 지나가는 요새마다 반드시 병사를 머물게 하여 지켜야 할 것입니다. 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계교로서는, 한 길은 만포(滿浦)로부터, 또 한 길은 벽동(碧潼)으로부터 함께 올라(兀剌) 등지로 향하고, 한 길은 감동(甘同)으로부터 마천목책(馬遷木柵) 등지로 향하여 동서(東西)에서 한꺼번에 일어나게 하고, 신은 소보리(小甫里)로부터 타납노(咤納奴)ㆍ임합라(林哈剌)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군사가 만 명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맞아들여 만나보고 이르기를, “처음에 여러 신하들과 군사의 수효를 의논할 때, 어떤 이는 7,8백을 말하고 어떤 이는 1천이라고 하여 말이 많아 정하지를 못하다가, 결국 3천 명으로 정하였는데 나는 적다고 하였다. 박호문(朴好問)도 만 명 이하여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제 올린 글을 보니 과연 그렇구나.” 하였다.
정부 육조(六曹) 및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를 불러 의논하니, 혹은 5백을 더하라 하고 혹은 1천을 더하라 하며, 혹은 더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최치운이 아뢰기를, “최윤덕이 말하기를, ‘처음 올 때에는 다만 타랍노와 합라 등만을 치려 했으므로, 정예군 1천 명만 얻으면 넉넉히 일을 처리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제 다시 생각하니, 마천(馬遷)에서 올라(兀剌) 지방까지 야인이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닭소리와 개 소리가 서로 들리는 터이므로, 만약 한두 부락을 치면 반드시 서로 구원할 것이니, 성패를 헤아릴 수가 없다. 옛 사람이 대군을 동원하였다가 몇 안 되는 적에게 패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대군은 다시 일으키기가 힘 드는 것이니 한두 부락에 한 군(軍)씩 보내면, 저들이 장차 자신도 구할 겨를이 없어서 남을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 명의 군사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최치운이 아뢰기를, “윤덕이 말하기를, ‘황해도의 병사가 먼 길을 달려오면 피로하여 쓸 수 없고, 평안도의 병사는 거의 3만이나 되니, 황해도의 병사를 출동시킬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고 묻기를, “최윤덕이 언제 군사를 일으키려 하더냐.” 하니, 최치운이 아뢰기를, “윤덕이 단오(端午) 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도적들의 풍속에 그때에는 서로들 모여서 놀이를 하며, 풀도 자라 있을 것입니다. 다만 비가 와서 물이 질까 염려되어 24, 25일 동안을 기다려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윤덕이 말하기를, ‘토벌하는 날 저들의 죄명을 써서 방을 붙이고 돌아와야 한다.’고 합니다.” 하였더니, 상이 안숭선(安崇善)과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김청(金聽)에게 명하여 방문을 써 보내었다.
○ 병조(兵曹)가 아뢰기를, “스스로 모병(募兵)에 응하여 종군한 자로서 만약 공을 세운 자는 한량(閒良)이면 상으로 벼슬을 주고, 향리(鄕吏)ㆍ역자(驛子)면 부역을 면제해 주며, 관노(官奴)면 천인을 면하게 하여 그 공을 표창하소서.” 하였다.
○ 여름 4월 초 10일에, 최윤덕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마를 강계부(江界府)에 모아 군사를 나누되, 중군절제사 이순몽(李順蒙)으로 하여금 군사 2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적의 괴수 이만주(李滿住)의 성채(城寨)로 향하게 하고, 좌군절제사 최해산(崔海山)은 2천 70명을 거느리고 거여(車餘) 등지로, 우군절제사 이각(李恪)은 1천 7백 70명을 거느리고 마천(馬遷) 등지로,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은 3천 10명을 거느리고 올라(兀剌) 등지로, 김효성(金孝誠)은 1천 8백 88명을 거느리고 임합라(林哈剌)의 부모의 성채로, 홍사석(洪師錫)은 1천 1백 18명을 거느리고 팔리수(八里水) 등지로 향하게 하고, 최윤덕 자신은 군사 2천 5백 99명을 거느리고 곧 바로 임합라 등이 있는 성채로 달려갔다.
임금이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이선(李宣)을 보내어 최윤덕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용병(用兵)은 제왕이 중대하게 여기는 일이다. 그러 므로, 고려 고종(高宗) 때에는 3년의 역이 있었고, 주 나라 선왕(宣王)은 6월의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모두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됨을 염려한 것이어서 부득이한 일이었다. 이제 야인이 준동(蠢動)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고 쥐나 개처럼 도둑질을 하는 일이 빈번하였으나, 그들의 짐승 같은 풍속을 탓할 바 못 된다 하여 참고 용서해온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제 변경에 숨어 들어와 늙은이와 아이들을 죽이고 부녀자를 노략질하며 민가를 소탕하여 제멋대로 포악한 짓을 하니, 그들의 죄를 성토하는 거사(擧事)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오직 경은 충의(忠義)의 자질과 장상(將相)의 책략을 겸비하여, 명성이 평소에 드러나 중외(中外)가 다 아는 터이므로, 경에게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야인의 죄를 문책하게 하노니, 부장(副將) 이하 대소 군관ㆍ사졸들의 항오(行伍)에 있는 자를 거느리되, 명령을 받들고 안 받듦에 따라 상벌(賞罰)하라.” 하였다.
이순몽ㆍ최해산ㆍ이징석ㆍ이각ㆍ김효성 등에게도 교시하기를, “임금의 도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장수된 신하의 충성은 적개심을 갖는 것을 귀히 여긴다. 야인이 준동하여 일어나 늑대의 심술을 멋대로 부리고, 벌과 전갈의 독을 거리낌 없이 피워 우리의 변경을 침략하고 백성을 학살하니, 고아와 홀어미에게 원한을 품게 하고 부부간의 금슬을 해치게 한다. 이것이 내가 애통하고 불쌍히 여겨 마지않는 것이며, 경들도 함께 가슴을 치며 이를 가는 터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죄를 성토함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에게 모군(某軍)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노니, 합심 협력하여 주장(主將)의 방략을 잘 따르고, 적을 무찌르는 공을 이룩하여 변방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라.” 하였다.
또 3품 이하의 군관과 민군(民軍)에 교시하기를, “야인들이 준동하여 짐승[梟獍 나쁜 새와 짐승] 같은 본성을 드러내고 이리 같은 마음을 행하여, 우리의 경계에 이웃하여 항상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틈을 엿보아 침략하므로, 방비를 엄하게 하고 화친을 수고로이 행하느라고 너희 백성의 근심이 된 지 오래였는데, 지금 또 변방을 침범하여 인명을 살해하고 집들을 부수니, 나는 참으로 고아와 홀어미들을 위하여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이에 장수로 하여금 그 죄를 성토하게 하노니, 너의 모든 군사들은 내가 밤낮으로 근심하는 것을 잘 알아서, 장수의 절제(節制)하는 규율을 삼가 지키며 늙은이와 아이들 및 부녀자를 제외하고는 벨 수 있는 대로 베어라. 그 죽인 그 수효의 다소에 의하여 혹은 3등급, 혹은 2등급, 혹은 1등급을 승진시켜서 벼슬로 상을 줄 것이다. 만일, 군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공을 세워도 상이 없을 터이니, 너희들은 각기 용맹을 다하여 과감하고 굳셈을 다하도록 힘쓸지어다.” 하였다.
교서의 반포가 끝나자, 최윤덕이 여러 장수들을 모으고 명을 내리기를, “주장(主將)의 조령(條令)에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처리할 것이니 소홀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그 조령에 이르기를, “싸움에 임하여 지휘에 응하지 않는 자, 북소리를 듣고도 전진하지 않는 자, 나아가서 장수를 구해 내지 않는 자, 군사의 정보를 누설한 자, 요망스러운 말을 퍼뜨리어 군중을 의혹하게 하는 자는 대장에게 고하여 베고, 제 패를 잃고 다른 패를 따라 장표(章表)를 잃은 자,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고 항오(行伍) 중에서 세 사람을 잃은 자, 패두(牌頭)를 구해 내지 않은 자는 벨 것이요, 도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명령이 내리기 전에 재물과 보화를 거둔 자는 벨 것이다. 또 도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늙은이와 아이들과 남녀를 막론하고 치지 말 것이며, 장정일지라도 항복하면 죽이지 말라. 험한 곳에 행군하다가 갑자기 적을 만났을 때에는 멈추고 공격하면서 나팔을 불어 주장에게 알려야 하며, 물러나 도망하는 자는 벨일 것이다. 닭ㆍ개ㆍ소ㆍ말을 죽이지 말고 집들을 불사르지 말 것이다. 토벌하는 법은 정의로써 불의를 치되 그 마음을 치는 것이 만전(萬全)의 의(義)가 되는 것이다. 만일, 늙고 어린 자와 중국 사람을 죽여서 군공(軍功)을 낚으려 하여 조령(條令)을 범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군법에 의하여 시행할 것이며, 또 강을 건널 때에는 모름지기 다섯 사람씩, 열 사람씩 차례로 배에 오르되 먼저 오르려고 다투지 말 것이니, 위반하는 자는 죄를 줄 것이다.” 하였다.
명령이 끝나자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기를, 19일에 함께 적의 소굴을 두들기되 만일 비바람으로 캄캄하면 20일로 기일을 정하기로 하고는, 최윤덕이 소탄(所灘)으로부터 시번동(時番洞) 어구로 내려가 강을 지나서 강가에 군사를 멈추니, 강가에서 네 마리의 노루가 군영(軍營) 안으로 뛰어들었으므로 군인이 그것을 잡았다. 최윤덕이 말하기를, “노루는 야수(野獸)인데 이제 저절로 와서 잡히니 실로 야인(野人)이 섬멸될 징조로다.” 하였다.
어허강(魚虛江)가에 이르러 군사 6백 명을 머물게 하여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19일 어두운 새벽에 임합라의 성채를 쳐서 그대로 머물러 군영(軍營)을 차리니, 타납노의 성채가 모두 도망쳐 버렸다. 강가에 되놈 10여 명이 나와서 활쏘기 하는 것을 발견하고 최윤덕이 통사(通事) 마변(馬邊)으로 하여금 그들을 불러서 이르기를, “우리들의 행군은 오직 홀라온을 잡으려는 것이요 너희들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더니, 되놈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20일에 홍사석(洪師錫)의 군대가 와서 최윤덕과 서로 모여서 적 31명을 사로잡았다. 되놈들이 뒤쪽으로부터 싸움을 걸므로 이에 남아 있는 적 26명을 베어 버렸다. 타납노의 동쪽산 으로부터 임합라의 성채에 이르는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색하다가 해가 저물자 석문(石門)에 물러나 군영을 설치하고 지자성군사(知慈城郡事) 조복명(趙復明)과 지재녕군사(知載寧郡事) 김잉(金仍) 등에게 명하여 군사 1천 5백 명과 포로들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길을 닦게 하고, 홍사석(洪師錫)과 최숙손(崔叔孫)으로 하여금 (원문 빠짐)
○ 마변(馬邊)이 군사 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함께 각 부락을 수색하면서 타납노의 성채에 이르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최윤덕은 이순몽이 적의 수급을 바치지 않고, 또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난 것과, 최해산이 군사 기일에 미치지 못한 것과, 이징석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난 일들을 모두 탄핵하였다. 오명의(吳明義)를 보내어 전문(箋文)을 받들어 축하하고, 또 박호문(朴好問)을 보내어 아뢰기를, “선덕(宣德) 8년에 삼가 병부(兵符)와 교서(敎書)를 받들고 장차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을 치려 할 때 좌부(左符)를 보내어 왔으므로 병부를 맞추어 보고 군사를 동원하였는데, 곧 마병(馬兵)과 보병(步兵) 1만과 황해도 군병 5천을 출동시켜 4월 초10일에 강계부(江界府)에 모아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일곱 개의 길로 갈라 나란히 진군하여, 이 달 19일에 여러 장수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랑캐를 소탕하여, 남녀 모두 2백 36명을 사로잡고 1백 7명을 베었으며 소와 말 70여 마리를 얻었는데, 우리 군사의 전사자는 4명, 화살을 맞은 자가 5명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오명의와 박호문에게 각각 옷 두 벌을 주고, 선위사(宣慰使) 박신생(朴信生)을 보내어 군영에 이르러 술을 내리어 여러 장수들을 위로하고, 교지를 선포하기를, “오늘의 일은 실로 천지와 조종(祖宗)의 덕을 힘입어 여기에 이른 것이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군사가 돌아오는 날,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니, 사로잡은 사람은 늙은이와 아이들은 제외하고 장정은 모조리 베어 죽이고, 배가 지나다니는 강 등은 더욱 조심하여 지키라.” 하였다. 이순몽ㆍ이징석ㆍ최해산은 탄핵을 당하였으므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황희(黃喜)ㆍ맹사성(孟思誠)ㆍ권진(權軫)ㆍ허조(許稠)ㆍ하경복(河敬復)ㆍ안순(安純)ㆍ예조 판서 신상(申商)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어림(御臨)한 이후로 매양 문물(文物)을 지키는 데 뜻을 두고 병혁(兵革)의 일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뜻이 미치지를 못했었는데, 이제 어찌 공을 이루었음을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적이 말썽을 부려 할 수 없이 거사(擧事)한 것인데, 다행히 크게 이기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이 공을 길이 보전하고 후환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자랑하고 뽐내는 마음은 옛사람도 경계한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크게 이긴 것을 기뻐하기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들은 깊이 축하 하옵는 동시에 성책(城柵)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비축하여 불의에 대비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이제 정벌한 뒤에 만약 또 적이 침입하여 오면 변방의 장수를 시켜 성벽을 튼튼히 하고, 적의 이용물을 없애어 들을 말끔히 하고 기다리다가, 그 형세를 살펴 적당한 시기에 쫓아가 잡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토벌에 나가서 죽은 군사와 말의 수효가 천을 헤아리니, 곳간의 쌀로 말을 사서 갚아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더니, 모두 그것은 안 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변방의 장졸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말로 알목하(斡木河)와 여러 야인(野人)들을 타이르기를, ‘파저강의 야인이 오랫동안 나라의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아무 명분도 없이 군중을 선동하여 은덕을 배반하고 살생(殺生)과 약탈을 하였으므로 부득이 장수에게 명하여 그 죄를 치게 한 것이다. 어찌 공(功)을 좋아해서 그렇게 했겠는가. 만약, 너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귀순하면 나라에서는 반드시 처음과 같이 대접할 것이다.’ 하고 말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최해산이 원수(元帥)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고 지체하였으며, 천 명이 넘는 군사를 가지고도 적을 잡은 것이 가장 적으니, 마땅히 군기(軍機)를 어긴 죄에 해당되지만, 특사한 뒤이니 이제 다시 논하지 말 것이며, 또한 논공(論功)도 하지 말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만약 특사를 받지 않았다면 죄를 멸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어찌 상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관하에 공이 있는 군사에게만 상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최해산은 군기(軍機)를 놓친 것이 특사를 받기 전에 범한 일이어서 죄줄 수가 없으니, 청컨대 그의 고신(告身 관직의 임명 사령장)을 거두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그 벼슬만 파면시켰다. 임금이 황희ㆍ권진 등과 의논하기를, “전날 기해년에 동쪽으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고 도통사(都統使) 유정현(柳廷顯)이 돌아올 때에는 대언(代言 승지)을 시켜 가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돌아올 적에는 내가 상왕을 따라 낙천정(樂天亭)으로 나가 맞이하여 위로했으니, 이종무가 친히 대마도를 치고 돌아올 때는 유정현에게 했던 예와는 다르다. 지금의 파저강의 역을 대마도 정벌과 비교하면 그 공이 배나 되니, 최윤덕과 이순몽 등이 개선하는 날은 어떻게 처우하는 것이 좋겠는가. 내 생각에는 최윤덕이 돌아올 때에는 모화관(慕華舘)으로 나가 맞이하고, 이순몽이하의 경우에는 대군(大君)이나 대신(大臣)을 시켜 맞이하게 하고자 한다. 만약 그것이 너무 정중하다고 한다면 최윤덕은 대군이나 지신사(知申事 도승지)로 하여금 가서 맞이하게 하고, 이순몽 이하는 대군이나 대언(代言)이 나가서 맞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옛날 이성(李晟)이 주비(朱沘)를 치고 서울을 수복하였을 때, 덕종(德宗)이 이성에게 사도(司徒)의 벼슬을 배수하고 영락리(永樂里) 저택을 주어 특별히 잔치를 베풀었는데, 태상(太常 예악을 맡아 보는 관청)으로 하여금 예악(禮樂)을 갖추어 서울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풍악을 울리어 영화를 베풀었고,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에는 장수를 보내어 진주(鎭州)를 평정하고 돌아오자 친히 성 밖까지 나가 맞이하여 위로하고, 그의 집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옛날의 제왕이 장수를 대접하기를 이렇게 영화롭게 하였는데 지금은 어떤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상왕이 이종무를 낙천정(樂天亭)에서 맞이하여 위로한 것은 그때 우연히 낙천정에 납시었는데 때마침 종무가 왔을 뿐이요, 일부러 윤정현과 달리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저 당 나라와 주 나라의 임금들이 장수를 사랑하고 우대한 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마음을 잡기에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나, 오늘의 일은 수복(收復)한 것과 같은 공은 아니며, 다만 조그마한 추악한 무리를 쳤을 뿐입니다. 때가 다르고 사건도 다르니 어찌 나가서 마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최윤덕은 지신사(知申事)로 하여금 맞이하여 위로하게 하고, 이순몽이하는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을 시켜 맞아 위로하게 하여도 넉넉히 한때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예조에서 싸움에 이겼음을 종묘에 고하고 중외(中外)에 널리 선포하고 곧 치하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장수의 공을 표창하려고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허조(許稠)는 최윤덕에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를 주어 표창하자고 하고, 맹사성(孟思誠)은 자기의 벼슬을 주자고 하여 두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였다. 벼슬을 내리는 날,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에게 특명을 내려 안숭선(安崇善)을 대신하여 문선(文選 문관과 종친의 인사를 담당하는 사무)을 관장하게 했더니, 모두들 임금의 생각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김종서를 불러들여 이르기를, “경은 지난해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때에 경과 더불어 말하기를, ‘최윤덕은 수상(首相)이 될 만하나 그 직임이 지극히 무거우므로 전공(戰功)으로 인해 상을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지금 최윤덕이 비록 전공이 있으나 만약 재덕(才德)이 없으면 단연코 줄 수가 없다. 나는 일의 선후와 취사의 가림이 이러하니, 경은 이 뜻을 대신들에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여 잘 의논해 가지고 아뢰라.” 하였더니, 맹사성 등이 아뢰기를, “윤덕은 청렴 정직하고 부지런하여 삼가 임금의 뜻을 받드니, 수상이 되어도 부끄러움이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생각이 이러하고 대신들의 뜻이 또한 그러하니, 권진(權軫)의 벼슬을 대신하여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삼고, 이순몽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이각(李恪)과 이징석(李澄石)을 중추원사(中樞院事)로, 김효성(金孝誠)과 홍사석(洪師錫)을 중추부사(中樞副使)로 삼으라.”고 하였다. 최윤덕에게는 노비 10명, 이순몽에게는 8명, 이각과 이징석에게는 6명씩, 홍사석에게는 5명, 김효성에게는 4명을 주었다. 이숙치(李叔畤)는 군사를 조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잘하였다 하여 벼슬을 올려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삼고 그대로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로 있으라고 하였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납시어 최윤덕 등과 장수 및 관리들을 위로할 때,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옷과 신을 나누어 주어 그것을 입고 잔치에 나오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잔을 잡아 최윤덕 등에게 내리고, 또 세자에게 명하여 술을 돌리고는 이어 최윤덕에게 명하여 술잔을 받을 때에 일어나서 받지 말게 하고, 군관으로 하여금 서로 마주 서서 춤을 추게 하였다. 최윤덕도 술이 취하자 역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토벌에 나가 전사한 군사에게는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게 하고 교서를 내리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장하게도 충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은공에 보답하기 위하여 구휼의 은전(恩典)을 내리노라. 전번 야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가서 치게 하였더니, 너희는 모두가 용맹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 항오(行伍)의 대열에서 뛰쳐나와, 창칼을 휘두르며 다투어 용감히 나아가서, 적진을 함락시키고 예봉을 꺾어 죽음을 돌보지 않았다. 이에 특별히 죽음을 무릅쓴 의리를 가상히 여기고 은전을 베푸노라. 혹 영묘한 넋이 앎이 있으면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릴 것이다.” 하였다. 쌀과 콩을 내리고 5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고, 앓다가 죽은 자에게는 쌀과 콩을 주고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고, 말을 잃은 자에게는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병조가 아뢰기를, “사로잡은 야인의 남녀 1백 74명을 제주현(濟州縣)에 편안히 살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린것과 여자들은 모두 도적질한 자가 아니니 마땅히 구해 주되, 야인은 습성이 본래 더위를 두려워하므로 모름지기 기온(氣溫)을 알맞게 해주어 병이 나지 않게 하여주고, 또 남녀가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지 않도록 그곳 수령(守令)은 심중히 살피도록 하라.” 하고, 경기와 충청도 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갈라놓아 둔 야인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써 보호하도록 하고, 포악한 무리가 여자들을 겁탈하지 못하게 하여 마음 놓고 살게 하고, 혹시 떠도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처벌하라.” 하였다. 또 처음 갈라놓을 때에 예조에 명령하여 모자(母子) 형제가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했으나, 예조의 조치가 충분치 못하여 완전히 모여 살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므로 다시 그들의 소원을 들어 한 곳에 완전히 모여 살게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공격하여 싸운 뒤에는 수비를 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여연(閭延)의 방비가 얼음이 녹은 뒤 튼튼하다고는 하나, 야인이 보복할 생각을 품고 있어 어떻게 나올지 헤아릴 수가 없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의정을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를 삼아 성을 쌓고 목책(木柵)을 세워 변경을 튼튼히 함이 어떠할까.” 하니, 노한(盧閈)ㆍ안순(安純)ㆍ허조(許稠)가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평안도 인심에 폐를 끼침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별다른 조치가 없을 것이니, 가을에 가서 보내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갑산(甲山)은 야인의 땅과 경계가 이어 있는데, 다만 색군(色軍)에 소속되어 있고 주둔군을 두지 않았으니, 이제 주둔군을 두어 방비를 엄히 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모두들 병사(兵使)로 하여금 규약을 만들어 정하게 하자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해산(惠山)의 민가는 두 강어귀 외에는 불과 7, 8호 밖에는 살고 있지 않는데, 이곳이 맨 먼저 적의 해를 받을 곳이니, 그곳 백성을 깊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떨까.” 하니, 황희가 말하기를, “도순무사(都巡撫使) 심도원(沈道源)으로 하여금 방문하게 하여 옮기는 여부를 알아보고, 또 전입시켜 보호할 곳을 살피게 한 다음에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임금이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요즘 세월이 태평하여 군사훈련을 소홀히 하고 있으므로 각 도(道)에 소속시켜 훈련하게 하고자 하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정벌한 뒤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한창 의구심(疑懼心)을 품고 있는데, 만약 양쪽 경계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을 하면 반드시 더욱 더 의심을 할 것이요, 남쪽에는 왜가 아주 가까이 있는데, 왜인이 그것을 들으면 또한 의심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황희(黃喜)ㆍ권진(權軫)ㆍ최윤덕(崔潤德)ㆍ허조(許稠)ㆍ하경복(河敬復)ㆍ노한(盧閈)ㆍ이징석(李澄石)ㆍ홍사석(洪師錫)이 아뢰기를, “병졸을 훈련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오나 요사이 양계(兩界)에 시끄러운 일이 많을뿐더러 축성(築城)의 역사도 있고 하오니 잠깐 후년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맹사성(孟思誠)ㆍ안순(安純)ㆍ이순몽(李順蒙)은 아뢰기를, “양계에서는 당번 군사를 제외하고 훈련하되 다만 진법(陣法)에 관한 책을 읽게 하고, 다른 도에서는 집합 장소를 정해 놓고 군사를 모아 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법을 마련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가을 7월에, 임금이 경회루(慶會樓)에 납시어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 최윤덕 및 여러 군관 등을 전송하고, 또 지신사(知申事 도승지) 안숭선(安崇善)을 시켜 홍제원(弘濟院)에서 전송케 하였다.
○ 임금이 황희ㆍ맹사성ㆍ권진과 의논하기를, “중국 도독(都督) 한 사람이 우리나라가 파저강의 야인을 친 소식을 듣고, ‘조선이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였다.’ 하나 나는 생각하기를 태종 황제의 성지(聖旨)가 뚜렷이 믿을 만하고, 더구나 또 황제의 칙유(勅諭)에, ‘기미를 관찰하고 잘 다루어 야인의 업신여김을 사지 말라.’ 한 것으로 보아, 황제는 반드시 우리가 가서 정벌한 것을 죄로 삼지 않음을 알겠다. 또 맹날가래(孟捏哥來)와 최진(崔眞) 등이 오는 윤8월에 건주(建州)와 본국을 향해 떠나서, 두 곳의 포로 된 사람과 물건을 찾아서 각각 제 고장으로 돌려보낸다고 하였다. 내가 처음에 정벌한 것은 위령(威靈)을 보이고자 함이었으니, 저들이 만약 와서 항복하면 포로를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그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여러 번 여연(閭延) 등지를 침범하였으므로 두 도(道)에 갈라 두었던 것이다. 만약 황제의 칙서가 온 뒤에 돌려보내면, 야인은 다만 황제의 덕으로만 생각하고 우리나라의 은덕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강계(江界)에 머물러 두었던 야인 2명을 본고장으로 돌려보내면서 유시하기를, ‘너희들이 진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포로를 보낼 것이나, 전의 잘못을 그치지 않고 변경을 엿보므로 지금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옷과 음식이 때를 잃는 일이 없고, 강포한 무리들이 침해하지 못하게 하여 마음 놓고 살고 있다.’고 하여 만일 저들이 이 말을 듣고 진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마땅히 다 돌려보낼 것이니, 전날의 위세와 오늘의 은혜를 알게 하면, 은혜와 위엄이 함께 행해져 서로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8월에 최윤덕이 아뢰기를, “올적합(兀狄哈)과 열가(列家) 등 세 사람이 강계(江界)에 이르러 말하기를, ‘전에 보낸 포로 조사라(趙沙剌)가 죽지 않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만약 진심으로 나와서 항복하면 잡아온 사람과 물건을 모두 돌려보내게 할 것 이다고 하기에 이만주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만나보고 이르기를, “만약 다시 나오면 다시 말하겠다.” 하면서, “너희가 만약 성심으로 귀순하면 처음과 같이 대우하고 잡혀온 사람을 다 보내어 주겠다.” 하였다.
○ 야인이 이만주(李滿住)의 편지를 가지고 강계(江界)에 와서 고하기를, “최진과 맹날가래 두 중국 사신이 홀라온에 가서 조선 사람과 물건들을 조사하고 만포로부터 나온다.” 하였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선덕(宣德) 7년에, 올적합 1백 40명이 조선 국경에 이르러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내가 힘껏 싸워 64명을 빼앗아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조선에서 이미 사람을 보내어 식량을 주고, 또 군사를 일으켜 와서 토벌하니, 잡힌 사람들이 말을 갖추어 주달(奏達)하여 이미 중국 황제의 성지(聖旨)가 내렸으니, 잡아간 처자와 마소와 재물을 모두 돌려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의 정부 육조(六曹)를 불러 그 답사를 의논하는데, 모두 아뢰기를, “너희 무리가 홀라온을 끌어들여 변방 백성을 노략질하였으므로 나라에서 가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너희 무리가 항거하고 복종하지 않아 스스로 패망을 가져오게 했으니, 이것은 오로지 너희들이 순종하지 않은 잘못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홀라온을 핑계대고 스스로 벗어나려 하느냐. 너희들의 처자 4명이 이미 돌아갔으니, 만약 성심으로 귀순하면 어찌 칙서(勅書)를 기다려 돌려보내겠느냐.” 하였더니, 임금이 거기에 따랐다.
○ 최윤덕이 박호문을 보내어 아뢰기를, “야인이 강계에 와서 하는 말이 전날 포로를 돌려보내 준 데 대하여 이만주가 몹시 기뻐하면서 우리의 가속이 만약 살아 있으면 강가에서 서로 만나보면 좋겠다고 하는데, 지금 강 연안의 방비에 있어 군마(軍馬)가 극도로 지쳐 있고, 또 흠차사(欽差使)가 중국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오니, 포로 중의 한두 사람은 혹은 들여보내고 혹은 강가에 보내어 서로 만나보게 하여, 저들이 귀순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박호문으로 하여금 돌아가 윤덕에게 이르라고 하면서, “지금 야인이 처자를 돌려보내 달라 하고, 또 사신이 나온다 하니, 연변 방비에 있어 남도(南道) 병사에 한하여 얼음이 얼면 풀어 보내고, 얼음이 언 뒤에 자산(慈山) 이남의 병사로 교대하되, 그런 일은 먼 데서 헤아리기는 곤란하니 기회를 보아가며 조치하라.” 하였다.
○ 윤8월에, 파저강의 야인 왕반거(王半車) 등 4명이 이만주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빼앗긴 가산(家產)을 돌려보내 주기를 빌고, 서울로 올라와 임금을 뵙고자 하니, 맹사성과 권진은 그 소원을 들어주기를 청하였고 황희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맹사성의 의논을 따랐다. 9월에 왕반거(王半車) 등이 화친을 허락하는 교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가기를 청하자 임금이 정부 육조에 의논했더니,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가 아뢰기를, “이런 교지를 내린 것은 전례가 없습니다. 예조(禮曹)나 병조, 의정부(議政府)에서 교지를 받아 이첩(移牒)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황희 등은 아뢰기를, “지금 온 한두 사람의 말이 추장(酋長)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관원이 교지를 받아서 써 보내는 글이라 할지라고 너무 간단한 것 같고, 또 사사로이 문서를 통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성심으로 귀순한다면 예전과 같이 대접한다는 뜻을 말로 하여 주면 그만입니다.” 하고, 김익정(金益精) 등은 아뢰기를, “지금 온 사람의 말이 비록 믿을 수 없다 하여도 이미 이만주의 공문을 받았으며, 와서 화친할 뜻을 말했으니, 예조에서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이첩하되, 화목하지 못한 이유와 아울러 화해(和解)의 뜻을 소상히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더니, 임금이 다시 의논하여 일치한 의견을 가지고 아뢰라고 하였다. 황희 등이 아뢰기를, “문서를 보내는 것은 단연코 불가합니다. 그러나 자제(子弟)를 볼모로 보내어 와서 빌고 또 임금께 뵙고자 하는 것은 도의(道義)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맹사성등이 아뢰기를, “지금 온 사람이 진정으로 통서(通書)를 요구하니, 기록을 갖추어 문서를 청하는 뜻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너희들이 스스로 틈이 벌어지게 할 만한 일을 꾸몄으므로 부득이 가서 친 것이니, 만일 마음을 고쳐 성심으로 복종하면 반드시 전날과 같이 대접할 것이다.’ 하고 예조에서 교지를 받들어 이첩하면 대의(大義)를 상함이 없을 것이요, 이제부터 우리나라에 오는 자와 자제(子弟)로서 입시(入侍)하는 자를 함께 모두 허락하면 시의(時宜)에도 적합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맹사성 등의 의논에 따랐다.
○ 최윤덕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사자 최치운(崔致雲)이 와서 아뢰기를, 친히 군졸을 거느리고 변방의 고을을 순행(巡行)하여 무용(武勇)을 빛내고 위엄을 보이려 한다고 하나 나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매년 순행하는데 올해는 이렇게 하고 이듬해는 그렇지 않게 하면, 저들이 장차 이르기를, “대장의 순행이 없으니, 예측하지 않은 사변이 장차 여기서 생길 것이다.” 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이미 저들에게 말하기를, ‘성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처음과 같이 대접한다.’ 하고서, 이제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순찰하면 저들에게는 반드시 의심이 생길 터이니, 이것이 어찌 이전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군사에 있어서는 비밀을 중히 여기는 것이니, 적으로 하여금 속셈을 모르게 해야 한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올적합(兀狄哈)이 알목하(斡木河)를 공격하여, 관독(管禿)의 부자(父子)와 관하의 사람을 죽였는데, 오직 범찰(凡察)과 대이(大伊) 등만이 난을 면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애걸하기를, “형세가 여기에서는 살기 어려우니, 경원(慶源) 부근 시반(時反) 등지로 이사하도록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여러 신하를 불러 의논하기를, “역대 제왕 중에도 오랑캐를 변경 안에 두어 번병(藩屛)으로 삼은 적이 간혹 있었고, 태종도 일찍이 알목하(斡木河)는 우리나라의 울타리라 하였으니, 범찰의 청에 어떻게 응할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그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하고 가벼이 허락할 수도 없거니와, 또 오랑캐를 친근히 하여 스스로 화를 끼치는 것은 옛사람이 깊이 경계한 바이오니, 단연코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11월에,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성달생(成達生)이 급히 아뢰기를, “알목하의 야인은 그 괴수가 이미 죽었으므로 그 도당이 의지할 곳이 없어 혹시 소란을 피우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이미 영북(寧北)과 경원(慶源)으로 하여금 군마를 정비하고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병조 좌랑(兵曹佐郞) 우효강(禹孝剛)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요즘 맹가첩목아의 부하가 통사(通事) 박천기(朴天奇)를 따르는 사람을 쏘아 죽여 그 사정이 비록 중요하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여 나라에서 이미 용서하였으니, 다시 그 죄를 논할 것이 없다. 이제 남의 위급한 때를 타서 군사를 일으켜 이긴다 하더라도, 무용(武勇)이 될 수 없겠으며, 남의 재앙을 이용하여 군사로 쳐서 빼앗는 것은 사람으로서 잔인한 일 같으니, 저들이 만일 침범하면 부득이 응변하여 추격해서 잡을 것이지만, 저들이 혹 옮겨 오기도 하고, 혹 그대로 살기도 하여 침노할 마음이 없다면, 먼저 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를 불러 의논하기를, “수성(守成)하는 임금 은 대체로 사냥이나 풍악, 여색을 좋아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자랑을 좋아하고 공(功)을 즐기는 법인데, 예로부터 선대의 왕업을 계승하는 임금은 마땅히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제 조종(祖宗)의 업을 이어가면서 항상 이것을 두려워하노라. 지난번 파저강(婆豬江) 토벌 때에는 대신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안 된다 하였고, 또 그것은 바른 의논이었으나 나는 그 여러 의논을 듣지 않고 쳐서 다행히 공을 이루었다. 이제 맹가첩목아의 부자가 모두 죽자 범찰이 그 도당을 거느리고 경내에 살기를 청하였으나, 대신들이 모두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은 당연하다. 그러나 알목하는 본래 우리나라 경내인데, 범찰이 만일 다른 곳으로 옮겨가 산다면 또 다른 강적이 와서 살 것이니, 그렇게 되면 땅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또 하나의 강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 그 빈틈을 타서 영북진(寧北鎭)을 알목하로, 경원(慶源)을 소다로(蘇多老)로 옮겨,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니 어떠할까. 또 조종(祖宗)이 경원을 공주(孔州)에 두었고, 태종은 경원을 소다로에 두었었는데, 그 뒤 한흥부(韓興富)가 전사하고 곽승우(郭承佑)가 패하였으나, 태종은 그래도 차마버릴 수가 없어 목책(木柵)을 부거참(富居站)에 설치하고 군사를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이는 조종이 알목하를 경계로 삼으려는 생각이었으므로, 일찍이 잊지 않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이다. 내가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공(功)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맹가첩목아의 부자가 한꺼번에 죽은 것은 하늘이 이들을 버리신 것이니 때를 잃어서는 아니 된다. 더구나, 두만강(豆滿江)은 우리 강토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이 만든 험한 곳으로서, 옛사람이 이른바 큰 강을 해자로 삼는다는 뜻에 꼭 들어맞으므로, 내 이미 계획을 정하였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심도원(沈道源)과 하경복(河敬復)이 아뢰기를, “때를 잃어서는 안 되오니 청하건대, 조관(朝官)을 보내어 성달생(成澾生)과 더불어 형세를 살펴본 뒤에 다시 의논하소서.” 하였고, 황희와 권진이 아뢰기를, “강한 도적이 와서 살게 되면 다시 새로운 한 적이 생긴다는 말씀은, 전하의 생각하심이 지극히 원대 하시오며, 신들도 빈틈을 타서 진(鎭)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진을 설치한다면 한 진 안에 이민(移民)이 1천 호는 되어야 할 것이오니, 일이 어렵고 큽니다. 가벼이 의논하지 말고 우효강(禹孝剛)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형세를 자세히 물어 본 다음에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맹사성이 아뢰기를, 《시경(詩經)》소민편(召旻篇)에 이르기를, ‘옛날 소공(召公) 이 국토를 하루에 백 리는 넓힌다.’ 하였으니, 이는 당시의 현실을 슬퍼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격분한 말이었습니다. 우리 선원(璿源 이씨 왕실의 조상)이 대대로 공주(孔州)에 살고 있었는데, 이제 거친 풀밭이 되어 야인이 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차마 볼 수 있겠습니까. 이야말로 나라를 넓힐 좋은 기회입니다.” 하였다.
○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로 삼고 교시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왕업을 처음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겨 근본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역사상의 기록을 상고하면 역력히 알 수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에 있는 두만강은 하늘이 만들고 땅이 마련한 요해(要害)로서, 나라의 울타리를 웅장하게 하고 국경을 한정한 곳이다. 그러므로 태조께서 처음에 경원부를 공주에 두었던 것을, 태종께서 소다로로 옮긴 것은 모두 처음 왕업을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경인년에 좀도둑이 침입한 것을 지키던 신하가 막지 못하고, 부거참(富居站)으로 물러나와 있었는데, 태종께서는 일찍이 명하시기를, ‘만일 오랑캐들이 와서 살면 곧 쫓아내어 적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제 소다로와 공주가 모두 풀밭이 되어 오랑캐의 말이 멋대로 짓밟고 사냥하는 터가 되었으니, 내 이를 생각할 때마다 몹시 마음 아파하였노라. 또 알목하는 바로 두만강 남쪽이어서 우리 경계 안에 있으며, 땅이 기름져 농사와 목축에 알맞고 요충 지대에 있으니, 큰 진(鎭)을 두어 북쪽을 막는 문의 역할에 합당하다. 태종께서는 사방의 오랑캐를 지키려는 생각에서 우선 맹가첩목아의 귀화를 허락하였던 것인데, 이제 그들이 자멸하여 울타리가 텅 비게 되었다. 일의 기회가 왔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내가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 경원부를 소다로로 옮기고, 영북진(寧北鎭)을 알목하에 옮겨 백성을 모아 지키게 하려고 한다. 이는 삼가 조종(祖宗) 때부터 내려오는 천험(天險)의 국경을 지키며, 조금이라도 변방 백성의 번갈아 수자리 사는 수고를 덜게 함이요, 과대(誇大)함을 좋아하고 공(功)을 즐겨 국경을 개척하는 따위에 비할 일이 아니니, 너희 병조(兵曹)에서는 이 뜻을 본받아 조건에 맞도록 계속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더니,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두 진(鎭)을 설치하여 그 고장의 관원을 두고 본도(本道) 백성 1천 1백 호를 영북(寧北)에, 또 1천 1백 호를 경원(慶源)에 옮기어,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납세(納稅)를 덜 내게 하여, 그들의 생계를 후하게 하고 그들이 번성하기를 기다려서, 해당 도에서 멀리 수자리 사는 괴로움을 덜어 줄 것이요, 만일 본도에서 옮겨갈 만한 백성이 2천 2백 호에 차지 못하면, 충청ㆍ강원ㆍ경상ㆍ전라도 등지에서 모집에 스스로 응하는 자로서, 양민에게는 그 고장의 관직을 주어 포상하고, 향리(鄕吏)와 역리(驛吏)에게는 길이 그 천역(賤役)을 면제해 주며, 천인(賤人)은 아주 놓아 주어 양민이 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에 이살만(李撒滿)ㆍ답실리(答失里) 등이 사람을 보내어 굶주림을 호소하고 식량을 청하자, 임금이 이살만과 답실리 및 이만주에게 각각 쌀 20섬을 내려 주었다.
○ 16년에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아뢰기를, “알타리(斡朶里)가 예조에 고하기를, ‘이제 알목하에 진(鎭)을 만드니, 그대로 우리들로 하여금 살게 하렵니까.’ 하였사오니, 이는 대체로 저들을 쫒아낼까 두려워함에서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면 무엇 때문에 쫓아내랴. 또 만일 옮겨가고자 한다면 왜 그들을 잡아 두겠는가.” 하였다. 석막(石幕)의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 지금의 행영(行營)이다. 로 옮기고 종성군(鍾城郡)이라 불렀다. 얼마 아니 되어 알목하가 서북으로 적을 막는 요층 지대가 되고, 또 알타리가 남긴 종족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하여 특별히 성과 보루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 고장이 다른 진에서 거리가 멀어 성원(聲援)할 길이 너무 떨어져 있으므로, 따로 알목하에 진을 두고 회령부(會寧府)라고 불렀다.
처음에 고려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쫓아내고 보루를 설치하고 험처를 만들어 진 안의 방어소로 삼았는데, 공주(孔州)라고도 하고 광주(匡州)라고도 불렀었다. 이조 태종 7년 무인년에 옛터라 하여 돌 성을 쌓고, 그곳에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으며, 또 왕업을 시작한 땅이므로 이름을 경원(慶源)으로 고쳤다. 태종 9년 기축 년에 소다로(蘇多老)의 옛 행영(行營)에 옮기어 다스리다가, 10년 경인년에 여진이 침입하여 드디어 두 능을 함주(咸州)로 옮기고, 백성들의 집은 경성군(鏡城郡)에 옮겨 합쳤으므로 그 땅은 드디어 비게 되었다. 17년에 부거참(富居站)에 다시 읍(邑)을 두게 되자, 이때에 이르러 진을 알목하에 설치하고, 모두 본부를 회질가(會叱家)로 옮기고 경원부(慶源府)라 일컬었다. 12월에 최윤덕(崔潤德)에게 편지를 내리어 이르기를, “비바람을 무릅쓰고 다니는 괴로움을 겪으면서, 경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함에 대하여, 그 노고를 중외(中外)에 알려 위로하노라. 조정의 중신(重臣)으로서 변방에 출정하여, 적을 누르고 변방을 평정하여 나의 근심을 풀어주니, 깊이 가상히 여기노라. 몹시 추운 때를 당하여 기거(起居)를 삼가도록 하라. 이제 내관 엄자치(嚴自治)를 보내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고, 옷 한 벌을 내리노니, 이르거든 잘 받아라.” 하였다.
○ 17년 봄 정월에 올량합(兀良哈)의 5천 7백 기(騎)가 와서 여연(閭延)을 포위하였다. 군수(郡守) 김윤수(金允壽)ㆍ도진무(都鎭撫) 이진(李震)ㆍ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성렬(金成烈)ㆍ도안무사 군관 김수연(金壽延)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용감히 막았으므로, 적의 인마(人馬)가 화살을 많이 맞고 물러갔다. 이튿날 수연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강으로 쫓아갔으나, 적은 숨어 나타나지 않고 다만 1백여 기가 싸우다가 못 이기는 척하고 달아나므로, 수연은 복병이 있음을 알고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
여름 5월에 파저강에서 온 사람의 말이, “이만주와 홀라온이 여연에 침입하여, 2명을 죽이고 7명을 사로잡고 마소를 약탈해 가지고 돌아갔다.” 하였다. 병조 판서 최사강(崔士康)이 아뢰기를, “지경 안의 사람과 가축이 도적에게 약탈당하였는데, 군수 김윤수(金允壽)가 어찌 몰랐으리오 마는 아뢰지 아니하였사오니, 그 죄가 진실로 가볍지 않습니다. 도질제사 이각(李恪)이 또한 주장(主將)으로서 곧 방문하여 조사해서 아뢰지 않았사오니, 변방 일에 대하여 유의하지 않음이 심합니다. 해당 관아로 하여금 죄를 주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황희(黃喜)와 노한(盧閈) 등을 불러 의론하니, 모두 아뢰기를, “일이 특사가 내리기 전에 해당됩니다만, 김윤수는 삼품(三品)의 고신(告身)을 빼앗아야 합니다.” 하니, 최사강이 말하기를, “김윤수가 변경을 침범당한 것은 큰일이오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직첩(職牒)을 거두어들이고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김윤수만한 무사가 어찌 없으랴마는,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자주 갈면 일에 빈틈이 많을 것이요, 또 한때의 죄를 가지고 법을 폐하면서까지 믿음을 잃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최사강이 아뢰기를 “특사가 내리기 전의 일이어서 형벌을 가할 수 없다면, 관직을 빼앗고 내쫒은 전례는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품(四品) 고신(告身)을 빼앗고 그대로 직임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7월에 야인 20여 기가 강을 건너와 여연 소동두(小董頭) 지방을 침략하자, 진무(鎭撫) 장사우(張思祐)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고, 군수 김윤수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막아 적 7명을 죽이고, 그들이 뺏어간 사람과 가축, 재산 등을 모두 도로 뺏어 왔다. 전에 평안도에 칙명을 내리어, 여름철 방어가 소홀하고 농민이 들에 있을 때 적이 몰래 올까 염려된다 하여, 요로와 각 마을에 장정을 뽑아서 대(隊)를 지어, 낮에는 나누어 진을 치고 깃발과 북으로 서로 알리고, 밤에는 산림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뜻밖에 일어나는 일에 대비하게 하고, 산양회 구자(山羊會口子) 등지에는 군사를 두어 살피게 하였는데, 여연이 포위되자 또 조령(條令)을 내려 전후(前後)의 할 바를 자세히 갖추었다.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 박안신(朴安臣), 도절제사 이각(李恪)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변에 응하는 방략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미 자세히 계획해 놓았는데, 경들은 명을 어기고 거행하지 아니하여, 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려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변방 장수는 전의 조령(條令)을 빠짐없이 알고 농민 장정을 골라, 밤에는 산에 오르고 낮에는 해가 뜬 후부터 망을 보면서 농사에 종사하게 하라.” 하였다. 야인 20여 명이 여연(閭延) 조명우 구자(趙明于口子)에 침입하여 아군 전사자 3명을 내고, 적은 화살을 맞은 자가 많았는데, 김윤수(金允壽)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유시하기를, “경이 전날 서울에 와서 친히 아뢰기를, ‘이징옥(李澄玉)이 본부(本府) 부근에 살면서, 알타리와 범찰등의 동족(同族)을 거느리고 번(番)을 갈라 지키게 하여, 조금이라도 모인다는 소식이 있으면 그들을 거느리고 변에 응한다.’ 하였는데, 이제 내가 생각하니, 그들이 얼굴은 사람이나 짐승의 마음을 지닌 무리라, 두 마음을 품고 있어 믿기 어렵다. 얽매어 두고 잘 다독거려서 오면 후히 대접하고 가면 좇지 않을 뿐이니, 심복으로 하여 친하고 믿고 일을 같이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니마거마(尼亇車馬)와 원수이므로 만약 도당을 지어 원수를 갚는다 핑계하고 쳐들어왔을 때, 혹시 잡아서 주거나 혹은 방관하고 구하지 않는다면, 전날의 믿고 친하던 뜻을 저버릴 것이요, 만약 군사를 일으켜 구원한다면 또 다른 적을 만들게 될 것이니, 이제부터는 그저 얽매어 두고 어루만져 도와주며 성심으로 대접하되, 그들과 더불어 군사를 가까이하며 일을 같이하지는 말아서, 뒷걱정을 없이 하는 것이 실로 좋은 계책이 될 것이다. 다만 이미 군사의 일을 같이하던 것을 하루아침에 이유 없이 갑자기 끊어 버리고, 저들과 우리와의 분별을 엄하게 하면, 반드시 의심을 가질까 염려스러우니, 이런 뜻을 드러내지 말고 은근히 타이르기를, ‘나라에서 너희 무리를 동정하고 있는데, 저절로 나고 자라서 본래 딸린 데가 없어, 복역(服役)으로 뛰어다니는 괴로움을 모르던 너희에게, 이제 나라가 차마 복역의 일을 시킬 수가 없어 편안히 생업에만 종사하게 하니, 너희들은 마땅히 나라가 너희들을 대접하는 지극한 뜻을 알아, 안심하고 생업을 즐기고 길이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라.’ 하라. 그러나 변방의 일이라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우니, 반드시 변장(邊將)이 이해(利害)를 목격하기를 기다린 뒤에 빠짐이 없는 계책을 세운다면 반드시 일을 이룰 것이니, 이징옥과 잘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또 유시하기를, “장수가 되는 도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게를 지님을 귀하게 여기니, 역사의 기록을 상고하면 뚜렷이 알 수 있다. 우선 조(趙) 나라의 장수 이목일(李牧一)에 관한 일을 말해 보면, 이목일이 안문(雁門)에 있을 때에 사졸(士卒)들에게 음식을 주어 말 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키고, 봉화(烽火)를 삼가고 간첩을 많이 썼다. 사졸과 약속하기를, ‘흉노(匈奴)가 쳐들어오면 곧 들어와 모여서 지키고 나가서 싸우는 자가 있으면 목 베겠다.’ 하였더니, 오랑캐가 이목일을 겁쟁이라 하였다. 조왕(趙王)이 노하여 다른 사람을 장수로 임명하였는데, 오랑캐가 오면 매양 나가 싸웠으나 번번이 불리하여 손해가 많았다. 조왕이 이에 이목일을 다시 기용하여 장수로 삼았더니, 옛날 따르던 변방 병사들이 모두 한 번 싸우기를 원하였으므로, 이에 이목일이 적을 크게 무찔러 흉노 10여 만 명을 죽였으며, 이로부터 오랑캐가 다시는 변경을 침범하지 아니하였다. 그 밖에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고 적을 가볍게 여김이 해가 된다는 것은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이번 급보에 의하면, ‘홀라온(忽剌溫)이 변경 침범을 꾀하므로 백성들을 함께 다 모아서 지키고,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들을 말끔히 하여 대비하고 있겠다. 그러나 여러 날 행군에 지친 적이 우리 경내에 침입한 것을 지키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 것은 겁 많고 약한 자의 짓에 가까우므로, 정예(精銳)를 뽑아 적당한 기회에 쳐서 침범당하는 걱정을 길이 없애고자 한다.’ 하니, 그 계책이 참으로 좋도다. 그러나 변방을 지키는 계책은 봉화(烽火)를 삼가고 척후(斥候)를 행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적이 쳐들어올 때에는 우선 모여서 지키고 진지를 튼튼히 하며, 말끔하게 하여 놓으면 적이 들어와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험한 산천을 여러 날 뛰어다니는 것은 헛된 수고가 될 것이니, 후일에 침략하는 일이 거의 없어질 것이다. 혹시 적의 강하고 약함을 헤아리지 않고 그저 한번의 결전을 꾀하다가 만일 실패하게 된다면 그 해(害)는 적지 않을 것이다. 약한 군사를 가지고 강적에 대하고 소수로써 다수의 적을 무찌르는 것은 비록 전단(田單) 의 기묘한 계책이 있다 손치더라도, 한때의 요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결코 승리하는 만전의 계책이 아니니 본뜰 것이 못 된다. 적의 강약을 알고 우리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어, 우리에게 만번이길 승산이 있고 적에게 반드시 패할 형세가 보인다면, 뜰 안의 도적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기묘한 계략으로 임기응변을 내어 한척의 수레도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하여, 시랑과 같은 마음을 징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국경 밖에까지 추격하여, 무력을 다하면서까지 토벌하기를 한(漢) 나라 왕실의 위곽(衛霍) 이 한 것처럼 하는 것도 나의 소망이 아니니, 옛사람의 성패(成敗)를 거울삼아 만전의 계책을 도모하라.” 하였다.
○ 18년 여름 5월에 올량합의 5백여 기(騎)가 조명우 구자(趙明于口子)에 침입하여, 남녀 14명을 사로잡고 마소 85마리를 약탈해 갔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연변(沿邊)의 고을에 모두 목책(木柵)을 세우고 밤에는 관리가 순찰하여 굳게 지키며, 낮에는 망을 보고 나와서 농사를 짓게 하여, 방어의 방략과 국경을 정하는 일을 이미 극진히 하였는데, 이번에 적 5백여 기가 사람과 가축을 노략질해 갔으니, 청컨대, 이각과 김윤수가 막지 못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따랐다. 그때 야인이 원한을 품고 을묘년 이후 매년 침략하였으므로 변방 고을이 떠들썩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군사의 일은 멀리서 지휘하기 어렵사오니, 모름지기 변방 장수에게 맡겨서 처리하도록 해야 공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평안도의 변방 방비의 일을 해마다 대신을 보내어 처리하게 하여, 도절제사(都節制使)로서는 무엇을 해볼 수 없으니, 어찌 계획이 서로 모순되는 일이 없겠습니까. 또 군사의 명령이 나오는 곳이 많아서 사졸이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몰라, 변방 일이 늦어지고 해이해져서 침략을 당할 때마다 추격하여도 잡지 못하오니, 이 뒤로는 찰리사(察里使)와 부사(副使)를 보내지 마시고, 오로지 도절제사에게만 책임을 지워서 효과를 거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 6월에 병조 판서 최사강에게 명하여 이만주가 보낸 임납노(林納奴)에게 예조를 통하여 유시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변방에 침입한 것을 홀라온이 한 것이라 하니, 그 말이 과연 사실이라면, 홀라온이 살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다른 곳으로 왕래할 길이 없어, 반드시 너희들의 고장을 거쳐야 하는데 너희가 어찌 모르겠으며, 더구나 침입할 때에 걸어온 자가 수십 명이나 되니, 홀라온이 어찌 험한 길을 무릅쓰고 먼 데까지 왔겠느냐. 이에 너희들이 거짓임을 알 수 있으므로, 변방 장수가 정예로운 기병 10만으로 너희 소굴을 철저히 수색하여, 너희들의 난폭한 짓과 속인 죄를 묻기를 청하였으되,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하고 끝까지 추격하지 말게 하였다. 만약 죄악이 차고 쌓이면 스스로 멸망을 취하게 될 것이니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교시하기를, “우리나라는 동쪽은 섬 오랑캐와 이웃하고, 북쪽은 야인과 접하고 있어, 그들을 어루만지는 도리와 방어하는 방법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난번의 함길도(咸吉道)의 일로 말하면, 경인년에 알타리 등이 감히 멋대로 날뛰어 경원(慶源)을 침략하여 양민을 죽이고 해(害)가 진장(鎭將)에까지 미쳤으므로, 태종께서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더니, 그들이 마침내 낯빛을 고치고 순종하여, 그들의 땅을 가지고 조정에 오는 자가 그치지 않은 지가 이제 거의 30년이 되어간다. 평안도 일대는 지방이 평안하고 조용하여, 평소에 좀도둑의 걱정이 없었는데, 임자년 겨울에 이만주 등이 여연(閭延) 등지에서 잔학한 짓과 침략을 멋대로 하였으므로, 종묘에 고하고 장수를 보내어 죄를 다스리고, 그 완악한 자들을 섬멸하고 남녀를 잡아서 돌아왔었다. 그들을 마땅히 멸종(滅種)의 죄로써 다스려야 하였지마는, 내가 생각해보니, ‘오랑캐는 짐승이다. 그러니 그 땅을 얻어도 쓸데가 없고, 그 사람을 얻어도 백성으로 만들 수 없으며, 또한 한때의 조그마한 사건을 가지고 수십 년 동안을 어루만져 온 신의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그 사로잡은 남녀들을 본토로 데리고 돌아와 편안히 살게 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쌀을 팔기를 원한다면 팔게 하여 후하게 대접하여, 어루만져 주는 은혜를 전날의 배나 더하였다. 또 무장(武將)을 뽑아 변방 소임을 맡기고, 남도(南道) 사졸로 하여금 번갈아 가면서 지키게 하고, 해마다 대신을 보내어 방법과 계책을 세우면서 그 방어하는 계책에 빠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만주가 짐승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항상 개나 쥐새끼 같은 생각을 품고, 을묘년 정월에 여연(閭延)의 구자(口子)의 읍성을 침략하고, 7월에는 다시 훈두(薰頭)와 조명우(趙明于) 두 구자(口子)에 침입하여, 농민과 마소를 죽이고 잡아가고 하여 악독한 짓을 멋대로 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어찌 막는 방법과 어루만지는 마음이 미진함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동서반의 사품(四品) 이상의 관원으로 하여금 능히 막을 계책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봉장(封章)을 올리도록 하라. 내가 친히 보리라.” 하였다.
○ 이천(李蕆)을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삼고 사정전(思政殿)에 불러들여 보고 어구마(御廐馬) 한 필을 내렸다. 윤6월에 병조에서 아뢰기를, “평안도 수령들이 각각 군졸을 거느리고 차례로 연변 방어에 나아가는데, 공급에 따른 물자를 가득 실은 말이 7,80필이나 되오며, 따라가는 마부도 백 명이 넘사오니, 이제부터는 수령이 군졸을 친히 점검하고 각군에 1천 호씩을 주어 거느리고 가서 방비하게 하되 도절제사는 사찰을 엄격히 하고, 경중(京中)에서 보내는 군사는 상호군(上護軍) 중에서 무략(武略)이 있는 자를 뽑아서 거느리고 가서 방비하게 하되, 도절제사의 의견을 듣게 하고, 때로 조관(朝官)을 보내 순찰하여 상과 벌을 정하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좋다 하고, 이천에게 유시하기를, “한 줌도 못 되는 흉측하고 추악한 무리가 우리의 큰 은덕을 잊어버리고 해마다 침노하니 그 죄가 차고도 남는다. 여러 신하와 막료(幕僚)들이 그들의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려 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하여 오직 변경을 굳게 지키기만 하고, 위엄으로 누르면서 덕으로써 회유(懷柔)할 뿐이었다. 그래서 변방 장수들이 적이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지 않고 신의(信義)로써 대접하여 왔는데, 방비가 약간 늦추어진 틈을 타서, 저들이 혹은 강가나 험한 산이나 우거진 수풀 속에 숨어서 밤낮으로 엿보다가, 때를 보아 침입하여 백성을 죽이고 잡아가고 하니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의견을 아뢰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여연(閭延) 등지는 몹시 춥고 길이 험하여, 겨울철에는 한 마리의 말을 먹이는 여물과 콩의 비용이 몇 사람을 먹이는 비용의 배나 든다. 비록 좋은 말이라 해도 땅이 좁고 길이 험하여 적을 만나도 달리고 뛸 곳이 없으니, 차라리 건장하고 용감한 보졸(步卒)을 뽑아 방비에 충당하면 먹이에 대한 수고도 없애고 방어의 효과를 거두게 되어 좋다.’ 하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적을 제압하고 방어하는 일을 전적으로 경에게 맡기노니, 경도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군사에 관한 일은 멀리서 지휘하기는 어려운 것이므로, 이제 적을 제압 방어하는 계책을 중외(中外)에서 구하여 그 중에서 이용할 만한 것을 적어서 밀봉하여 보내노라. 비록 때에 알맞게 조처하는 방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 많으나, 이용할 만한 계책과 실행할 만한 일도 있을 것이니, 경만 혼자서 보고 그 뜻을 세밀히 연구하여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고, 만일 좋은 계책이 있거든 계획하여 아뢰라.” 하고, 또 박안신(朴安臣)에게 유하기를, “한 지방을 방비하는 방법은 오로지 도절제사에게 맡겼으나, 성과(成果)를 보고자 하여 방략을 모은 글을 널리 구하여 보내면서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적을 제어하는 방법은 비록 도절제사가 위주로 할 것이나, 경도 함께 살펴야 하니 역시 몰라서는 안 되겠으므로 또 한 벌을 베껴 보내노라. 이번에 중론이 분분하여 비록 때에 알맞게 조처하는 방책이 아닌 것도 있을 것이나, 역시 쓸 만한 것과 못쓸 만한 계책이 있을 것이니, 경은 밤낮으로 잘 생각하여 도절제사와 더불어 성심성의로 토의하여 의논을 모아 아뢰라. 비록 의견이 같지 않은 점이 있어도 각기 자기의 소견을 적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 정흠지(鄭欽之)에게 유시하기를 “근래, 야인이 해마다 변방을 침범하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이만주가 홀라온에게 병력을 청하여 함께 와서 침략한 것이다,’ 하고, 이만주는 말하기를, ‘홀라온이 한 짓으로, 나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우리 파저강(婆豬江) 가에 사는 사람도 노략질을 당하였다’ 하니, 나는 변경에 침입한 자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 도(道)에 사는 올량합(兀良哈)ㆍ알타리(斡朶里)ㆍ올적합(兀狄哈) 등이 홀라온과 서로 통하는 자가 응당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사람 편에 물어서 그 사실을 파악하려 하였더니, 이제 종서가 아뢰기를, ‘알타리ㆍ 원문빠짐 수(水)ㆍ올량합ㆍ복아한(卜兒罕) 등의 말에 의하면, 홀라온ㆍ올적합ㆍ사매합(沙眛哈)ㆍ내이거(乃伊巨)ㆍ모독호(毛禿戶) 등이 5월 5일에 파저강을 나와서 사매합은 여연에 침입하고, 내이거와 모독호는 이만주가 있는 곳을 침략하였다고 하옵는데, 두 사람의 말이 입은 달라도 말은 같으나,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있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함께 할 것이 뻔하니, 그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 적국과 상대하는 자는 반드시 적국의 정상과 허실, 도로의 굽음과 곧음, 험하고 평탄함 등을 알았습니다. 우리 편을 위하는 계책으로서는 간첩을 잘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사매합ㆍ내이거ㆍ모독호 등이 같이 군사를 일으켜 2군으로 나누어서 하나는 우리를 침범하고, 다른 하나는 이만주를 침범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사정이 있었을 터이니 그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만주가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홀라온에게 군대를 청한 것은, 속으로는 마음을 같이하지만 겉으로는 서로 원수처럼 대하는 것으로서, 그 실정을 숨어 나타내지 않으니, 그것도 몰라서 안 되겠습니다. 홀라온이 사는 곳의 산천이 험하고 평탄함과, 부락의 많고 적음과, 병정의 강약과 허실, 우리와의 거리의 멀고 가까움, 도로의 굽음과 곧음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랑캐들의 성품은 욕심이 많으므로 잇속으로 꾀면, 아비와 아들 사이에서도 그 사정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올량합과 알타리 중에서 홀라온과 인연이 있는 사람을 구하여서 뇌물을 후하게 주어 그 마음을 사고, 또 우리나라 통사(通事) 중에서 조심성 있고 치밀한 자를 뽑아 그들의 옷을 입히고 왕복의 여비를 두둑히 주어서 함께 홀라온에게 보내어 시일(時日)을 제한하지 않고 마음대로 갔다 오게 하여 저들의 정상을 염탐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년 동안 하면 저들의 형편을 남김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종서의 이 계교가 참으로 좋다. 이제 정부 대신들과 의논하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오랑캐와 알타리중에서 홀라온과 인연이 있는 자는 진실로 만나기 어렵고, 비록 만난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며, 또 통사를 보냈다가 실패하여 탄로난다면, 실로 위험한 계교입니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옛날부터 적의 정상을 알려면 모름지기 간첩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사온데, 비록 홀라온에게 직접 통하지는 못한다손 치더라도, 어떤 일을 핑계 삼아 이만주ㆍ심납노ㆍ임합라 등에게 잇따라 가서 몰래 물건이나 돈을 그 관하(管下) 사람에게 주면, 그는 반드시 세 곳의 말을 낱낱이 듣고 올 것이오니, 그것을 검토하면 그들의 실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변방 방어가 비록 준비되었더라도, 저들의 허실을 모르면 장님과 귀머거리 같으므로 예부터 반간(反間) 을 이용하여 그 계획을 마음껏 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통사로서 함께 일을 꾀할 만한 사람이 적으니, 만일 실패하여 탄로가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홀라온과 파저강의 야인 중에서 서로 친하고 우호적이어서 함께 일을 꾀할 만한 자를 뽑아 그 처자를 넉넉히 도와주고 재물을 후하게 주어서 보내고, 공이 있으면 또 후히 상을 주어, 서로 다투어 반간이 되게 하면 적의 모의(謀議)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그 요점(要點)을 잡을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이만주가 해마다 자주 침입하여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잡아갔으니 마땅히 토벌해야 하겠으나, 흉년을 만나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가 없어 잠깐 생각 밖에 두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부터 군사가 적을 대하여 싸우려 할 때에는 반드시 간첩을 이용하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적정을 알 수 없어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만주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고는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핑계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실정을 몰라 그의 술책에 빠진 것 같으니, 반드시 김종서가 말한 바와 같이한 뒤에라야 지키든지 치든지 간에 계책을 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통사 중에 조심성 있고 치밀한 자가 많지 않으니, 혹시 잡힌다면 왕숭(王嵩)이 원호(元昊)에게 매를 맞고 괴로움이 극도에 달하여 거의 죽게 되어서도, 끝내 말을 바꾸지 않는 것과 같이 할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저 홀라온이 잡아 머물러 두고 온갖 방법으로 위협을 하면 반드시 간첩이라는 실정을 실토하여 변경에 대한 계획을 누설할 것이요, 홀라온의 수천 군중이 소요(騷擾)를 일으킬 것이다. 옛날의 장군들은 적을 이용하여 적정을 알아내는 일이 많았다. 저 야인은 의리를 모르고 본성이 재물을 탐하므로, 접경(接境) 지대에 있는 야인으로서 홀라온과 파저강에 인연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그 처자를 후하게 도와주고, 그로 하여금 사사로이 왕래하게 하면 몇 해가 안 되어서 홀라온과 이만주의 실정을 모조리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잡히더라도 우리가 공격하여 토벌할 기세가 없고, 저들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바에야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경은 김종서와 이징옥과 편리할지 않을지의 여부를 잘 의논하여 자세히 아뢰되, 만일에 다른 계책이 있거든 숨기지 말고 아울러 아뢰라.” 하였다. 흠지(欽之)가 계책을 아뢰기를, “좋은 장수는 간첩을 잘 이용하여 적정을 알고, 군령을 엄격히 해서 우리의 계획을 비밀히 하여야 하오니, 정보를 먼저 아는 자는 이기고, 모르는 자는 패하는 것은 예나 이제나 늘 있는 일이오며, 병법(兵法)에도 이르기를, ‘몇 해 동안을 지키다가 하루의 승리를 다투어 작록(爵祿)과 백금(百金)을 받는다. 적정을 모르는 자는 장수가 아니며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가 아니며, 승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였사오니, 바로 이것을 이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면이 모두 적과 경계하고 있고 동쪽과 남쪽은 큰 바다여서 저절로 전함(戰艦)으로 쳐들어옴을 대비하였으므로 왜가 걱정을 끼치지 못함이 거의 50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서쪽과 북쪽은 적의 소굴과 경계가 접해 있고, 왕래를 막는 데가 없어 도로의 굽음과 곧음,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등을 모르는 데가 없이, 가만히 엿보다가 틈을 타서 침입하여 약탈해 가지 않는 해가 없습니다. 여러 진(鎭)을 지키는 장수가 침입해 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기일에 미처 변에 대응할 수가 있겠습니까. 서쪽은 압록강 이북, 동쪽은 두만강 이북의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도로의 구불고 곧음 등과 아울러 적의 허실(虛實)을 비록 변방에 오래 산 경험이 있는 장수와 노련한 병졸일지라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야말로 지리를 모르는 군사가 먼저 지리를 잘 아는 적을 대하는 것이므로, 늘 저들에게 꺾이었던 것입니다. 이번의 급변은 이만주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또 범찰(凡察)과 홀라온이 서로 화살로 편지를 보내어 몰래 결탁한다는 말이 있으니 그 실정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임금님의 계획에 따라 접경에 있는 야인으로서 홀라온과 파저강에 인연이 있는 자와 비밀리에 모의하여 후한 잇속으로 구슬러서 그 처자에게 뇌물을 주고, 그로 하여금 친척이나 사돈과 만나본다는 핑계로 사사로이 왕래하면서 몰래 그 실정을 알아보게 하되, 이렇게 하기를 2ㆍ3번 하면 거의 두 곳의 정상을 모조리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시세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옛사람의 간첩을 이용하는 취지에도 맞는 것입니다. 신들의 소견에도 본래 다른 계책이 없사오며, 또 야인 중에는 홀라온과 파저강에서 인연이 있는 자도 있습니다마는, 서두르면 일이 이루지지 못하오며,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혹 형적(形迹)을 남길까 염려되오니, 형적을 없애야만 간첩을 이용하는 방법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징옥에게 그 일을 맡아보게 하고, 김종서가 그 모사를 주관하여 기한을 두지 않고 기회를 보아 잘 꾀하면 계획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간첩 일은 비밀히 해야 하며, 간첩은 상을 후하게 주어야 하고, 계획은 알리지 말고 돈은 마음대로 넉넉히 쓰게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얕은 소견은 이것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정부에 의논하니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만일 국경 근처의 야인으로서 그 동족을 배반하고 충성을 우리나라에 보내는 자를 얻는다면 좋습니다. 그러하오나 야인의 본성이 배신을 잘하여 믿기 어렵사오니, 만약 먼저 우리 나랑 사정을 저들에게 알리고 도리어 허황된 말을 우리나라에 알리게 된다면 이로움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손해가 됩니다.” 하였고, 참찬 하연(河演)이 아뢰기를, “지난날 왜적이 창궐할 때에 나라에서 윤명(尹明)의 무리를 얻어 쌀과 돈을 많이 주어 적의 소굴에 왕래하면서 혹은 장사도 시키고 혹은 괴수에게 물건을 보내고 하였더니, 적이 잇속을 탐내어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평안할 수가 있었으니, 이것은 이미 지난날 실지로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제 임금님 말씀대로 접경에 사는 야인으로서 평소에 서로 왕래하는 자를 얻어 그 지방에서 귀하게 여기는 물건을 주어 반간 행세는 하지 말게 하고, 오로지 장사를 하면서 서로 화목해야 한다는 말만 힘써하게 하면, 잇속을 구하여 왕래할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반간이면서 저들의 실정을 잘 알게 될 것이오며, 비록 잡히더라도 저들이 두 마음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곧 정흠지와 김종서에게 유시하기를, “이번에 경이 올린 계획은 매우 좋다.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였더니 혹은 좋다 하고 혹은 안 된다고 하여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나는 생각하기를, 저들과 인연이 있는 자를 간첩을 시키되, 우리나라의 실정을 잘 아는 자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니 도리어 우리나라의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으므로 해로워서 불가할 것이 환하니, 반드시 자신이 간첩임을 모르게 한 뒤에라야 할 것이다. 이제 저들과 인연이 있는 야인을 뽑아, 사사로운 일로 인하여 반간을 행하되, 그로 하여금 후한 상을 탐내게 하고, 제가 반간이 된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게 한다면, 저들은 실정을 숨기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그 계획을 시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상줄 돈을 경들이 의논하여 재량껏 마련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 9월에 홀라온과 가은독(家隱禿) 등이 회령에 침입하여 남녀 9명과 말 한 필을 노략질하여 갔다. 이징옥이 부하 장교 손효은(孫孝恩)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고, 범찰(凡察)의 관하가 역시 뒤를 쫓았다. 무아계(無兒溪)에 이르러 가은독의 아우 탕기(湯其)와 수고(愁古) 등 2명을 잡고, 노략당하였던 사람과 말을 탈환하고, 정흠지ㆍ김종서가 가은독ㆍ탕기 등을 베었다. 정흠지ㆍ김종서ㆍ도순무사(都巡撫使) 심도원(沈道源)에게 유시하기를, “옛날부터 오랑캐와 더불어 일을 같이한 사람은 늘 화를 입었고 복을 입은 적이 없다. 그러나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게 하면 중간 나라의 이익이다. 범찰이 국경 안에 살면서 적이 침입하였다는 말을 듣고 원군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갔으니, 비록 그 마음을 모른다 치더라도 그것을 힘써 충성을 다한 것이다. 적들이 원한을 품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또 관하 사람으로 하여금 관군에게 길을 알려주게 하여 곧 적을 잡고 노략당한 사람과 물건을 탈환하였으니 상주지 않을 수 없다. 범찰에게 옷 한 벌을 주고, 관하 10명에게도 각각 옷 한 벌씩, 그 길가에 살면서 알타리를 따라간 자에게도 무명 각각 1필씩을 내리노라. 그러나 변방의 일이라 멀리에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위에 적은바 내린 상이 더하고 덜할 필요가 있거든 경들이 잘 생각하
여 시행하라.
또 무아계에서 회령까지는 1백 20리이며, 보아하(甫兒下)와 길가 좌우 알타리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은데, 가은독 등이 만약 내응(內應)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찌 곧장 들어가 노략질을 할 수가 있었겠느냐. 그러나 만약 검색을 하면 소동을 일으킬까 염려되고, 또 사로잡은 적도 근래에는 없으니 이제 경이 잘 계획하여 잡아들이는 데만 힘쓰지 않도록 하라. 다만 요즈음 홀라온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있는데, 여러 날 가두어 두고 그 무리를 국문하지 아니하면 홀라온 사변에 비칠 것이다. 경들은 일찍이 조정에 있어 국가 대사에 참여하지 않은 일이 없으므로, 사리의 완급(緩急)에 대하여 정통하지 않음이 없을 터이니, 사유를 묻지 않고 긴급히 처형하는 데는 반드시 부득이한 사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고, 이에 정흠지ㆍ심도원ㆍ이징옥ㆍ 김종서에게 옷과 술을 내리었다.
○ 김종서가 급히 아뢰기를, “올적합 3천여 명이 와서 경원(慶源)을 포위하였으므로, 판관(判官) 이백경(李白慶)과 호군(護軍) 우안덕(牛安德)이 나누어 나아가 협공하여 적의 머리 셋을 베었읍니다. 도진무(都鎭撫) 조석강(趙石剛)의 원병이 오자 적이 조금 퇴각했으므로, 추격하여 두만강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물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박안신(朴安臣)과 이천(李蕆)에게 유시하기를, “요즈음에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략하는데, 조정의 의논은 파저강 야인이 홀라온을 꾀인 것이라고 하나, 이제 와서 보건대, 비단 파저강 야인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날 저들이 우리 노루목[獐項] 목책을 포위하였을 때에 우리가 비록 모조리 섬멸하지는 못했으나 저들이 잃은 인마 역시 많았었다. 여연(閭延)에 침입하여서도 실패하고 돌아갔으니, 그들의 보복하려는 생각이 시끄럽게 그치지 않은 것도 알 만한 일이다. 어찌 다만 파저강 야인이 군사를 청해서만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홀라온이 회령에 이르기까지는 도로가 평탄하고 또 가까웠었다. 9월에 3천여 명이 뜻하지 않은 때에 나와서 멀리 험한 길을 경유하여 와서 경원(慶源)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지키던 장수가 군사를 내어 적의 머리 셋을 베고 추격하여 두만강에 이르니, 적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강을 건넜으니, 그들의 보복하려 날뛰는 정상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함길도(咸吉道) 연변의 네 고을은 이미 수비가 되어 있고, 도내(道內)의 여연(閭延)ㆍ자성(慈城)ㆍ강계(江界) 등지의 수비도 튼튼하니, 그들은 반드시 이 틈을 타서 의주(義州) 등지로 달려들어 방비가 없는 곳을 엄습할 것이다. 창성(昌城) 이하 의주 등지에 영을 내려 수비를 더욱 엄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정흠지와 김종서에게 유시하기를, “이제 정부 대신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용성(龍城)은 새로 설치한 네 고을의 요충 지대이니 경성(鏡城)을 여기에 옮겨서 도절제사의 본영을 삼아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을 지키게 하는 것이 매우 사리에 합당합니다. 또 이 고장은 옛날에는 인구가 조밀하고 곡식이 잘되던 곳인데, 네 고을을 새로 설치한 뒤로부터 백성들이 모두 옮아가 비옥한 땅이 도리어 풀밭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절제사를 보러 오는 야인들이 길이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되니,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의 경성은 성이 낮고 작으며, 영청(營廳)의 관사가 작고 좁으니, 지금 행영(行營)을 고쳐야 하겠지마는, 그 역사가 번거로우며 또 수재(水災)가 있으니, 도절제사의 본영을 용성(龍城)으로 옮기어 경성부(鏡城府)로 삼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군사ㆍ관리ㆍ노비들을 옮겨와 살게 하고, 각 도의 군민(軍民)을 아울러 용성들에 흩어져 살게 하면, 머지않아 번창할 것을 곧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한다. 그러나 변방의 일을 멀리서 짐작하기 어려우니 잘 생각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흠지가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보건대, 경원부가 부거(富居)에 있을 때에는 용성은 실로 북쪽 변방으로서 적이 내왕하는 요충 지대였으나, 이제 이미 네 고을을 두었으니, 경성과 용성으로부터 황절벌(黃節伐)과 석막(石幕)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내지(內地)가 되었고, 경성에서 서쪽 4,5리에 보동(甫洞)이 있는데, 이곳은 곧 동북쪽에 있는 적이 나다니는 지름길이니, 적이 만일 빨리 달려온다면 이틀이 못 되어서 성 밑까지 이를 것입니다. 경성이 비록 성이 낮고 영청 관사가 좁아서 지금 행영을 바꾸어야 한다 하지마는, 옛날부터 있던 굳은 성에 의거하고 이미 지은 관사를 수리한다면, 용성에 새로 옮겨서 가시밭을 헤치고 새로 관사를 짓고 성보(城堡)를 쌓는 것에 비하여 그 공역(功役)이 어렵고 쉬움과 크고 작음을 같이 논할 바가 아니옵니다. 금년 8월에 신이 경성에 가서 자를 가지고 그 성을 재어 보았더니, 둘레가 2천 9백 4자이고, 높이가 12자나 되오며, 그 성이 비록 작다고 하오나 쌓은 뒤에 아직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사오며, 또 산성(山城)이 있어 읍성(邑城)과의 거리가 2ㆍ3리 밖에 안 되옵고 창고도 모두 있었습니다. 우뚝이 마주 솟아 깃발이 서로 바라보이고 북과 나팔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어, 적의 침입을 막는 요충으로서 이른바 기각(掎角 서로 협력한다는 뜻)의 형세입니다. 비록 수재(水災)가 있다고 하지만, 그 물은 질펀하게 흐르고 제방이 매우 평탄하니 성에 해가 되지는 못합니다. 하물며 경성에서 길주(吉州)까지가 2백 49리나 되어 이미 먼데, 만약 용성으로 옮기면 서로의 거리가 3백여 리나 되오니, 관리와 백성이 입는 폐해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각 도에서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을 용성으로 흩어져 가게 하면 꼭 행영을 옮기지 않아도 몇 해 뒤에는 용성의 들이 저절로 번성해질 것입니다. 네 고을을 설치하기 전에 주장(主將)의 본영을 용성에 옮기지 않고도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이제 용성을 지나 나흘이나 걸리는 곳에 강을 따라 진을 설치해서, 용성의 남쪽과 북쪽이 모두 내지(內地)가 되었으니, 작은 이익을 위해서 하루아침에 오촌(烏村)의 당당한 두 성을 버리고, 백성들의 이미 안정된 생업을 옮기고, 적들이 침입하는 요충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그만두어도 좋은 큰 역사(役事)를 일으키려 하시니, 이것이 신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옵니다. 또 이 도에다가 성을 쌓는 것은 다른 도에 비하여 그 어려움이 10배나 되오니, 회령의 한 성을 보더라도 백성들의 노고와 마소가 지쳐서 죽는 실태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네 고을이 비록 설치되었다 하오나 종성과 용성에는 아직 성을 쌓지 않았으며, 역사에 피로한 백성들이 아직 소생하지 못했으니, 지금의 계책으로 마땅히 백성의 힘을 아껴 기르고, 농사에 힘써 곡식을 저축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종성과 용성에 시기에 맞추어 성을 쌓을 것이요, 다시금 다른 일을 의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 임금이 정부에 의논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는 혈기가 왕성하고 생각이 주밀하였으나, 근래에는 기운이 쇠약해지고 생각이 자꾸 섞갈리어 걸핏하면 불길한 생각이 든다. 이번에 함길도 경원(慶源)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잡혀가고 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전에 함길도 백성이 혹은 말하기를, ‘용성(龍城)과 경성을 한계로 해야 한다.’ 하고, 혹은, ‘철령(鐵嶺)을 한계로 해야 한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내 생각에는 조종(祖宗)께서 이미 정하신 기업을 가볍게 버릴 수는 없다. 또 그 강토를 줄이더라도 적이 따라와 침범하면 무익할 뿐이니, 옛 지역을 굳게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또 고려 말년에 혹은 용성을 경계로 하고 혹은 종성을 국경으로 했지만, 적들이 더욱 그 잔학한 짓을 멋대로 하였으니, 이것은 지난날에 있었던 사실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끝이 없는 만사 중에 오직 이것이 큰일이로다.’ 하였는데, 이것은 변경을 두고 말한 것이다. 경들은 의당 이에 대하여 생각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 새로 네 고을을 설치하여 이미 용성의 민가를 옮겨다 채우고, 이제 경상도의 1백 40호, 충청ㆍ전라도에서 각각 1백 20호, 강원도의 52호의 용성을 채우려 하는데, 강원도 관찰사가 아뢰기를, ‘도내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풍년을 기다려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지마는, 내 생각에는 큰일을 하는 데는 조그마한 폐단을 헤아리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남북 변방의 경계할 일이 아직 그치지 않은 때에, 만약 풍년을 기다린다면 반드시 늦어질 것이고, 또 강원도와 함길도는 땅이 서로 이어 있어 이사하기가 가장 쉬우므로, 강원도는 수효대로 옮기고, 충청ㆍ전라ㆍ경상의 세 도는 농사를 전연 못 지을 것이니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느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주한 백성은 모두 그곳 창고에 있는 곡식을 먹을 것 이온데, 함길도에 저축된 곡식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오니, 잠시 그 이민을 반으로 줄임이 좋을까 합니다.” 하여, 그 말을 따랐다.
○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네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향을 떠나기를 달가워하지 않음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나, 한(漢) 나라 이래로 가끔 내지(內地)의 백성을 옮겨다가 변방을 채운 일이 있다. 이번에 함길도에 네 고을을 신설하고 용성과 길주의 백성을 옮겨다 채웠는데, 용성과 길주는 풀이 들에 가득하니 이 길을 지나가는 저 야인들이 보고 어떻다 하겠는가. 안으로는 굳세고 밖으로 정복하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으므로 부득이 네 도의 백성을 옮겨 용성과 길주의 땅을 채우는 것이다. 옮길 때에 굶주리고 추위에 얼어서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되니, 그곳 수령들은 구호에 힘써 굶주리고 얼게 하지 말 것이며, 병든 자는 더욱 더 잘 구호하여 죽지 않게 하여 나의 뜻에 부응(副應)하라.” 하였더니, 김종서가 아뢰기를, “회령에 돌성을 새로 쌓아 이징옥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그 군사 2백을 김윤수(金允壽)에게 주어 옛 벽성(壁城)을 지키면서 서로 돕게 하오면, 감히 어느 한 성도 적이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두성을 포위하면 군사가 갈라져 세력이 약해질 것입니다. 또한 경원(慶源)과 종성(鍾城)의 읍성(邑城)이 서로 바라보이는 중요한 곳에도 벽성(壁城)을 쌓고 적당히 군사를 갈라 무략(武略)이 있는 장교를 뽑아서 지키게 하되, 역시 서로들 돕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더니, 임금이 회답하기를, “이번에 경이 아뢴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회령부가 비록 새로 돌성을 쌓은다고는 하나, 창고가 아직 옛 성(城)에 있고, 옛 성이 아직도 튼튼하고 완전한데, 김윤수에게 주어 지키게 하는 것은 항구적인 계책이 아닙니다. 경원과 경성의 군사 정원이 본래 적은데, 만약 작은 보루(堡壘)를 더 만들어 군사를 나누어서 지키게 되면 병력이 분사되어 방어하기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으니, 경은 그것을 알지어다.” 하였다.
○ 11월에 김종서가 글을 올리기를,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선비들은 모두 말하기를,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는, 그들이 오면 어루만지고 가면 쫓지 않아 원한을 맺지 않고 틈이 생기지 않게 한다.’ 고 하며, 또 말하기를, ‘화친을 맺는 것이 소중하니, 이 계교가 성공하면 평안하고 이 계교가 실패하면 위태하다.’고 말하는데, 신도 평소에 항상 그렇게 말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와서 북호(北湖)를 지키며, 오랑캐와 뒤섞여 살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그들의 실정을 살피어 알게 되었는데, 오랑캐는 천태만상(千態萬狀)이어서 한 가지로 딱 잡아서 논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써 하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위엄으로써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없는데, 은혜가 지나치면 교만해지고 위엄이 과하면 원한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키는 자는 위엄으로 눌러서 감히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교만하여 환란(患亂)을 일삼는 자를 경멸하면 그 악독한 행동을 더욱 멋대로 하므로, 은혜와 위엄은 그 어느 하나에 치우쳐도 안 되고 어느 하나를 버려도 안 됩니다. 우(虞) 나라가 묘족(苗族)을 치고, 은(殷) 나라가 귀방(鬼方)을 치고, 주(周) 나라가 오랑캐를 응징하고, 한(漢) 나라가 흉노(匈奴)를 토벌하고, 당(唐) 나라가 돌궐(突厥)을 정벌하였는데, 저 성제(聖帝)와 명왕(明王)들이 어찌 모두 싸움을 좋아하여 그리하였겠습니까. 부득이하여 쳤을 뿐입니다. 이제 경원(慶源)의 적은 대부분 수빈강(愁濱江)의 올량합인데, 그들이 우리 국경 가까이 있어 우리나라의 고기와 소금을 먹으며, 우리의 무명과 비단을 입으면서, 하루아침에 우리의 큰 은덕을 잊어버리고 몰래 동건올적(童巾兀狄) 한두 사람과 결탁하여, 까닭 없이 침입하여 우리 백성을 죽이고 가축을 노략질하였으니, 맨 먼저 공격한 것은 저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놓아주고 치지 아니하면, 저들이 우리가 겁을 내는 줄 알고 장차 말하기를, ‘조선은 쳐도 좋다. 백성을 잡아가도 좋다.’ 하여, 뒷날 그 악독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기를 오늘보다 더 심히 할 것이오며, 비단 이 도적만이 아니라, 여러 오랑캐들도 틈을 엿보았다가 이것을 본떠 잇따라 일어나면, 변방 백성의 화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이 될 것입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오는 8, 9월이 바뀌어 지는 때에 본도(本道)의 정병 4천을 뽑고, 올량합과 알타리 가운데 올적합과 원수된 자를 모집하여 향도로 삼아, 길을 나누어 가서 정벌한다면, 군사가 곧고 씩씩할 것이니, 이기지 못함을 걱정하겠습니까. 신이 재주 없는 몸으로 이미 도절제사의 직권을 받았으니, 실로 분에 넘치어 항상 직책에 걸맞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사온데, 어찌 또 공을 바라고 벼슬이 그리워 감히 이 거사를 칭하겠습니까. 천지신명이 굽어보실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 글을 보고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승지 신인손(辛引孫)을 불러 이르기를, “이 글월의 사연이 지극히 간절하다. 그러나 요즘에 재변(災變)이 자주 나타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또 북쪽의 민심이 아직 수습되지 못하였으므로 가벼이 거사를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지난 계축년에 파저강(婆豬江) 정벌 때만 하더라도 그들의 소굴에서 우리 변경까지 살고 있는 백성이라고는 없었으므로, 불의에 나아가 몰래 쳤기에 족히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었으나, 북방으로 말하면 우리 땅으로부터 그들의 소굴까지 7ㆍ8일이나 걸리는데, 그 사이에 여러 종족의 야인이 서로 연이어 살고 있으니, 만약 많은 군사를 동원하면 저들이 반드시 먼저 대비하여 산림(山林) 속에 숨어 대기하고 있을 터이니, 어찌 반드시 성공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김종서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알타리의 동자음피(童者音彼)가 말하기를, ‘범찰(凡察)과 올량합의 복아간(卜兒看)ㆍ도아(都兒) 등이 홀라온과 우호를 맺고 다음해 봄에 백성을 노략하여 먼 곳으로 옮겨가 거주하려고 한다.’ 하고, 또 알타리의 마자화(馬自和)는 말하기를, ‘우리 알타리 등이 이절제사(李節制使)의 위엄을 꺼려하여 모두 먼 곳으로 이사하려 한다.’ 하여, 이번 회령 절제사 이징옥(李澄玉)이 자음피(者音彼)의 말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알리기를, ‘범찰의 간교한 계획이 하루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이 도적이 끝내 화가 될 것을 나는 본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찍 제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이다. 전날 꼬투리를 잡았으므로 죽이려 하였으나 심도원(沈道源)ㆍ정흠지(鄭欽之) 등이 말려서 죽이지 않았었는데, 이제 와서 깊이 뉘우쳐지오. 이제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아뢰어 그 추장(酋長) 3ㆍ4명을 죽이고, 이내 그 딸린 무리들을 구제하여 주고, 도와서 관독(管禿)의 세 살 난 아들을 세워 추장을 삼아 거느리게 하면, 큰 간흉(姦凶)이 제거되어 알타리와 올량합이 각각 마음을 놓을 것이니, 이 계책이 좋소. 혹은 모조리 죽여 씨도 없이 하여 뒷날의 걱정을 끊어 버리는 것은 더욱 좋은 계책이오. 이 기회를 잃으면 뉘우친들 장차 어찌하리오.’ 하였사온데, 그 말이 절박하여 다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에, 이번에 네 고을을 신설하였사오나, 오직 회령에만 돌 성을 쌓고 그 나머지는 모두 쌓지 않았고, 식량도 많이 모자라며 방비도 그리 튼튼하지 못하고, 군졸도 그리 많지 못 하온데, 서쪽에는 홀라온이 있고, 북쪽에는 혐진(嫌眞) 있어 모두 이미 원한을 맺고 있으니, 모두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징옥의 계교와 같이 범찰을 잡아 죽이면 그 잔당들이 날뛰지 않겠습니까. 남의 아비를 찔러 죽이고 그 자식을 어루만져 편안하고자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무리들뿐만이 아니라 올량합도 말하기를, ‘오늘 범찰이 죽었으니 내일은 나의 차례다.’ 하면서, 서로 결탁하여 화를 일으키게 된다면, 다만 다시 적이 더 생길 뿐 아니라, 앞으로 원근(遠近)의 오랑캐들이 결탁하여 올량합과 함께 모의하고 화를 우리에게 전가시킬 것이니, 신은 경인년의 화 를 되풀이할까 두렵습니다. 대체로 먼 곳의 적은 올 때에는 더디고 갈 때는 빠르옵니다. 또 우리의 허실(虛實)을 모르므로 그 방어가 어쩌면 쉽기도 합니다. 그러하오나 가까운 적은 우리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도로의 굽고 곧음,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 등을 샅샅이 알고 있어서,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물러나서 그 변동을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막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신이 또 생각하옵건대, 자음피(者音彼)의 말이 혹시 거짓인지 모르오니 그대로 믿을 수가 없고, 자화(自和)의 말이 혹시 진실인지 모르오니, 한 편만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하물며, 범찰이 신아첩합(臣兒帖哈)과 다시 소통한 까닭으로 제 스스로 와서 자세히 알리고, 또 그 가고 돌아옴을 모두 사람을 시켜 와서 알려, 그 정상을 숨기지 않는 것 같으니.이제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죽인다면 또한 의심이 됩니다. 또 이징옥의 계획과 같이 섬멸하여 씨도 남기지 않으면 뒷걱정이 없어지겠지마는, 알타리의 8백 명과 올량합의 수천이나 되는 무리를 하나하나 모조리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성패(成敗)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군사를 동원하는 날에는 저들의 군사도 동원될 것이오니 변방 백성의 화가 곧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신이 또 생각하기를, 고려의 신하 윤관(尹瓘)이 여진을 꾀여서 죽여 여러 번 기묘한 공을 세우고 9성을 세웠으나 이내 다시 잃어버렸고, 본조(本朝 이조)의 신하 정승우(鄭承祐)가 8명이 지휘(指揮)를 꾀여서 죽이고 드디어 그 처자를 섬멸함으로써 경인년의 병화를 초래하였으니, 이 또한 거울삼을 만하옵니다. 자음피(者音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이사할 때에 우리는 성을 굳게 지키고, 우리 군사를 정비하여 네 진(鎭)으로 하여금 빈틈이 없게 하고 신(臣)도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종성(鍾城)에 머물러 다른 여러 진과 서로 기각(掎角)이 되어, 천천히 그 형세를 보고 미리 우리의 계획을 세워, 그들이 옮겨갈 때에 노략질하는 형적(形迹)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꼬투리로 하여 추격 토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들이 우리 군사인 줄을 알고 또 우리의 튼튼한 수비를 보면 비록 딴 생각이 있더라도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니, 이것이 토벌하는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징옥은 북쪽 오랑캐 땅에서의 노련한 장수로서 지용(智勇)이 뛰어나고 생각이 주밀 하온데, 신은 본래 한낱 서생(書生)으로서 군사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일처리에 서투르오니, 삼가 바라건대, 잘 헤아려 선택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종서가 아뢴 것은 야인이 신의가 없어 믿지 못할 이유를 소상히 알고 있고, 범찰이 역모를 꾀한 자취가 이미 드러났다면, 우선 죽이고 나서 여러 추장(酋長)의 계획을 막는 것은 병가(兵家)의 한 기책(奇策)이라 하겠다. 그러나 알타리의 수백이나 되는 무리를 어떻게 모조리 섬멸할 수 있겠는가. 만약 씨가 남아 있으면 화가 끝이 없을 것이요, 또 알타리 등이 우리나라에 순종한 지가 오래되는데, 이제 까닭 없이 갑자기 죽이면 여러 종족의 야인들이 모두 우리가 귀순한 자를 죽였다 할 터이니, 어찌 귀순하려는 마음을 가지겠는가. 그렇게 되면, 북쪽 변방의 화가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또 범찰이 홀라온과 결탁하여 도적질할 계책을 이미 정하였다면, 비록 범찰을 토벌하고 알타리의 무리를 섬멸한들, 어찌 홀라온의 내침(來侵)을 막을 수 있겠느냐. 만약, 범찰이 본래 홀라온과 더불어 사귐을 맺지 않았다면, 범찰이 비록 목숨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저 홀라온이 어찌 반드시 험한 곳을 넘어 우리 국경에 뛰어들겠느냐. 이제 범찰의 속은 비록 짐승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이미 귀순하였으니, 갑자기 그를 죽이는 것은 명분이 없는 듯하니, 나도 종서의 계획을 옳게 여기는 바이다. 그렇기는 하나 이징옥은 북쪽 오랑캐 땅에서의 노련한 장수이니, 범찰의 역모가 과연 자음피(者音彼)가 고한 바와 같이 홀라온과 결탁한 정형(情形)이 뚜렷이 드러나서 사세가 숨길 수 없다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주벌하여, 이징옥의 계책대로 하는 것도 아마 옳다고 생각된다.” 하여, 곧 김종서에게 회답의 유시를 내리기를, “경이 논한 바가 시의(時宜)에 합당하도다. 대체로 오가는 말이란 그대로 다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니,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굳게 지키면서 가만히 저들의 동정을 엿보다가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그 변고에 응하는 방법은 일찍이 을묘 년에 내린 교서에 의하여 시기에 맞게 처리하되, 삼가고 가벼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회령 절제사 이징옥에게 유시하기를, “예부터 장수는 다만 위엄과 무용(武勇)만을 숭상하지 않고 반드시 문덕(文德)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문덕이 아니면 민중이 따르지 않고, 무력이 아니면 적을 위압하지 못한다. 옛날 오기(吳起)는 지혜가 온갖 일에 정통하고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가는 장수였는데, 위(魏) 나라를 위하여 서하(西河)를 지키니 진(秦) 나라 군사가 감히 동쪽을 향하지 못하였고, 제후(諸侯)와 더불어 싸워서 이기기를 64번, 국토의 사면을 개척하고 땅을 천 리나 넓혔으니 재사(才士)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위무(威武)만을 숭상하였고, 은혜와 인덕이 적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원망과 비방이 그를 따랐다. 그러므로 노(魯) 나라도 섬기고 위(衛)나라도 섬겼으나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였다. 등훈(鄧訓)은 호강교위(護羌校尉)가 되어 힘써 은혜와 신의로써 먼 데 사람을 회유(懷柔)하였으므로, 황중(隍中)의 여러 오랑캐들이 감격하여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종족과 부락들이 진심으로 귀순하여 변경이 평안하였고, 그가 죽자 관리들이나 오랑캐가 목 놓아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렀다. 또 반초(班超) 는 서역(西域)에 있은 지 31년 만에 5천여 호(戶)가 귀순하여 와서, 동한(東漢)의 변방 장수로서 그보다 앞서는 사람이 없었으며, 교대하여 돌아올 때에 임상(任尙)에게 고하기를, ‘변방의 관리들이란 본래 효자나 충손(忠孫)이 아니라 모두 죄를 지고 변방으로 전본(轉補)되어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고, 오랑캐들은 새나 짐승의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그들을 기르기는 어렵고 실패하기는 쉽다. 지금 그대의 성품이 엄중하여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생각지 아니하니, 의당 작은 허물은 용서하고 일의 큰 줄거리만을 쥐어야 한다.’ 하였더니, 임상이 생각하기를, ‘반초는 별다른 묘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 말하는 것이 그저 평범하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반초가 경계한 바와 같이 실패했다. 대체로 사람의 성품이란 느린 사람도 있고 급한 사람도 있으며, 도량도 크고 작음이 있어 꼭 같기란 어려운 것이니,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늘 민중의 마음을 얻고, 무위(武威)로써 엄하게만 다스리는 자는 항상 군중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군중의 마음을 얻는 사람은 항상 안전을 보전하고, 군중의 노여움을 사는 자는 늘 화를 불러 패하게 되는 법이니, 이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경의 무위는 비록 옛사람도 경보다 나을 것이 없도다. 위엄이 북쪽 오랑캐 땅에 떨치어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 복종하니, 내가 매우 기뻐하는 바이다. 그러나, 민중을 제어하는 길은 은위(恩威)가 치우치지 않는 데 있으며, 은위가 치우치지 않으면 사람이 사랑할 줄을 알고, 사랑할 줄을 알면 또한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공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진(晉) 나라의 양호(羊祜)가 그러하였다. 경은 옛 장수의 득실을 거울삼고 나의 지극한 마음을 알아차려서 위무(威武)만을 숭상하지 말고 반드시 인애(仁愛)를 더하여 사람을 복종하게 하여 길이 북쪽 오랑캐 땅에서의 어진 장수가 되어 나의 뜻에 따르라.” 하였다.
○ 19년 봄 3월에, 전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 송희미(宋希美)와 호군(護軍) 이백경(李伯慶)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고 전지(傳旨)하기를, “일찍이 연변(沿邊)에 영을 내려 매년 가을이 되면 백성을 독려하여 성보에 들어가서 들을 말끔히 하여 놓고 대기하라고 법령에 뚜렷이 있는데도, 9월 그믐께까지도 아직 성보에 들어가지 않아서, 적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죽이고 잡아가게 하였을 뿐 아니라 적이 온다는 보고가 잇따라 있었으며, 그들이 국경 가까이에서 며칠을 묵었는데도, 아직 백성들을 독려하여 입보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적의 창칼에 쓰러지게 하였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는데도 적게 아뢰고, 적의 무리가 1천명도 못 되는 것을 3천이라고 하여 거짓되게 위에 보고 하였으니, 이 모두가 큰 죄다.” 하였다. 또 김종서에게 유시하기를, “송희미(宋希美)와 이백경(李伯慶)의 죄가 얼른 나가서 적에게 대응하지 않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기병 2백이 우리 땅에 들어와 머물러 있는데도 탐색하지 못하였고, 또 급히 사람과 물건을 거두는 바람에 죽고 잡힌 자를 많이 내었으며, 적이 물러갈 때에는 그 세력이 조금 쇠약해졌는데도, 조석강(趙石岡)의 군사와 합하여 꾸물거리고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잡혀간 사람과 가축이 3백이 넘는데도, 다만 사람 20여 명, 마소 8ㆍ9마리라고 보고하여 거짓 상달하였다. 이에 큰 죄를 저질렀으므로 법에 의하여 대죄에 처할 따름이다. 만약 연변의 장수들이 송희미 등이 곧 나아가 싸우지 않았으므로 형벌을 받았다고 잘못 생각하여, 뒷날 적이 쳐들어올 때에 적이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도 않고 경솔히 성 밖에서 결전하려 하면 작은 해가 아닐 것이다.” 하였다.
송희미가 경원(慶源)을 지키는데, 아침에 수청 기생이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적이 갑자기 달려들어 영감의 머리를 베어 갑디다.” 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적이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송희미는 기생의 꿈을 매우 꺼리어 끝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부하들이 간하기를, “적의 형세가 외로우므로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인데, 어찌 차마 그들의 노략질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나가서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마침내 듣지 않아 적은 드디어 말과 사람 1백여 명이나 몰아 가지고 갔다. 어떤 군졸이 몸을 날려 크게 외치면서 잡혀가는 사람 수십 명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지자 세종이 크게 노하여 송희미를 잡아오게 하고, 군졸은 발탁하여 사품관(四品官)으로 삼고, 드디어 송희미를 의금부에 내리어 군법으로 논죄하여 죽음을 내렸다. 그가 죽을 때 길이 청파(靑坡)를 지나는데, 정승 최윤덕(崔潤德)이 송과 더불어 옛 친구인지라 주과(酒果)를 갖추어 권하면서 영결하기를, “슬퍼하지 말라. 공은 법에 의하여 의당 죽어야 하며, 하물며 인생은 마침내는 한 번 죽음이 있는 것이니, 나 역시 얼마 아니하여 공을 따를 것이오.” 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여름 6월에, 이천(李蕆)이 글을 올리기를, “전에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이 도둑질을 시작할 때에 조명우(趙明于)가 우리 군사를 속임으로써 이 도적이 몰래 우리 변경 땅에 가까이 하였고, 〈그 후〉 매년 침범하였습니다. 그 죄악이 차고 남음이 있사오니 군사를 일으켜 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이 도적에 대하여 헤아려 보건대 계축년 이래로 우리가 쳐들어갈 것을 의심하고 반드시 망을 보았을 것이며, 또 숨어 버리는 계략을 갖추고 있어서, 우리의 병력을 크게 동원하여 가서 치면 반드시 수풀 사이에 숨어 버립니다. 지난번에는 전 군대가 불시에 엄습했었으나, 이번에는 병력을 크게 동원하여가서 한 명의 도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면, 위엄을 보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웃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연변 백성으로서 자발적으로 분발하여 적을 칠자와 모집에 응한 군졸 및 수비하는 정병으로 길을 나누어 몰래 들어가, 적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20리 떨어져 있는 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민가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밤중에 바로 그 소굴을 두들기되, 집집마다 복병을 두고 화포(火砲)와 화전(火箭)을 퍼부어 집들을 불사르면, 적이 반드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를 것이옵니다. 이때에 모든 복병이 함께 일어나서 하나하나 쏘아 맞히면, 작은 도적을 굴복시키기란 마른 가지를 꺾는 것같이 쉬울 것이옵니다. 지난달 9일에 직접 정탐꾼을 보내기를 청하므로 곧 변방 고을에 영을 내려 그 소굴을 탐색하였는데, 신이 의주(義州)로부터 여연(閭延)으로 향하여 만포구자(滿浦口子)에 이르니, 비가 연일 그치지 아니하여 여연과 자성(慈城) 산골의 물이 넘쳐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시절이 바야흐로 한여름이 되어 장마가 한창이므로, 일을 처리할 수가 없어 희천(熙川)에 돌아왔는데, 조명우의 변을 듣게 되어 그곳으로 달려 가보니, 그때는 비도 멎었습니다. 각 고을의 염탐꾼들이 돌아왔는데, 모두 바로 그 소굴을 찾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와, 내보냈던 뜻이 매우 잘못되었기에 신이 책벌을 가하려 하였사오나, 그리하지 못한 것은 뜬 말로 선동할까 두렵고, 또 일이 오히려 기밀에 속하여 신이 감히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변방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모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소굴을 알아내지 못하였사오니, 실로 신에게 죄가 있습니다. 이제 다시 글을 변방 고을들에 띄워, 사람을 보내어 적의 소굴을 탐색하여 적이 있는 곳을 대략 알아 가지고 곧 군사를 일으켜 들어가 치려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산천이 험하여 만약 장마 비를 만나면 물에 막히는 걱정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늦가을 나뭇잎이 다 떨어져 활쏘기에 좋고 사람이나 말이 함께 활동하기 편리한 때를 기다려 길일(吉日)을 택하여 가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주가 이사할 뜻을 가지고 있음을 평소에 들었는데, 오늘의 체탐(體探)을 그가 알면 의심이 생겨서 급작스럽게 이사해 갈까 염려됩니다. 아간(阿間)과 고음한(古音閑) 마을이 오미대둔(吾彌大屯)에서 30여 리 떨어져 있고, 이산(理山)의 중앙 목책(木柵)에서 이틀 길인데, 농사로 인하여 살고 있는 사람이 한 4ㆍ5십이나 됩니다. 추수 후에는 반드시 이사해 들어갈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수확하기 전에 먼저 모집한 정병 1백 50으로 몰래 쳐들어가 우익(羽翼)을 치면 저들은 우리가 싸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군사를 일으켰다가 돌아갔으니, 반드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 하고 마음 놓고 수확할 것입니다. 이때에 위와 같이 조치하고, 다시 늦가을에 가서 3천의 정예를 내어 두 대(隊)로 갈라 한 대는 강계(江界) 고사리(古沙里) 목책으로부터 이향다회평(里香多會坪)을 거쳐 오미(吾彌) 위쪽 끝에 이르고, 또 한 대는 이산(理山) 중앙 목책에서 고음한평(古音閑坪)을 거쳐 오미 아래쪽 끝에 이르러, 우선 사로잡은 적을 길잡이로 하여, 도로의 어렵고 쉬움과 소굴의 있는 곳 등의 모든 이길 수 있는 계교를 협박하여 스스로 말하게 하고, 밤을 타서 엄습하면 이것이 곧 이기는 계책입니다. 만약 내년 2월이 되면 계절이 심한 추위가 아니어서 강 얼음이 아직 풀리지는 않았으되 쌓인 눈이 반쯤 녹아 저들이 숨어 엎드릴 곳이 없을 터이니, 이 역시 이용할 만한 때입니다. 그러하오니 이 도적이 전날의 원한을 깊이 품고 있으므로 가까운 장래에도 반드시 침범하러 올 것이고, 먼 장래에도 반드시 올 것인데, 만일 의심이 생겨서 다른 먼 곳에 숨어 버리면 여러 해 동안 쌓인 치욕(恥辱)을 씻을 길이 없게 될 것이니, 번갈아 들락날락하면서 자주 군대를 일으켜 치면 그들이 생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계책을 혹 허락하여 주신다면 마땅히 군대와 무기를 정비하고 미리 대비하여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 맹세코 이 도적과는 삶을 함께 하지 아니하여, 서쪽을 돌아보는 염려에 우러러 보답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 뜻을 드러내지 마시고 신에게 전승(全勝)의 책임을 지워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글을 내려 유시하기를, “계축년의 토벌 때에 여러 대신들의 뜻에 의하면, ‘평안도의 연변은 침입할 곳이 많아 방어하기가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더 어려우니, 적들이 만약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위엄으로 눌러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경인년과 기해년의 일이 이미 드러난 자취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논의하는 자는 걸핏하면 흉노(匈奴)의 예를 인용하여 이번의 큰 계획을 막지마는, 저 흉노는 모든 오랑캐의 대국(大國)으로서 중국(中國)과는 길이 아주 멀고 인적이 끊어져 있으므로, 제압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도적은 많아야 5,6백 명에 불과하고 골짜기 사이에 숨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비하면 불과 한 현(縣)의 인구밖엔 안 된다. 또한 변경과의 거리가 수백 리 에 지나지 않으니, 흉노와 비교하면 크게 다르다. 그런데 저 도적이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강 위에서 날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을 너무 무서워하여 끝내 한 명의 군사도 내지 못하고 물러나 성 안에 움츠리고 있으니, 이른바 ‘먼저 발하면 남을 제압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 하는 일로 보아 득의(得意)하기는 기약할 수가 없으니, 계축년의 계획은 본래 이렇지 아니하였었다. 전에 경이 아뢴 일은 아주 내 뜻에 맞는다. 그러나 요즘 천도(天道)가 불순하고 사람의 꾀하는 일에 차질이 생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내가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천도나 사람이 꾀하는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잠깐 토벌의 일에 대하여 말하면, 계축년의 거사(擧事)는 저 도적들이 마음 놓고 있을 때에 불시에 강을 건너 그 방비가 없음을 틈타 그 소굴을 엄습하였으므로 노획한 것이 있었으나 이번 일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반드시 그 처자들을 숨기고 그 재산을 감추고 구원한 약속과 요새를 지키는 일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으니. 이것이 곧 그들이 감히 나쁜 짓을 마음대로 하는 까닭이다. 적이 인의(仁義)는 비록 부족하지마는 간사한 꾀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번에 장군이 행하는 일에 있어 적의 소굴을 알아내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김 장군이 그들의 소굴을 알았다는 사실을 적이 알면 필시 새가 날듯이 이사를 해버려 그 거처를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니, 군사 행동을 하려 해도 장차 어찌 실시할 것인가. 또 정탐으로 나간 사람 중에 적을 죽이고 온 사람도 있고, 붙잡혀 돌아오지 못한 자도 있는데, 적이 이미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렸으니 미리 도망쳐 숨는 꾀가 전날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이 아닌가. 만약, 크게 쳐들어가려면 반드시 그 소굴을 알고 나서 행해야 되는데, 정탐하는 일은 이제는 이미 맞지 않으니 장차 무엇으로서 알아내겠느냐. 나는 경의 아룀을 매우 좋다고 생각하므로 뭇 의논을 물리치고 단행하고자 하나, 다만 이런 불편한 상황이 있으니 경은 비밀리에 변방의 노숙(老熟)한 사람과 휘하의 같이 모의할 만한 사람과 잘 의논하여 아뢰면 내가 다시 생각해 보겠다. 이번에 군사를 일으킨다면 언제가 좋겠느냐. 군사는 몇 명이면 족하겠으며, 길은 몇으로 나누어졌으며, 기병은 몇 명, 보병은 몇 명이면 되겠느냐. 적의 소굴은 어떤 방법으로 알아내겠느냐. 우선 참기로 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몇 해 동안이나 기다리려느냐. 공격 토벌할 생각은 말고 오로지 방비에만 힘쓴다면, 침입했을 때에 모름지기 따끔하게 응징하여 경솔히 침입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더욱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소굴을 탐색하는 사람은 골짜기 길을 경유하지 말고 산림(山林)을 뚫고 가다가 가끔 나가서 적의 소굴을 살핀다면, 적이 어찌 알아챌 수 있겠는가. 혹 알아냈다 하더라도 도망쳐 숨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만위림(李滿衛林)이 적을 죽일 적에 두 곳에서 간 사람이 한 곳에 모였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여덟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역시 두 곳에서 간 사람이 한 곳에 모여 마치 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 같으니, 비록 우리나라 사람인들 어찌 서로 모일 리가 있겠느냐. 김 장군이 갔을 적에 말 탄 적과 평야에서 서로 만나 쫓아가면서 쏘았다고 하는데, 이 세 가지 일로 보아 내놓고 큰길에서 행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렇게 어리석은 백성을 이용하여 이렇게 큰일을 하려면, 자세하고도 친절히 알려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이번에 이렇게 된 것은 생각하건대 경의 포치(布置)에 미진한 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진장(鎭將)으로서 일을 행함에 있어 게으름이 있었던가. 강을 건너가서 정탐하는 일이 중요한 듯하지마는, 소굴을 탐색하느라고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오늘에 있어서 그리 급한 일이 아니니, 일을 시작한 때에 해도 늦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말리려 했으나 미치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가 된다. 또 헌의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오랑캐를 대하는 길은 인의(仁義)로써 복종시킬 수 없고, 또한 하루나 한 달 동안 서둘러 해치우는 계략도 안 되며, 마땅히 지구책(持久策)을 써야 한다. 정병을 수백 혹은 수천 명을 뽑아 가지고 해마다 계속하여 쳐서 혹은 그 소굴을 불사르고 혹은 지어 놓은 곡식을 짓밟고, 들락날락 갈마들면 2ㆍ3년이 못 되어 저들은 반드시 지치고 피폐해질 것이다. 수(隋) 나라가 진(陳) 나라를 뺏을 때 고영(高穎)의 계책을 썼듯이 추수(秋收) 때를 헤아려 은밀히 군마를 징발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엄습하면, 저들은 군사를 모아 수비하느라고 농사철을 놓쳐 버리게 된다. 또 강남에는 띠나 대로 지은 집과 쌓아둔 낟가리가 많은데, 몰래 행인을 보내어 바람결에 불을 놓고, 저들이 수리하기를 기다려 다시 불사르곤 하면 몇 해가 못 되어 재물과 기력이 다 소진되어, 자리를 마는 것처럼 쉽게 점령하는 형세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금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이 비록 사냥을 좋아하여 군졸들도 모두 육식을 하고 있지만, 또한 농사를 지어 그 살림살이를 보태고 있으니, 도내(道內)의 정병 2,3천 명을 얻어 살찐 말을 타고 두꺼운 옷을 입고 비옷을 갖추어 매양 추수할 즈음에 불시에 엄습하여 그 집을 불사르고 곡식을 짓밟아 버리곤 하기를 몇 해 동안만 하면 저 적의 소굴은 거의 소탕될 것이라.’ 하는데, 나 역시 생각하기를, 북방이 비록 일찍 추워져서 가을비가 무섭다고는 하나, 살찐 말에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을 뽑아 위에 말한 사람의 계책과 같이 실행하면 무슨 큰 폐단이 있겠는가. 저들은 장차 소굴을 잃어버리고, 북방은 평안하고 조용해질 것이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울러 참작하여 가부를 아뢰라.” 하였다. 《유편서정록(類編西征錄)》이하 동.
○ 이에 앞서 찬사(贊事) 신개(申槩)가, “이 오랑캐를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는데, 임금이 신개의 의논을 따르려 하였다. 그러던 참에 이천(李蕆)의 글을 보자, 도승지 신인손(辛引孫)과 좌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신개의 집에 나아가 비밀리에 의논하게 하였더니, 신개가 12조목을 상신(上申)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사목(事目 공사에 관한 규칙)을 쓰게 하여 이천에게 유시하기를, “첫째, 계축년 때처럼 크게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한 번은 할 수 있으나 두 번은 곤란하므로, 북호(北胡 북쪽 오랑캐 땅)의 일은 경에게 일임(一任)하니 도내의 정병 1백여 명이나 1천여 명을 뽑아 적의 소굴을 수색하되, 혹은 드물게 혹은 자주하여 무시로 군사를 보내어 강을 건너 들어가, 산과 들을 사냥하면서 칠 것처럼 하면 저들은 반드시 농사를 폐지하고 방비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저들이 군사를 모으면 우리는 문득 군사를 헤치고, 이렇게 하기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면 저들이 반드시 마음이 헤이해질 것이니, 이때에 우리가 몰래 습격하면 거의 뜻을 이룰 것이다.
둘째, 무시로 군사를 보내되 여름철에는 부방군(赴防軍)의 수가 적을 것이니, 남도(南道)의 군졸을 징용하고, 얼음이 얼 때에는 남도의 군사에다 부방하는 자도 더 많을 것이니, 반드시 남도에서 아직 징발하지 않은 군졸을 모조리 징발한 뒤에 군사를 움직이겠느냐. 남도의 아직 징발하지 않은 군사는 쓰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셋째, 나는 초목이 아직 시들지 아니하여 말을 먹이기에 편리한 때에 비로소 군사를 내어 일을 행하려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고. 깊숙이 들어가 토벌하되 밭에 있는 곡식을 짓밟고, 마당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불사르고, 그들의 집을 헐어 비리고, 마소를 잡아온다면 우리는 한 명의 오랑캐를 보지 못하고 돌아와도 무방하다. 우리 기병이 잇따라 그들의 소굴 근처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저들이 알면 반드시 무서워서 편안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우리를 침략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하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느냐. 대거 출동하려면 적의 소굴을 알지 않으면 안 되니. 만약 소굴을 모르고 함부로 대부대를 동원하였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와 중국이 그 소식을 듣는다면 비웃음을 사지 않겠느냐. 그러니 모름지기 그들의 소굴을 알아낸 뒤에 군사를 내어야 할 것인데,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알아내겠느냐.
넷째, 경은 이러한 조건하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옳으냐그르냐, 더디 할 것이냐 빨리 할 것이냐, 혹은 또 다른 계책이 있느냐 하는 것을 자세히 생각하고 비밀히 아뢰라.” 하였더니, 이천이 그 대략을 올려 아뢰기를, “내리신 교지(敎旨)를 받자옵고 각 고을에 공문을 띄워 병마(兵馬)를 조사 검열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농삿 달이 되어 열병(閱兵)에 알맞지 않사오나 야인의 기세가 몹시 왕성하여 화가 눈앞에 있사오니, 이야말로 뜰 앞에 있는 도적이니, 방어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비록 군사를 움직이어 토벌하지는 못한다 치더라도 우리 군사를 훈련시켜 우리의 강토를 튼튼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적이 국경 근처에 이르러 여러 날 머물러 있사온데 그들의 속셈을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지금 나라가 한가하여 안으로는 염려할 만한 일이 업사온데, 적이 국경 근처에 있어 밖으로 걱정할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금위(內禁衛)와 별시위(別侍衛) 갑사(甲士)로서 용감한 계략이 있는 자를 뽑아 7월 보름 지나 창성(昌城) 이북 6고을에 각각 6명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또 화포 교습관(火砲敎習官) 6명을 보내되, 사람과 말을 골라 탈 만한 말 1백여 필을 각 관원에게 나누어 주어 기르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가을 7월에 이천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경의 회답을 보고 경의 포치(布置)의 적절함을 알았다. 그런데 군사를 움직이어 적을 물리칠 적에는 먼저 누가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관하(管下)가 몇 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라야 군사를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소굴을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행하여서는 우리 군사에게 헛수고만 시키고 공은 이루지 못할 것이다. 경이 먼저 척후병(斥候兵)을 보내고 뒤에 대군을 출발시키려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먼저 나간 척후병이 저들을 만나는 족족 모조리 잡아서 길잡이로 삼는다면 괜찮으나, 만일 10명을 발견하였는데 9명만을 잡고 1명이 달아났다면 어찌 그 추장에게 알리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일의 성패는 반드시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동도이불화(童都伊不花)의 말을 믿어도 좋을 것 같으나, 그가 귀순한 지 2년밖에 안된다. 또 우리나라 체탐자(體探者)가 다시 잡히게되면 저들이 우리의 상황을 알게 되므로 반드시 방비의 계책을 할 것이다. 이만주 등이 아직도 옛 소굴에 있는지 없는지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으며, 나 역시 그 중요한 내용을 잘 모르므로 다시 한두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지략이 있고 용맹한 사람 2명을 뽑아 체탐하게 하되 낮에는 산림 속에 깊숙이 숨어 있다가 밤을 타고 산을 따라서 가면 적의 소굴이 있는 곳을 알아낼 것이라.’고 하나, 이에 앞서 체탐자가 다시 잡히면 이야말로 적이 귀를 기울이고 엿볼 때이니, 나는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대군이 출발할 때에 먼저 척후 기병 수백 명을 보내어 곡식을 짓밟고, 살림집은 불사르지 않고 급히 돌아오면 저들은 반드시 다시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마음 놓고 있을 것이니, 그때에 대군이 뒤따라 와서 몰래 그 소굴을 포위하면 반드시 적을 모조리 잡을 수 있으리라.’ 한다. 그러나 척후 기병이 날치고 다니는데, 달아났던 도적이 며칠 사이에 제집에 돌아와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또 어떤 이는, ‘건강하고 용맹한 보병을 한 대오마다 5ㆍ60명씩으로 하여 3대오 나누어 강을 건너가, 8백여 리의 땅을 낮에는 숨고 밤에는 행군하여, 깊은 수풀 속에 잠입하여 높은 데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면, 반드시 적의 기병이 보일 것이니, 그를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와 길잡이로 하면 될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장사(壯士) 수십 명을 몰래 보내어 가까운 수풀 속에 숨어서 그들의 밭을 엿보게 하면, 반드시 추수하는 사람을 발견할 것이니, 그를 잡아 가지고 돌아와 길잡이로 삼으라.’는 등 의론이 분분하여 꼭 들어맞는 생각을 얻을 수가 없었다. 나도 반복하며 지혜를 짜 보았으나 지당한 의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옛사람이,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니, 경은 오랫동안 서쪽 땅에 있었으므로 그럴 만한 형편을 잘 알 것이다. 내가 경에게 일방적으로 위임한 것은 좋은 성과를 보고자 함이다. 나는 비록 그 형편을 터득하지 못하였지만, 경은 반드시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만약 할 만한 기틀을 얻으면 낱낱이 곧 아뢰라.” 하였다. 이천(李蕆)이 말씀 올리기를, “적의 소굴의 탐색 및 군사를 일으킬 날짜와 시간, 도로 등에 관하여는 체탐 나갔던 사람과 동도이불화(童都伊不花) 등에게 따져 물었으나, 이만주가 지금 오미부(吾彌府)에 있는지 혹은 올라산성(兀剌山城)으로 옮겨 들어갔는지 모두 확실히 알지를 못하옵고, 그 오미부(吾彌府)로 향하는 길은 하나는 강계(江界)로부터 파저강(婆豬江)을 건너 바로 오미곶(吾彌串) 동구(洞口)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이산(理山)으로부터 파저강을 건너 올라산 동쪽을 경유하여 오미부의 서쪽으로 들어가고, 또 하나는 이산으로부터 파저강을 건너 올라산 남쪽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꺾어 들어가는데, 적어 오미부에 있다면 세 길을 경유하여 갈라서 들어갈 것이요, 만이 올라산에 있다면 대군이 오미 등지로 들어가게 되면 적이 반드시 미리 알아차리고 도망쳐 흩어질 것이 염려됩니다. 다시 사람을 보내어 비밀히 탐색하게 하고자 하오나, 그렇게 하면 적이 우리의 탐색을 알아차리고 반드시 파수(把守)를 세울 것이 분명하니, 전번과 같이 잡힐까 두렵습니다. 체탐자(體探者)의 말이 만약 변두리의 한두 집이라면 몰래 들어가 사로잡아 오겠다고 하오나, 신 역시 반복해서 생각하옵건대, 야인이 이 추수 때를 당하여 멀리 도망쳐 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옛집을 옮겼다 하더라도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오니, 곧 적의 우두머리의 거처를 찾아내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야인을 사로잡아 길잡이로 삼아야 큰 계획을 성공할 수 있겠습니다. 강계에서 이틀 길 거리에 오자치(吾自峙)가 있어 세 집이 살고 있는데, 오미부(吾彌府)에서는 90 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산에서 이틀 길 되는 곳에 고음한리(古音閑里)가 있어 두 집이 살고 있으며, 오미부에서는 하루 길의 거리인데, 두 동네가 다 외따르고 사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8월 10일경에 정병 5ㆍ60명을 보내되 체탐자를 거느리고 밤에 습격하여 야인을 잡아다가 우두머리와 그의 무리들이 있는 곳을 두들겨 물어 가지고 8월 20일께 다시 군사를 일으켜 치는 것, 이것이 계책의 하나입니다. 5월에 체탐자가 잡힌 이후에는 다시 사람을 보내지 않고 이렇게 편안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어 그들에게 의심을 주었는데, 8월에 이르러 조심성 있고 용감한 장사 3ㆍ4명을 뽑아 보내어 낮에 산에 올라가서 오미부 동구(洞口)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살펴보고 만약 사람이 안심하고 살고 있으면, 깊은 곳의 큰 둔영도 반드시 그럴 것이니, 8월 중순에 군사를 내어 급습하고 우선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어 그 머물러 있는 곳을 쳐서 곡식을 짓밟아버리고, 집들을 불사르고 노획한 것을 가지고 곧 돌아와 사졸을 휴양시키다가, 때를 보아 다시 쳐들어가면 저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될 것이오니, 이것이 또 하나의 계책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이 두 가지밖에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용할 군사는 기병 2천 5백, 보병 5백, 도합 3천을 써야 하옵고, 나누어 진격하는 길은 응당 세 길을 경유하게 되는데, 만약 적이 올라산성(兀剌山城)에 있으면 임시로 형세를 바꾸어, 8월 20일 이후 초목이 다 말라서 말먹이기 편리한 때에 새벽달이 밝은 밤을 이용하여 가는 것도 편할 것입니다. 계절이 몹시 추운 때도 아니어서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알맞고 어울리는 때입니다. 다만 큰물이 채 마르지 않았는데 빗물이 더하면, 파저강(婆豬江)을 건너기가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8월 20일 후와 9월 초순ㆍ중순 등 세 번 중에 길한 때를 골라, 그때의 형편에 따를까 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회답하여 유시하기를, “이제 경이 올린 글을 보고 경의 포치(布置)가 좋음을 알았다. 그러나 의논하는 이의 말이, ‘오자참(吾自站)과 고음한(古音閑) 두 곳은 인구가 많지 않고,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마는, 우리 군사가 진격하여 포위했을 때에 저들 중에 도망하는 자가 있거나, 혹은 멀리서 바라보는 자가 있으면 우리 군사가 며칠 동안 머뭇거릴 때에, 적이 미리 알고 도망쳐 버리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니, 대군이 전진하면서 먼저 척후 기병을 보내어 두 곳을 갈라서 포위하고, 적을 사로잡아 그를 길잡이로 하여, 밤에 불시에 적의 우두머리의 거처를 급습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만약 적을 잡지 못하더라도 대군이 산과 들을 달리면서 사냥하여 시위(示威)하고 돌아와도 무방할 것이다. 저들도 대군이 사냥을 하면서 산과 들을 달리면, 응당 의심스럽고 두려워 안절부절 못할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먼저 척후를 보내어 적을 잡아 그 우두머리의 소굴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상책이나, 적을 잡지 못하더라도 대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그들의 곡식을 짓밟고 집을 불사르는 등, 거듭 이렇게 하면 저들은 반드시 곤궁에 빠질 것이니, 비록 한 명의 오랑캐를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도 이 역시 무방하다.’ 하며, 또 어떤 이는, ‘한꺼번에 두 곳을 함께 포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씩씩하고 용감한 기병 5ㆍ60명을 뽑아 밤을 이용하여 진군하여 사람이 적고 외딴 곳을 포위하고, 저들 중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자가 있거든, 10여 기를 머물러 두고 산림 속에 잠복하여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모조리 잡아 가지고 온다. 이렇게 하면 적의 우두머리는 전혀 모를 것이다.’ 하며, 또 어떤 이는, ‘갈라서 두 곳을 포위하든지 혹은 한 곳을 포위하고, 가산(家産)과 곡식은 하나도 해를 주지 말고 다만 사람만 모조리 잡아 가지고 급히 돌아오면, 적이 와서 보고도 다른 곳에 간 줄 알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한결같지 않다. 내 생각에는 대군을 진군시키기 반 날쯤 앞서 척후 기병을 보내어 오자참ㆍ고음한혹은 오미(吾彌) 동구를 엄습하여, 만약 포로가 있으면 한두 명이라도 잡아서 길잡이로 삼아 길을 재촉하여 바로 적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으로 향하여, 불의에 그 우두머리를 습격하는 것이 상책이다. 옛사람이 말하였듯이 군사 행동은 귀신같이 빨라야 하는 법이니, 10일에 먼저 수십 기를 보내어 적의 무리를 사로잡고, 20일 후에 대군을 내어 저들로 하여금 미리 알고 몰래 도망치게 하는 것은 하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권도(權道)는 미리 마련할 수 없으며, 변고(變故)는 미리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경은 되풀이하여 깊이 생각해서 임기응변으로 잘 시행하라. 8월 20일 후 초목이 모두 마르고, 새벽달이 밝은 밤에 가는 것도 편하겠으나, 큰물이 채 마르지 않은 데에 게다가 비가 와서 물이 넘치게 되면, 20일 후 및 9월 초순ㆍ중순의 길한 날을 가려 동원하겠다는 것도,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의논하는 사람의 말이, ‘만일 9월까지 기다리면 북쪽 땅은 일찍 서리가 내리므로, 저들이 이미 곡식을 거두어 움 속에 간직했을 것이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 여름비가 많이 오면 가을에는 가무는데, 이번 장마로 보건대 8ㆍ9월경에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하늘이 하는 일이란 예측하기 어려우니, 경이 임기응변으로 군사를 동원하되, 만일 적당한 기회를 만나지 못하거든 꼭 금년 가을이 아니라도 좋으니, 천천히 만전의 계책을 생각하여 내년 봄에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박안신(朴安臣)에게 유시하기를, “계축년 이래로 연변 방어의 계책이 지극하지 않아, 파저강의 적이 해마다 잇달아 우리 국경을 침범하는데도 우리는 수년 동안을 꾹 참고 있으니, 적의 횡포는 더욱 심하여지고 방비의 곤란함이 정벌하기보다도 더 심하다. 이제 도절제사(都節制使)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도내의 정병 수천 명을 뽑아, 8ㆍ9월 사이에 몰래 그리고 자주 군사를 적지에 들여보내어, 기어코 적의 우두머리를 잡도록 하려 한다. 경은 이 뜻을 알고 이천과 한마음이 되어 일을 처리하라.” 하였다. 또, “대체로 군사에 있어서는 비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인데, 서울 안의 의논할 신하가 역시 한두 사람밖에 되지 않으니, 그대가 혼자서 생각하고 힘을 다하여 사목(事目)을 잘 계획하라.” 하였다.
이천에게 유시하기를, “첫째, 대군을 일제히 진군시켜 오자참ㆍ고음한ㆍ오미 동구의 적을 잡아 그에게 캐어물어서, 이만주가 만약 올라산성에 있다면 공격에 필요한 상황을 낱낱이 물어서 3천 명 군졸로써 할 만하면 하라. 만약 매우 험하여 3천 명 군졸로서는 공략(攻略)하기가 어려우면, 다만 파저강 근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적을 치고 돌아와, 뒷날 다시 대거 출동할 것을 도모하는 것도 좋다. 이제 3천 명의 군졸로서 지극히 험한 성을 포위하였다가, 끝내 성공을 못하면 적은 멀리 피할 것이니, 우리가 훗날 거사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공이 없게 될 것이니, 경은 임기응변으로 형세를 헤아리어 행하라. 둘째, 전에 도망해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만주가 이미 홀라온 땅에서 2ㆍ3일 길이나 되는 봉주(鳳州)에 옮겨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이만주가 과연 봉주에 옮아가 살고 있다면 끝까지 쫓아가 토벌하지 말고, 다만 파저강 등지 의 적의 무리들만을 토벌하라. 셋째, 이만주가 비록 요동(遼東) 근처에 이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성 근처가 아니라면 쳐도 무방하다. 이에 앞서 이미 중국 황제의 칙서가 내려 있으니, 그 소굴을 칠 때에 만약 나와서 물어보는 요동 사람이 있거든, 일찍이 칙지(勅旨)가 있었다고 대답하라. 넷째, 대군이 한 곳에 많이 모이면 진퇴가 곤란할 뿐 아니라 앞뒤가 서로 구원하기가 어려우니, 반드시 길을 나누어서 진격하되, 각 길마다의 군사는 부대(部隊)를 많이 만들어 지략(智略) 있는 자를 뽑아 패두(牌頭)로 삼고, 모든 부대와 부대와의 간격은 적절히 할 것이며, 성을 공격할 때에는 일제히 나아가지 말고, 여러 부대를 대기시키고 정예(精銳)를 뽑아 몰래 서로 다른 길을 따라 교대로 나아가 적을 공격하면, 적은 우리 군사의 많고 적음을 몰라 겁을 먹을 것이다. 다섯째, 경이 아뢰기를, 기병 2천 5백 명, 보병 5백 명이라 하였는데, 내 생각에도 기병은 그것으로 넉넉하다. 그러나 험한 길에는 보병이 으뜸이니, 경은 이 뜻을 알아 요령껏 보병을 증가하라. 여섯째, 만약, 오자참의 세 집과 고음한의 두 집을 잡거나, 혹은 오미 동구의 주민을 잡거든 거짓말로, ‘대군이 북쪽으로부터 이만주 등의 큰 부락을 습격ㆍ섬멸하고, 북쪽 요로에는 모두 척후를 두어 대군이 가다가 응당 여기에 이를 것이니 너희 무리는 움직이지 말라. 우리들은 남쪽으로부터 와서 북쪽으로부터 오는 대군을 맞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적에게 말하면 적이 도망치려 하여도, 반드시 북쪽으로 달아나 달리 계책이 없을 것이다. 일곱째, 계축년 정벌 때에는 잡은 장정을 곧 죽이지 않고 우리 경내에 돌아와 죽였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적을 잡으면 부녀자와 어린 것들을 제외하고는 살려둘 필요가 없다. 옛사람이 많이 죽이는 것을 경계한 것은, 무고한 백성으로서 도탄에 빠진 자를 말한 것이다. 이 놈들은 한놈 한놈이 강한 도적이 되어 우리 변경을 침략하려는 것이니, 그 죄가 차고도 남는데 어찌 천지간에 용서할 수 있겠느냐. 여덟째, 올라산성을 공략할 만하거든 성 밖에 보병이나 기병을 적당히 배치하고, 공격하기 쉬운 곳을 골라 화로를 갖추어 적들로 하여금 성 위에 나설 수 없게 하고, 보병 1천여 명에게 각기 포대(布袋)에 흙 7,8말을 담아 성 밖 한쪽에 쌓아 올리고, 그리로 올라가 돌격하게 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홉째, 이미 관찰사에게 밀지(密旨)를 전하였는데, 만약 의논을 같이한 일이 있으면 그 의논대로 시행하라. 열째, 적이 만일 작은 보루(堡壘)나 요새에 모여 있다면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데, 그때에는 모름지기 완석(碗石)을 쓰라. 그러나 그것이 무거워 짐바리에 싣기가 힘들어 사실상 소용에 안 닿는다면, 경이 다시 생각하여 멀리까지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아뢰라. 열한째, 군사에 관한 일은 멀리 앉아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요, 이런 여건들에 대하여서는 나도 그 가부를 잘 모르니 경도 억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옳은 것 그른 것을 생각하여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라.” 하였다.
이천에게 교시하기를, “장군이 지방에 있으면 앉고 서고 치고 찌르는 법을 삼령오신(三令五申)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권리까지도 도맡고 있다. 그러나, 임금의 신임이 미덥고 명령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전제할 수 있겠느냐. 준동(蠢動)하는 파저강의 도적이 홀라온을 핑계 삼아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백성들을 죽였으므로, 계축년에 장수에게 명하여 죄를 토벌해서, 그 간악하고 교활한 행동을 응징했으나, 저들은 아직도 그 죄악을 고치기는커녕, 잔학하고 악독한 짓을 더욱 마음대로 하여, 해마다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의 무고한 백성을 해치고 있으니, 내 마음이 몹시 아프다.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 임금의 원한을 풀어서, 여러 해 동안 쌓인 치욕을 씻게 하라. 만약, 제 한 몸의 안위(安危)만을 생각하고 나라의 큰일을 돌보지 않고서 늦장을 부려 시기를 놓친다든지, 혹은 적을 보고도 싸우지 아니하여 적에게 겁 많고 약함을 보여 변경의 걱정을 더하게 하는 것은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경이 이미 한 도의 권한을 맡고 평일에 지키고 있을 때에도 오히려 엄하게 임하였거늘, 하물며 강을 건너가서 적을 제어하는 마당에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는 위엄이 없겠느냐. 편장(褊將)과 비장(裨將)이하 항오(行伍)의 군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군령을 받드는 자는 상을 주고, 군령을 받들지 않는 자에게는 벌을 주어, 사사로운 일로써 법을 굽히지 말 것이며, 일시적인 형세에 따라 대국(大局)을 그르치지 말라. 삼갈지어다.” 하였다.
신개(申槩)가 아뢰기를, “죄를 토벌하는 데 있어서는 그 우두머리를 잡으면 거의 뒷걱정이 없어집니다. 전하는 말에, ‘풀을 뽑을 때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면 마침내 되살아난다.’ 하는데, 왕년에 북쪽을 정벌할 때 장수들이 오직 수급(首級)을 많이 올리는 데에만 힘써, 죽이고 뺏은 것이 늙은이와 어린 것들이 태반이었고, 비단 그 우두머리를 놓쳤을 뿐 아니라 장정도 얼마 못 잡았으므로, 그 조그마한 적이 지금가지도 병통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다시 그 우두머리를 잡지 않으면 그들의 원한이 더욱 깊어지고 그 계획이 더욱 다급해져서, 도망쳐 흩어진 무리를 모아들이고 와신상담(臥薪嘗膽) 하여 그 세력을 다시 떨쳐, 혹은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야인들에게 호소하여 서로 결탁하고, 그들을 꾀어 길잡이로 삼는다면 변방의 걱정이 전보다 더 심해질 것입니다. 북쪽 오랑캐의 정세는 이만주 한 사람만 없앤다면 일대가 아주 평온할 것입니다. 벌써 그 우두머리를 잡았던들 형세가 대를 쪼개 듯하여 항복을 했든지 쇠잔했든지, 하루아침에 결말이 났을 것입니다. 그 밖의 심질납노(沈叱納奴)의 무리도 땅강아지와 개미일 뿐 달래면 귀순할 것이요, 치면 쉽사리 섬멸될 것이므로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바라옵건대, 분명히 장수들에게 칙명을 내리시어 적의 우두머리를 잡는 사람을 으뜸가는 공으로 삼고, 그 밖의 평민이나 늙은이, 어린 것들을 잡은 것은 공으로 치지 않으면, 기필코 적의 우두머리와 그의 자손ㆍ아우ㆍ조카들을 잡아올 것입니다. 만일 한번에 하지 못하면 침범한 그때그때에 군사를 일으켜 끝까지 진격하여 그 부락을 전멸시키어 국위를 펴고, 북호(北胡)를 평안하게 하소서. 또 장수들이 분발하여 공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상벌에 달렸사오니, 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거나 죽인 사람은 벼슬을 5등 올리고, 그 자제(子弟)를 얻은 사람은 4등, 장정을 얻은 사람은 3등, 평민을 얻은 사람은 그 인원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벼슬을 올려주고, 역자(驛子)ㆍ염간(鹽干 염전에서 소금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ㆍ공사천구(公私賤口)로서 특별한 공이 있는 자는 부역을 면제하는 동시에 벼슬과 재산을 주고, 만일 싸움에 임하여 적을 대함에 있어 진퇴나 동작이 조금이라도 군령에 어긋나거든 군사들 앞에서 죽이고 용서하지 않게 하소서. 이것을 주장에게 다시 유시하여 상벌을 똑똑히 밝히고, 군사들에게 선포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다투어 용기를 분발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움에 나가게 하는 것도 우두머리를 잡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길 것이오나, 만약 올라산성이면 험준하여 날짜를 정해 놓고 빼앗기는 어려우므로, 반드시 여러 날을 포위하고 지키면서, 그들의 식량과 힘이 다하기를 기다려서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주장에게 명을 내리시어 모름지기 군사로 하여금 그 수비가 소홀한 때를 기하여 엄습하게 하면, 거의 군사를 지치게 하지 않고 빨리 공을 이룩할 것입니다. 토벌군을 떠나보내고 나서부터 몹시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니, 혹시 들리는 말에 북호가 벌써 군사를 띄웠다고 하니, 신에게는 몹시 걱정이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종서(金宗瑞)에게 글을 내려 비밀리에 유시하기를, “처음에, 부거(富居)와 경원(慶源) 백성이 모두 조정에 고하기를, ‘옛 경원 땅은 농사에 알맞고 또 강이 있어 지키기도 좋으니 옮아가 살게 해 주소서.’ 하였으며, 또 전대(轉對)하는 자의 말에, ‘옛날에 나라를 다스린 자는 국토를 넓히기를 힘썼으니, 공험(公險) 이남은 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계축년 겨울에 때마침 올적합(兀狄哈)이 관독(管禿) 부자에게 피살되어, 아목하(阿木河)에는 추장이 없었다. 그때 의논하는 신하들이 말하기를, ‘국토를 버려서는 안 되고 기회를 잃어서도 안 됩니다. 마땅히 강을 따라 진(鎭)을 설치하고 성을 높이 쌓으며, 군민(軍民)을 많이 살게 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지키게 하면, 방어하기 위하여 왕래하는 폐단도 없어질 것입니다. 만약, 명나라에서 추장이 없다는 말을 듣고, 혹시 다른 조치라도 취하게 되면 뉘우쳐도 때가 이미 늦을 것입니다. 전에 공주(孔州)는 성의 높이가 불과 한 사람의 키밖에 안 되었고, 주민도 4백 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십 년 동안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계획은 조금도 염려할 바가 없습니다. 다만, 후세에 기강(紀綱)이 해이해져서 변장(邊將)이 적임자가 아니면 어떻게 할까 그것이 염려될 뿐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태평하고 어지러움이란 서로 뒤바뀌는 것이요, 백대(百代)를 이어가는 천운이란 없는 것이 상리(常理)입니다. 마지막 세대(世代)에 이르러 파멸되는 것이 어찌 다만 변경의 일뿐이겠습니까. 그리하오니, 역시 논할 바가 못 됩니다. 자잘구레한 좀도둑의 침입은 영원히 끊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커다란 일을 못한대서야 되겠습니까. 참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란 많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거처가 우리나라와 불과 6ㆍ7일 여정이요, 또 반드시 파저강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니 어찌 마음이 떨리지 않겠습니까. 그러하오니, 그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했는데, 내 생각에도 경인년의 난리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이 혹은 아뢰기를, ‘공주(孔州)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곳이어서 수비가 극히 곤란하오니, 폐지해 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혹은, ‘경내 수백 리 의 땅은 버려 오랑캐에게 내어주는 것이 옳다면, 저들은 반드시 서로 거느리고 들어와 살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강토 안에 오랑캐가 사는 것은 안 된다. 곧 내어 쫓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하여, 이에 폐지하는 의논에 따랐던 것이다. 그 후 명나라가 공주 땅에 위(衛)를 건설한다는 풍문이 있어, 조정에서 크게 놀라 곧 경원부(慶源府)를 부거(富居)에 복구하였다. 이로써 말하건대, 태종께서 그 땅을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근년에 와서 올량합 수백 호가 야금야금 공주 등지에 침입하므로, 내가 그들을 내어 쫓고자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야인을 강제로 몰아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로 두어 어루만져 주는 것이 무방합니다.’ 했다. 신하들의 말이 이러한데, 태종께서 곧 쫓아내라는 생각에 비하여 어떠하고. 수십 년이 못 되어 야인의 거처는 반드시 두루 미치게 될 것이다. 요즘 장내관(張內官 명 나라의 내시)이 공주(孔州) 등지에 병영을 두고 머물러 겨울을 지내면서, 해동청(海東靑 송골매)과 토표(土豹 스라소니)를 잡아 가지고 돌아갔으며, 계속하여 아목하(阿木河)에는 추장이 없다. 전번에 풍문에 들은 말이 그러하였고, 오늘의 아목하의 일이 또한 이러하니, 야인을 제압하고 해동청을 잡는 것은 조정에서 하고자 하는 바이다. 만약, 추장이 없는 틈을 타서 〈중국이〉 여기에 위(衛)를 설치하여 야인을 위압하고 해동청을 잡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버렸으니 또 무슨 말로 청하겠느냐.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매우 내 마음에 든다. 만약, ‘태종께서 안 쓴 계책을 지금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태종께서 곧 쫓아내라고 하신 교시는 받들어 행하지 못하면서, 다만, 이런 말만 하는 것이 옳겠느냐. 하물며 태종께서 이미 이룩한 일을 지금에 받들어 행할 뿐임에랴. 만약, ‘용성(龍城)은 가장 좋은 요해(要害)의 땅이므로 이곳을 국경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베개를 높이하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용성을 국경으로 한다면 야인의 거주지도 용성을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며, 길주를 국경으로 한다면 야인이 사는 곳도 길주를 경계로 삼을 것이니, 이렇게 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용성 남쪽에 적이 침입할 길이 한둘이 아님에랴. 나의 본말(本末)을 취사(取捨)함이 이와 같으니 경도 잘 알 터이다. 지난해 9월의 일은 지세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진장(鎭將)에 사람을 잘못 썼던 소지이니, 가령 용성을 경계로 삼는다 하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관문을 감당할 수 없고 사면으로 싸워야 할 땅이다. 거주민이 반드시 그들에게 퍼져 있을 것이니, 이런 일이 반드시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인년의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에 의거하여 말하면, 오늘날에 있어서는 변방을 개척하는 것이 상책이 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뜻밖에 첫해에는 큰 눈이 내리고, 다음 해에는 큰 병이 돌아서 사람과 가축이 죽은 것이 많았고, 지난해의 적의 난리에는 사로잡히고 죽은 자도 적지 아니하였다.그러나, 내 생각에는 커다란 일을 이루는 사람은 애초에는 반드시 순조롭지 못한 일이 있어도 훗날의 공효는 반드시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또 염려되는 일이 있어 글로써 경에게 이르노니, 오늘날 적을 방비하는 일은 전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적이 오지 않으면 모르되, 오게 된다면 반드시 천명, 만 명 떼를 지어 제멋대로 날뛰어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성을 지키기만 하고 대응책을 쓰지 아니하면, 적의 마음을 더욱 조장(助長)하여 뒷날의 화가 끝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응징하여 뒷날의 화를 일으킬 마음을 막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요즘 적의 난리를 알려온 자가 정월이라고도 하고 5월이라고도 하며, 또 8,9월이라고도 하고 얼음이 얼 때라고도 한다. 혹은 홀라온이라고도 하고, 혹은 수빈강(愁濱江), 혹은 흑룡강(黑龍江)이라 하며, 혹은 수천 혹은 수만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분분한 이야기가 없었던 해가 없으므로 듣는 사람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여서도 안 되지만, 참말로 생각하여 사시(四時)를 막론하고 남도(南道)에서 징발하는 군사를 수천 명에나 이르게 하고 또 성을 쌓는 군졸을 2ㆍ3만 명이나 두니,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면 10년이 못 되어 재력과 민력이 다하여, 백성들이 원망하고 노하여 도망쳐 흩어질 것은 필연의 이치이다.
함길도(咸吉道)는 땅이 좁고 백성이 적어 부역이 본래 가벼우니, 선왕께서 백성을 사랑한 정치가 지극하였음에 깊이 감격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대(代)에 와서 이익 되는 정치는 듣지도 못하고 시끄러운 일만 날로 많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또 두려워하는 바이다. 원(元) 나라의 위효문(魏孝文)은 비록 오랑캐라 하지마는, 성품이 인자하고 효도가 지극하고 자애로우며 착하여, 문무를 갖추고 덕화(德化)가 널리 미치어 진실로 얻기 어려운 어진 임금이었다. 그의 말에, ‘선조께서 오로지 무(武)에만 힘쓰고 교화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교화의 책임이 나에게 있다. 그러므로 오랑캐 말과 오랑캐 의복을 금지하고 낙양(洛陽)으로 서울을 옮겨, 점차로 옛 풍속을 고쳐 옛 주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숙(康叔) 시대를 본받고자 한다.’ 하였다. 옛날 역사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겼으나, 태자와 공훈 있는 신하들이 모두 끝내 그러하지 못하였으므로, 신하와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였다. 그 후로 국운이 날로 쇠퇴해 갔으므로 임금이 매양 이르기를, ‘내가 낙양에서 이룩하지 못하였노라.’ 하였는데, 임금이 죽은 뒤 끝내 국운을 떨치지 못한 채 마치었다. 그의 뜻이 자기가 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여겼겠지만, 그 공효가 이와 같았으니 내가 이를 생각할 때마다 진실로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해진다. 전날 경원(慶源) 사람 김귀남(金貴男)이 아뢰기를, ‘적의 무리가 이 뒤에 더욱 많이 이를 터이니, 큰 성, 작은 보로 할 것 없이 지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이 사람의 말로 미루어 보면 네 고을의 인심이 그 땅에 정착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진(鎭)을 처음 세울 때에 하경복(河敬復)과 심도원(沈道源)이 회답하여 아뢰기를, ‘이징옥(李澄玉)과 송희미(宋希美)의 말이, 이런 군대를 가지고 항복받기 무엇이 어려우며 어찌 도적을 두려워 하리오 하였고, 그 후에 또 들으니 경원 등지의 군사와 말들이 정예롭고 강하여 동방의 으뜸이 되는데, 장사(將士)가 어찌 쓸데없는 일을 한탄 하리오 하였고, 또 듣건대 경원부가 부거(富巨)에 있을 때에 적이 강을 건너 여러 날 동안 들어와 있는 것을 우리들이 추격하였는데, 한두 식(息)에 불과하였으므로, 적이 태연히 행하고 강을 건너 돌아갔다고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돌아가는 길이 몹시 험난하여 우리 군사가 강으로 추격하면, 적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 하여 내가 매우 기뻐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지키기에도 부족하거늘, 하물며 뜻을 펴기를 바랄쏘냐. 네 진(鎭)을 세우기 전에 남도(南道) 군사가 부거(富居)로 가는데 길이 오늘보다 가깝고 군사의 수효는 오늘보다 적었으나, 곡산(谷山)의 연사종(延嗣宗) 등이 아뢰기를, ‘국경을 방비하러 가는 군사 중에 말을 팔고 걸어서 오는 자가 10에 8ㆍ9나 되니, 심히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면 어떠한가. 하물며 해마다 성을 쌓는 부역이 있음에랴.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처음에 새 고을을 건설할 때에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자못 같지 않았던 것은 경도 아는 바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서북쪽의 압록강과 동북쪽의 두만강에 어찌 가볍고 무거움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번진(藩鎭)을 건립하여 국경을 튼튼히 하는 것은 의(義)를 다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의논을 가벼이 여기는 자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하여 대신의 말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나 내가 유독 깊이 염려하는 것은 대개 성을 쌓는 일을 늦출 수 없고 민폐도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적의 변고를 와서 고하는 것을 헛말이라 할 수 없고, 모두 사실이라 할 수 있으니, 남도의 군사를 많이 징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재물이 다하였으니 무엇을 입히며, 식량도 다하였으니 무엇을 먹일 것이며, 힘이 다하였으니 어떻게 할 것이며, 모두 도망해 버렸으니 누구를 부리겠는가. 하물며 귀화하여 언어가 다른 사람이 대부분 요역에 종사하고 있으니, 더욱 불쌍히 여겨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할 것이다. 내가 매양 생각하여도 계책이 없으니 어찌하랴. 내가 구중궁궐(九重宮闕) 안에 깊이 들어앉아서, 도내(道內)의 일은 멀리서 헤아려볼 뿐이므로 그 사정을 자세히 모르지만, 경은 이런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지 오래이니 네 진을 건설하는 것이 장차 공효가 있겠는가. 백성들의 재력이 반드시 다하겠는가.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성하겠는가. 네 진의 민심이 장차 편안해지겠는가. 야인의 변이 결국 잠잠해지겠는가. 옛날 도내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헛소문을 지어내어 인심을 놀라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즘에 일이 전보다 커지고 백성이 전보다 피로하니 더욱 걱정이 되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그런 일이 없겠는가. 경은 잘 생각하여 은밀히 아뢰라.” 하였다.
김종서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어찰(御札)을 뵈옵고, 밤낮으로 외고 생각하기를 여러 날을 하여,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지극히 인자한 마음과 나라를 걱정하시는 원대한 헤아림을 몸으로써 느끼옵고 감격을 금할 길이 없사오나, 신이 재주가 용렬 하와 임금님 생각에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 몸둘 바 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가만히들은 바에 의하면, 위엄과 덕을 널리 입히어 나라를 백 리 넓힌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주 문왕(周文王)보다 더한 이가 없고, 무력으로써 땅을 천리를 개척한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한 무제(漢武帝)보다 더한 이가 없습니다. 또 사리에 어둡고 나약하고 서툴러서, 날로 그 땅을 축내어 끝내 떨치지 못한 유선(劉禪) 따위는 본래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덕으로써 나라를 개척한 이는 얻기는 쉬우나 잃기는 어려운 법이요, 힘으로서 땅을 개척한 자는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운 것이오니, 일은 같으나 방법이 같지 않습니다. 그 얻음과 잃어버림, 쉽고 어려움의 차이는 도(道)와 부도(不道)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도가 있으면 비록 저들의 경계에서 다툰다 하더라도 가하거늘, 하물며 우리 강토를 되찾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또 듣기에 고려 태조가 힘으로는 능히 삼한(三韓)을 통합하였으나, 위엄이 북방에 미치지 못하고 다만 철령(鐵嶺)을 경계로 삼았고, 예종(睿宗) 때에 이르러서는 모신(謀臣)들의 슬기를 모아 오랑캐를 꾀어서 죽이고 9성을 설치하였었는데, 비록 잠깐 얻었다 도로 빼앗겼으므로 이익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경계와 판도가 분명하여져서 후세에 남긴 혜택이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는 하늘이 주신 성무(聖武)로서 북방에서 일어나시어, 대동(大東 우리나라)을 다 차지하여 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북으로는 두만강에 닿아서 공주(孔州)ㆍ경성(鏡城)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ㆍ북청(北靑)ㆍ홍원(洪原)ㆍ함흥(咸興)의 7고을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동방에서 나라를 연 이래로 일찍이 보지 못한 성업(盛業)이었습니다. 또 태종께서 나라를 이어 도(道)가 정치에 젖어, 잘 다스려진 지 이미 오래되어 오랑캐를 백성으로 교화하고, 풍속을 개선하여 나라를 굳게 지켜 왔으니,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태평한 지 오래되어 지키는 신하가 방어를 잘못하여, 경성(鏡城) 이북이 적의 소굴에 빠졌는데, 태종께서는 이를 진념(軫念)하시어 우선 경원(慶源)을 부거(富居)에 두어 넌지시 복구의 뜻을 표시하였사오니, 오랑캐를 물리치고 옛 강토를 회복하는 것은 전하께서 뒤를 이어 하실 일입니다. 앞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아뢸 적에 경원을 줄여서 용성에다 붙이면, 북방의 포치(布置)가 알맞게 되고 민폐가 가시리라고 하였으나, 전하께서 생각하시기를 조종이 지켜온 한 자 땅, 한 치의 흙도 버릴 수 없다고 고집하시고, 여러 사람의 의논에 부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시어, 그 후 그 의논이 다시 일어나 시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에 소신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여, 영북진(寧北鎭)을 석막(石幕)에 두어서 국경을 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제 북방에 있어서 어느 곳이나 보지 못한 것이 없고, 어떤 말이고 듣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부거와 석막은 모두 국경을 삼을 곳이 못 되오며, 용성도 관새(關塞)의 땅이 아닙니다. 의논하는 자가, ‘용성이 진(秦) 나라의 함곡(函谷)과 같아서 좁고 험하기 비길 데 없어, 여기서 지키면 오랑캐가 감히 우리를 향하여 간교를 피울 수 없으며, 우리 백성이 베개를 높이하고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이것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막을 만한 물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험한 진을 설치할 것이며, 의거할 만한 산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튼튼한 요새로 삼겠습니까. 참으로 이른바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면으로 싸워야 할 곳입니다. 만약, 네 고을의 요충지로써 큰 진(鎭)을 만들어 네 고을의 응원으로 삼는다면 괜찮지만, 만일 의논하는 자의 말대로 용성으로써 경계로 삼았다가 오히려 적에게 침입당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면, 뒤에 의논하는 자는 반드시 마천령(摩天嶺)을 경계로 삼으려 할 것이요, 그래서도 오히려 면하지 못하면 철령을 경계로 삼고야 말 것이오니, 전조 (前朝 고려)의 일을 거울삼을 만하옵니다. 신이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역대의 제왕이 왕업을 처음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유(劉)씨의 한(漢) 나라가 풍패(豐沛)에 대하여, 이씨의 당 나라가 진양(晉陽)에 대한 것으로써 볼 수 있습니다. 선조의 땅을 버리고 지키지 않으며 창업의 땅을 잊어버리고 회복하지 않는다면, 선조가 이룩하여놓은 일을 잘 이어받을 후손이 있다고 하겠으며,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여 그 공렬을 잇는다고 하겠습니까. 또 용성을 경계로 삼는 것은 불의(不義)한 것이 한 가지요, 불리(不利)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조의 강토를 줄이는 것이 한 가지의 불의요, 산천의 험함이 없는 것이 한 가지 불리함이요, 수비의 편리가 없는 것이 두 가지의 불리입니다.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면 한 가지의 대의(大義)와 두 가지의 큰 이익이 있습니다. 왕업을 일으켰던 땅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대의이오며, 긴 강의 험함에 의거하는 것은 한 가지의 큰 이익이요, 수비에 편리함이 있으니 두 가지의 큰 이익입니다. 그러니 용성을 경계로 삼고자 하는 것은 모자라는 생각입니다. 하늘은 도(道)가 있는 자를 도와서 원흉(元兇)은 자멸하고, 천한 오랑캐는 스스로 쫓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기회를 타고 포치(布置)를 알맞게 하여 한명의 군사도 힘들이지 않고 한 사람의 백성도 다치지 않고서 옛 강토를 회복하고, 거기에 네 고을을 두면, 선조의 뜻과 업을 잘 계승하여 그 공렬을 더욱 빛냈다고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또 듣기에, ‘큰일을 이룩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폐단을 돌보지 않으며, 큰 업을 세우는 사람은 작은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다.’ 합니다. 일이 크면 폐단이 반드시 생기고, 업이 크면 해가 따르는 것은 다만 오늘의 일만이 아니오니 옛날부터 그러하옵니다. 이번에 네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과대(誇大)함을 좋아함이 아니요 선조의 땅을 회복하는 것이오니,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사오며, 선왕의 업을 잇는 것이오니 이보다 더 중한 의(義)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조그마한 폐단을 염려하며 작은 해를 걱정하오리까. 하물며 첫해의 눈이 비록 많이 왔다 하오나 마소가 심하게 손실된 바 없고, 다음해의 병이 비록 많았다 하오나 백성이 그다지 많이 죽은 것이 아니옵니다. 만약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다면 농우(農牛)와 전마(戰馬)가 어디에서 나왔으며, 군졸이 많고 장정이 남아돌아가 오히려 지난날의 수효에서 감소된 것이 없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그 말이 실정보다 지나쳤음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지난해의 일로 말하면 그 화가 비록 중했다 하나, 흥부(興富)의 죽음과 승우(承祐)의 패군(敗軍)과 용성의 대패에 비하면 참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9년 동안의 홍수와 7년 동안의 가뭄이요(堯)임금과 탕(湯)임금의 성덕에 손실을 줄 수 없었고, 40만의 흉노(匈奴)나 50만의 돌궐(突厥)이 한(漢)나라와 당(唐) 나라의 큰 공에 무슨 해를 끼쳤습니까. 하물며 1년도 못 되는 재앙과 수천도 못 되는 도적이 무엇이 걱정이며 두렵겠습니까.
신이 또 듣건대, 옛날의 호걸은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고, 천리의 긴 둑을 수리하여 하수(河水)를 막았으며, 또 그 일을 하는 데 백성들이 10년이란 오랜 세월을 보내었으니, 이것은 좀 지나친 일이라 하겠사오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그 혜택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이 말갈(靺鞨)과 접하고 있어, 여러 번 침략을 받음이 전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으니, 성곽의 수리와 갑병(甲兵)의 훈련이 마땅히 다른 도에 비하여 백배나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내년에 또 한 성을 쌓아, 성을 쌓지 않는 해가 없다 한들 의(義)에 해로울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번 부거(富居)를 경계로 했을 적에는 아직 몇 자의성도 없었습니다. 국경의 고을이 이러하였으니 하물며 용성 이남의 고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변방에 대비하는 계책이 매우 허술하여, 중국 사람이 비웃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 전하께서 진념하시고 모신(謀臣)이 의견을 바쳐 백성들이 자식처럼 모여와서 이미 회령(會寧)에는 성을 쌓았고, 또 경원(慶源)에도 쌓았는데 역사(役事)가 시기를 잃지 않고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갑산(甲山)과 경흥(慶興)은 스스로 수축(修築)하여 모두 보배로운 성을 가지고 있으니, 북방의 걱정이 10중에 7ㆍ8이 이미 사라졌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은(殷) 나라가 귀방(鬼方)을 치는 데 3년이 걸렸고, 주(周) 나라의 수자리를 살던 자들이 말하기를 ‘내가 보지 못한지가 지금껏 3년이나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어느 달에나 내가 이기고 돌아갈꼬.’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은나라와 주 나라의 백성들은 오래도록 수자리를 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뒤 오랑캐들이 더욱 세력을 펴서 정벌과 방비가 더욱 확대되었으니, ‘돌아오니 백발이 되었는데 도로 수자리 신세로다.’ 하는 시로써 알 수 있습니다. 비단 중국뿐이 아니오라 고려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철령을 국경으로 삼았다가, 뒤에는 쌍성(雙城)을 경계로 삼아, 하도(下道)에서 낸 군사를 보내어 이곳에서 수자리 살게 하였으므로, 수자리는 늙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부자가 서로 알지 못하였으니, 그 길이 얼마나 멀며 수자리를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를 알 것입니다. 오늘의 일로 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갑인 년 봄부터 병진년 사이에 네 진을 설치한 이후로는, 홍원(洪原) 이남이 편안하고 조용해졌습니다. 다만 지난해 겨울에 원근의 야인이 동요하려 하므로 위엄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북청(北靑) 이북의 관하 소속 군졸이 아직 교대 휴가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처음에는 홍원(洪原)ㆍ함흥(咸興)ㆍ정주(定州)ㆍ예원(豫原) 네 고을의 정규군 5백 명을 내어 겨울 방어에 임하게 하고, 다음엔 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덕원(德源)ㆍ용진(龍津)ㆍ안변(安邊)ㆍ문천(文川) 고을의 5백 명을 내어 봄에서 여름까지 지키게 하였으니, 다만 두 번만 나가면 그만입니다. 신이 계축년 겨울에 명을 받은 이래로 부거와 갑산에는 모두 유방군(留防軍)이 있고, 남도의 번상(番上)하는 자와 번휴(番休)하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으므로, 말이 죽고 군졸이 쓰러지는 것을 신이 목격하였으니, 오늘의 일로 말씀드리면 그 노고에 본래 차이가 있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고을을 옮기는 것은 큰일입니다.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것은 옛사람이 깊이 염려한 바이온데, 하물며 조용히 살고 있는 우리 백성을 저 늑대와 이리의 땅으로 옮기는 것이겠습니까. 원망하고 싫어하지 않는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성상의 계획이 신묘하시어 한 사람의 백성도 벌주지 않고서 수만이나 되는 무리가 겨우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새 땅에 다 모여들어, 대사가 쉽게 이룩되고 새 고을이 길이 세워졌으니, 저 잠깐 동안 성공하였다 곧 실패한 것과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뜻밖에 부박한 무리가 첫해에 큰 눈이 왔느니, 다음 해에는 큰 병이 돌았느니 하여 서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어 인심을 선동 현혹케 하여, 편안히 살고 있는 자가 움직이려 하고 머물러 있는 자가 가고자 하여, 거의 큰일을 저해하여 전공(前功)을 망칠 뻔하였사오나, 다행히도 전하의 명쾌하신 단안에 힘입어 근거 없는 말은 저절로 사라지고 민심은 자연히 안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지극히 인자하신 은혜가 백성에게 깊이 스며들어, 추워하는 자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 백성이 일에 시달려도 그 피로를 잊고, 군졸이 수자리 살기에 지쳐도 그 괴로움을 잊었으니, 옛사람이 말한바, ‘기쁘게 하여 백성을 부리면 백성이 그 괴로움을 잊는다.’ 함이 이것입니다. 오늘 네 고을을 건설함은 오로지 북방에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요, 오늘 성을 쌓는 것은 울타리를 튼튼히 하는 것이며, 오늘 변경을 지키는 것은 역시 저 도적을 막아 우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될 일에 가벼이 인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요, 과시하거나 공로를 좋아해서 병력을 다하며 무력을 남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백성이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것이니, 이 뜻을 모르고 망령되어 원망을 일으키겠습니까. 어떤 백성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령과 경원에는 이미 성을 쌓았으니, 앞으로 마땅히 쌓아야 할 곳은 종성과 용성인데, 오직 이 두 성이 건축되면 우리들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오니, 이 말을 미루어 보면 다른 백성의 마음도 따라서 알 것입니다. 지난해의 경원의 화는 참혹하다 하겠사오나,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흩어진 자는 모이고 간 자는 되돌아오며, 농사에 힘쓰고 생업을 즐기어 평일과 다름이 없었으니, 오늘의 일로써 이를 보면 뒷날에 목숨을 바치고 떠나가지 않을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혹 날카로운 기세를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적진에 나아가 능히 적의 머리를 베는 자도 있으니, 지난날의 사세로써 이를 돌이켜 보면, 훗날 윗사람과 친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는 것도 기약할 수가 있습니다. 경원 한 고을의 일로써 미루어 보면 세 고을 군민의 마음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북방에 있어서 야인의 실정을 잘 보았사온데, 그들은 비록 아비와 아들 사이일지라도 욕심이 나면 서로 죽이고 해치기를 원수와 다름없이 하니, 비록 매일 천금을 허비하더라도 그 마음을 맺기가 어려우며, 혹시 이익으로써 맺어 놓는다 하더라도 그 이익이 다하면 또 독살을 부립니다. 그러하오니 밖으로는 회유하는 은혜를 보이고 안으로는 방어의 태세를 갖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형세는 저절로 강해지고 적의 형세는 저절로 꺾일 것입니다. 저절로 강해진 세력으로써 저절로 꺾인 틈을 타면 우리는 뜻을 펴게 될 것입니다. 신이 성을 쌓고 병기를 수선하며 군졸을 훈련하고 군량을 저축하기에 급급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만일 성곽이 튼튼하고 병기가 날카롭고 사졸이 훈련되면, 네 진의 백성이 스스로 지키고 제 힘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오니, 어찌 다른 군사의 도움을 기다리겠습니까. 적의 침략이 길이 그치고, 적의 마음이 영원히 복종할 것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또 생각하옵건대, 처음 새로 옮겼을 때에는 겨우 몇 자 밖에 안 되는 목책으로도 오히려 굳게 지킬 수가 있었사온데, 더구나 이제 석성이 이루어졌으니 스스로 지키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민간이나 관청에나 저축해 둔 것이 없어 이로 인해 기근이 들면서도 굶어 죽음을 면하였사온데, 더구나 지금은 매년 풍년이 들어 백성에게는 남은 곡식이 있고, 관에는 남은 저축이 있으니 어찌 식량이 다함을 걱정하오리까. 관청에서는 조금의 요구도 없고 백성은 실오라기 하나의 지출도 없사오니, 무엇 때문에 재물이 다하겠습니까. 백성의 마음은 이미 안정되고 죄를 짓고 도망하는 자는 날로 줄어드니, 무슨 까닭으로 모두 도망쳐버리겠습니까. 종성만 다 쌓게 되면 민력(民力)은 자연히 쉬게 될 것이니, 어찌 힘이 다함을 걱정하오리까. 용성 같은 곳은 형세가 그리 나쁘지 않사오니 빨리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력이 넉넉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선인(先人)이 나라를 다스리되 백년이 되어야 잔악함을 이기고 몹쓸 것을 제거한다.’ 하였사오니, 비록 선인이라도 백년이 못 되고서는 다스려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것 이온데, 하물며 이 세 고을을 세운 지가 10년도 못 된 것이겠습니까. 어찌 한 가지 일의 득실(得失)로써 대번에 걱정하거나 기뻐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이루기를 구하지 마시고 작은 이익을 귀히 여기지 마시며, 작은 폐단을 헤아리지 마시고 조그마한 걱정을 염려하지 마시어, 세월이 흐르기를 천천히 기다리면 허황된 말이 저절로 가라앉고 민심이 자연히 안정될 것이며, 민폐는 사라지고 백성의 원망은 없어져서, 자연히 백성들의 식량은 넉넉해지고 병력은 강해지며 도적들은 굽히어 세 고을은 길이길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드릴 말은 다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첫해의 큰 눈 내린 것을 말하는 자는 마소가 다 죽어버린 것같이 생각하오나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 다음해의 돌림병을 말하는 자는 백성이 거의 다 죽은 것처럼 여기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정의 의논은 대부분 저희들은 옳게 여기고 신은 그르다 하오며, 저희들을 가리켜 충직하다 하고 신을 가리켜 간사하다고 하니, 신은 이때에 있어 그지없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와서 보건대, 일이란 제각기 자취가 있어 끝내 덮어둘 수 없는 것이니, 누가 충직하고 누가 간사하며, 누가 공(公)이고 누가 사(私)인지, 공사(公私)와 충사(忠邪)의 가림은 오직 전하의 밝으신 판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지방에 있으면서 일을 건의하는 신하는 반드시 참소와 비방을 받아 화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전조(고려)의 신하 윤관(尹瓘)도 그 하나의 예이겠습니다. 윤관은 그 지체가 귀족이요 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화를 면하지 못하였거늘, 더구나 신은 조그마한 공로도 없고 또 큰일을 할 재주도 없어 하는 일에 잘못이 많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절실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나서 곧 중관(中官) 엄자치(嚴自治)를 보내어 위로하고 유시하기를, “내가 북방 일에 대하여 밤낮으로 걱정하여 마지않았는데. 이제 경의 글을 보니 근심할 것이 없도다.” 하시고, 곧 어의(御衣) 한 벌을 내려 주시었다. 세종이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네 진(鎭)을 설치할 때에,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종서가 힘껏 그 일을 주장하였다. 의논하는 자의 말이, “김종서가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일을 가지고 이룰 수 없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니 그 죄는 죽여야 옳다.”는 것이었다. 세종이 이르기를, “비록 내가 있으나 만일 김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마련할 수 없었고, 비록 김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었더라면 이 일을 주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는, 고집하고 마음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김종서가 이미 네 진을 설치하여 남도 백성을 옮겨다 채우고, 날마다 술을 마련하고 풍악을 울려 장사(將士)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었으므로,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어떤 이가 그 불가함을 말하니 김종서가 말하기를 “바람이 모래를 날리는 변방에서 장사가 굶주리고 수고하는데, 내 처음부터 초라하게 시작하면 뒤에 반드시 유종의 미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어느 날 밤잔치 때에 불평하는 무리가 활을 쏘아 술통을 맞히니, 좌우가 모두 놀라 떠들썩하였으나 김종서는 태연자약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김종서가 말하기를, “간인(奸人)이 나를 시험해 보았을 뿐이니 제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였다.
9월 7일에 이천(李蕆)이 여연 절도사(閭延節度使) 홍사석(洪師錫)과 강계 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4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로부터 만포구자(滿浦口子)의 앞 여울을 지나 옹촌(瓮村)ㆍ오자참(吾自站)ㆍ오미부(吾彌府) 등지로 향하고, 호군(護軍) 이재(李梓)로 하여금 1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이산(理山)의 산양회(山羊會)로부터 압록강을 지나 올라산 남쪽 홍타리(紅拖里)로 향하게 하고, 대호군(大護軍) 정덕성(鄭德成)은 1천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이산의 산양회로부터 압록강을 지나 올뢰산(兀頼山) 남쪽 아간(阿間)으로 향하였다. 11일에 좌우군은 고음한(古音閑) 땅으로 들어가 적의 전장(田莊)을 협공하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좌군은 홍타리 가운데의 마을로 향하고, 중군은 오자참으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적의 소굴 10여 호를 수색하여, 적의 머리 35급을 베고 5명을 사로잡고 마소와 가축을 뺏고 쌓아둔 곡식은 불살라 버렸다. 12일에 좌군은 파저강을 지나 올라산성과 아간 땅을 수색하니, 적은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다만 적의 머리 한 급만을 베고 그 집과 곡식을 태워버리고 곧 파저강을 도로 건넜다. 13일 새벽에 우군과 중군이 함께 오미부에 이르러 적의 소굴을 포위하니, 적이 미리 알고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 빈 집 24채와 쌓아둔 곡식을 불사른 뒤에 중군은 곧 돌아오고, 우군은 소토리(所土里)에 머물러 좌군을 기다리면서 적의 머리 10급을 베고 남녀 9명을 사로잡고 홍타리로부터 와서 모이었다. 이날 신시(申時)에 적이 우군이 미처 진지를 마련하지 못한 틈을 타고 달려들었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14일 아침에 적이 또 좌군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다가 우리 군사가 화포(火砲)를 쏘자 물러갔다. 좌 우군이 모두 군사를 돌릴 때, 좌군이 앞잡이가 되고 우군이 후군이 되어 오다가 길에서 적 50여 기가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는 것을 만났으나 우리 군사가 쳐서 말 두 필을 빼앗았다. 16일에 삼군(三軍)이 모두 개선하니 죽이고 잡은 적이 60여 명이었다. 이천 등이 사자를 보내어 첩보(捷報)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사신들에게 모두 차등을 두어 옷을 내려 주었고,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이세형(李世衡)을 보내어 장병들을 위문하였다.

[주D-001]《홍무정운(洪武正韻)》 : 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연간(1368~1398)에 어명으로 편찬된 16권의 운서(韻書)로서, 사성(四聲)의 체계를 북경(北京) 음운을 중심으로 고치어 정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훈민정음〉과〈동국정운〉제작에 기초 자료가 되었다.
[주D-002]묵특(冒頓) : 흉노(匈奴) 추장(酋長)의 이름인데 ‘용맹한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북방의 여러 족속을 굴복시키고 내외 몽고를 중심으로 한 일대 제국을 건설하여 흉노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남쪽으로 내려와 한 고조(漢高祖)와 백등(白登)에서 싸워 재물과 많은 여자들을 받음.
[주D-003]수성(守成)하는 임금 : 창업한 군주가 아니고, 선대(先代)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이어받아 지키는 임금을 말한다.
[주D-004]소공(召公) : 주(周) 나라 무왕의 아우이며, 성왕(成王)을 도와 주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다. 무왕이 멸망시킨 은(殷)이 재흥을 꾀하였으나, 소공이 성왕을 도와 반란을 평정하고, 또 산동 반도의 오랑캐들을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다.
[주D-005]전단(田單) : 춘추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장수인데, 연(燕) 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 나라를 쳤을 때, 단(單)만이 농성하고 있다가 연 나라 군사를 화우(火牛)의 계교로 물리치고, 70여 성을 도로 빼앗았다.
[주D-006]위곽(衛霍) :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을 말함인데, 모두 한 무제(漢武帝)의 장수로서 흉노(匈奴) 정벌에 공이 컸다.
[주D-007]반간(反間) : 《손자병법(孫子兵法)》에, 간첩을 향간(鄕間)ㆍ내간(內間)ㆍ반간(反間)ㆍ사간(死間)ㆍ생간(生間)의 다섯으로 들었다. 향간과 내간은 내통자이고, 반간은 이중간첩, 사간은 적을 속이기 위하여 위장 정보를 제공하는 자이고, 생간은 생생한 정보를 가지고 오는 간첩을 말한다. 반간은 간첩, 이간(離間)의 뜻으로도 쓰이는 말이나, 여기에서는 적을 역이용하여 적정을 탐색함을 뜻한다.
[주D-008]경인년의 화 : 태종 10년(1410) 경인년에 올적합(兀狄哈)이 오도리(吾都里)ㆍ올량합(兀良哈)과 함께 경원(慶源)에 침입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주D-009]반초(班超) : 후한(後漢) 때의 서역 경략자(西域經略者)로서, 흉노(匈奴)와 서역의 여러 나라가 한에 배반했을 때, 이를 정복하고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어 50여 국을 통할하였고, 거기서 31년이나 살다가 귀국 병사하였다.
[주D-010]삼령오신(三令五申) : 세 번 호령하고 다섯 번을 거듭 말한다는 뜻이니, 곧 군대에서 되풀이하여 자세히 명령함을 말한다.
[주D-011]와신상담(臥薪嘗膽) : 오(吳) 나라의 왕 부차(夫差)가 섶나무 위에서 자면서 월(越) 나라에 복수할 것을 잊지 않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은 오 나라에 복수할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쓸개를 핥으면서 피차 고생을 참고 견디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2]유선(劉禪) : 촉한(蜀漢)의 초대 왕인 유비(劉備)의 아들로서, 부왕(父王)의 뒤를 이어 제갈량(諸葛亮)의 뛰어난 지략과 지극한 충성을 받았으나, 그가 병사하자 갑자기 국세가 꺾이어 위(魏)나라에 멸망당하였다.
Cyber World ASANJANG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