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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黃喜)자는 구부(懼夫)이고, 남원蔣인(南原人)이며, 호는 방촌(厖村)이고, 시호는 익성공(翼成公)이다. 세종조(世宗朝)에
20년 동안 영의정(領議政)으로 있었는데, 당시에 태평재상(太平宰相)으로 일컬어졌다. 갑오년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고시관(考試官)이
되었다. 권우(權遇)자는 중려(仲慮)로, 양촌(陽村)의 아우인데, 호는 매헌(梅軒)이고,
벼슬은 예문 제학(藝文提學)에 이르렀다. 갑오년에 예조 좌참의(禮曹左參議)로 함께 고시관이 되었다. 이맹균(李孟畇)목은(牧隱)의 손자인데, 갑오년에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다. 유관(柳寬)문화인(文化人)으로 호는 하정(夏亭)이다. 세종(世宗) 때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갑오년에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으로 지거(知擧)가 되었다. 변계량(卞季良)자는 거경(巨卿)이고 호는 춘정(春亭)인데, 공의 종우(從友)이다.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고, 작고한 뒤에
문숙공(文肅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기해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동지거(同知擧)가 되었다. 허조(許稠)하양인(河陽人)이다. 세종 때에 좌의정으로 법(法)을 만든 것이 마치 일자(一字)를 그은 듯이 정제(整齊)하였다.
기해년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동지거가 되었고, 또 전시(殿試)의 독권관(讀券官)이 되었다. 성개(成槪)창녕인(昌寧人)인데, 기해년에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으로 참시관이 되었다. 박은(朴訔)나주인(羅州人)인데,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기해년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전시의
독권관이 되었다. 박관(朴冠)기해년에 사헌 집의(司憲執義)로 참시관이
되었다. 김치(金峙)같은 선산부(善山府) 사람으로, 벼슬은 김해 부사(金海府使)에
이르렀다. 영봉리(迎鳳里) 집과 서로 이웃하여 살았다. 기해년에 지사간(知司諫)으로 참시관이 되었다. 김섭(金涉)기해년에 직예문(直藝文)으로 참시관이 되었다. 권조(權照)기해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참시관이 되었다. 정분(鄭笨)교은(郊隱)의 아들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계유년에 황보인(皇甫仁)의 난(亂)에 참여했다가 죽었다.
기해년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참시관이 되었다. 원숙(元肅)원주인(原州人)인데,
기해년에 지신사(知申事)로 독권관이 되었다. 이수(李隨)기해년에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독권관이 되었다. 정초(鄭招)기해년에 좌사간(左司諫)으로 독권관이
되었다. 정전(鄭悛)초계인(草溪人)으로 습인(習仁)의 아들인데, 벼슬은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에 이르렀다. 기해년에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독권관이 되었다. 정장(鄭將)기해년에 집의(執義)로
독권관이 되었다. 임재(林載)같은 선산부 사람으로 벼슬은 황간 감무(黃澗監務)를
지냈는데, 공의 족숙(族叔)이다. 길재(吉再)해평인(海平人)으로 고려(高麗)의
충신(忠臣)인데, 본조(本朝)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증직하였다. 호는 야은(冶隱)이다. 선산(善山)의 금오산(金烏山) 북쪽 구미리(仇彌里)에
전택(田宅)이 있으니, 선생이 후진들을 교수(敎授)하던 곳이다. 조용(趙庸)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의 사관(史官)인데, 본조에서는 벼슬이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일찍이 예천(醴泉)에
귀양살이를 하면서 열심히 후진들을 가르쳤는데, 조말생(趙末生), 윤상(尹祥), 배환(裵桓), 배강(裵杠)이 모두 제자들이다. 윤상(尹祥)예천인(醴泉人)인데,
향공(鄕貢)으로 등제(登第)하였고, 경학(經學)에 매우 조예가 깊었으며, 열심히 후진들을 가르쳤다. 무려 16년 동안을 국학(國學)에 있었고,
누천(累遷)하여 예문 제학(藝文提學)에 이르렀다. 조정(朝廷)에 가득한 경대부(卿大夫)들이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 나이 78세가 되어 고향에
물러나 늙으니,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83세에 작고하였다.
이상은 모두 선공(先公)의 은문(恩門) 및
일찍이 학업(學業)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 외에도 학업을 받은 곳이 또한 많이 있으나, 내가 미처 들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조상치(曺尙治)창녕인(昌寧人)인데, 벼슬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이르렀다. 성염조(成念祖)창녕인인데, 관후장자(寬厚長者)로서
제조(諸曹)의 참판과 판서를 역임하였다. 세 아들 가운데 임(任)은 지금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었고, 간(侃)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이며,
현(俔)은 지금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현은 또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세상에 드날리고
있다. 최만리(崔萬理)화순인(和順人)인데, 벼슬이 집현전 부제학에
이르렀다. 장후(張厚) 조윤성(曺允成)수성인(壽城人)인데, 벼슬은 성균
직강(成均直講)이다. 강여중(姜汝中) 나득강(羅得康) 노호(盧浩)공과
동부인(同府人)으로 여러 주(州)의 교수(敎授)를 지냈다. 변구상(卞九祥)문숙공(文肅公)의 종질(宗姪)인데, 여러 주의 교수관(敎授官)을
역임했다. 시(詩)를 썩 잘하였고[주D-011], 당시 사람들이 그를 시마(詩魔)라 하였다. 설위(薛緯)벼슬이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이르렀다. 김황(金滉)벼슬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조서안(趙瑞安)배천인(白川人)으로 숙위공(肅魏公) 반(胖)의 아들인데, 벼슬은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변(李邊)나이 3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글을 읽어
등제(登第)하였는데,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성부(城府)가 없었다. 한학(漢學)에 정통(精通)하여 사대(事大)의 일을 40여 년 동안 관장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공조 판서(公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작고하니, 향년이
85세였다. 성자량(成自諒)일찍이 지선산군사(知善山郡事)가
되었다. 이사증(李師曾)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에
이르렀다. 이효례(李孝禮)영의정에 추증된 문화(文和)의 아들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안수기(安修己)제조(諸曹)의 낭관(郞官)과 경상도 경력(慶尙道經歷)을
역임하였다. 이백첨(李伯瞻)벼슬은 김해 부사(金海府使)에 이르렀고, 시명(詩名)이
있었다. 임종선(任從善)성품이 관후(寬厚)하였고, 집구시(集句詩)를 잘하였다. 밀양
부사(密陽府使),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변효경(卞孝敬)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박흡(朴洽) 정장(鄭奬) 이선제(李先齊)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오윤명(吳允明) 김의생(金義生) 양봉래(梁鳳來)김해(金海) 사람으로 감찰(監察)과 밀양 교수(密陽敎授) 등을 역임하였다. 안홍기(安鴻起)영산 현감(靈山縣監) 및 성균 주부(成均主簿)를
역임하였다. 전호(全浩) 오효문(吳孝文) 최맹하(崔孟河) 이견기(李堅基)성주인(星州人)으로 형재 선생(亨齋先生)의 아들이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다.
이상 32인은 선공의 기해년 문과(文科)의
동년(同年)들로서 방(榜)의 차례대로 기록하였는데, 선공은 최만리(崔萬理)의 아래며 장후(張厚)의 위였다.
조서강(趙瑞康)숙위공(肅魏公) 반(胖)의
아들인데,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조양(趙敭) 조전(趙展) 안수기(安修己)전방(前榜)에 나타나
있다. 전호(全浩)전방에 나타나
있다. 최효손(崔孝孫) 최만리(崔萬理)전방에 나타나
있다. 하순(河淳) 안철산(安鐵山) 이이(李怡) 최여우(崔汝雨) 배의도(裴宜度) 박이창(朴以昌)태종(太宗) 때의 간신(諫臣) 안신(安信)의 아들로, 성품이 강항(剛亢)하였고, 제조(諸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문종(文宗) 때에 일찍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明) 나라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평양(平壤)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
죄목(罪目)을 가지고 멀리서 신문해 오자, 자기 가슴을 칼로 찔러 자결하였다. 박유예(朴游藝) 조수산(趙壽山)평양군(平壤君) 견(狷)의 아들이다. 한결(韓潔)용궁(龍宮)에
살았다. 이공전(李恭全) 우부(禹傅) 홍유극(洪柔克) 배한(裴閑)성주인(星州人)으로 뒤늦게 등제(登第)하였다. 부친 규(規) 및 아우 윤(閏)과 함께 삼부자(三父子)가 모두
간관(諫官)이 되었으므로, 사림(士林)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전초(全初) 이협(李協) 오전(吳佺)보성인(寶城人)인데, 벼슬이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이르렀다. 이탁(李擢) 민추(閔丑) 장후(張厚)전방(前榜)에 나타나
있다. 한혜(韓惠) 피맹인(皮孟靭) 주소(朱邵)뒤늦게 등제하였고, 일찍이
지청도군사(知淸道郡事)가
되었다. 안여지(安汝止) 김중우(金重羽) 박언수(朴言首) 정잠(鄭箴) 오효문(吳孝文)전방에 나타나 있다. 이원상(李元商) 임유재(林有梓) 김여해(金汝諧) 이백첨(李伯瞻)전방에
나타나 있다. 이개(李開)경주인(慶州人)이다. 조개부(趙介夫) 임사수(林士壽) 양종한(梁宗漢) 윤명은(尹明殷)함양(咸陽)에 살았다. 함우공(咸禹功)강릉인(江陵人)인데,
난계 선생(蘭溪先生) 부림(傅霖)의 아들이다. 정여(鄭汝)영산(靈山)에서 살았는데,
일찍이 여러 현(縣)의 교도(敎導)가 되었다. 김사중(金斯中)기해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에 이르렀다. 이림(李臨) 김곤(金坤) 진화(陳華)일찍이 개령 현감(開寧縣監)이
되었다. 정효온(鄭孝溫) 김의손(金義孫) 정회(鄭回) 이영문(李榮門) 반제뢰(潘帝賚)일찍이 칠원 현감(漆原縣監)이 되었다. 장숙(莊淑)금천(衿川)의 아전이었는데, 뒤에 등제(登第)하여 성균
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변기종(邊起宗) 민신지(閔愼之) 배의문(裴宜問) 장자강(張自綱) 나복초(羅復初) 김계학(金繼學)일찍이 개령 현감(開寧縣監)이 되었는데, 아들 서진(瑞陳)은 등제하여 벼슬이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이르렀다. 성자좌(成自佐)일찍이 창녕 교도(昌寧敎導)가
되었다. 정지하(鄭之夏) 정유(鄭瑜) 석분(石奮) 강신(康愼)신천인(信川人)인데, 선세(先世)로부터 선산(善山)에 살았다. 뒤에 등제하여 세자 필선(世子弼善)이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 우소하(禹疏河) 신책(申責) 이안토(李安土) 이복초(李復初) 정유(鄭維) 정양손(鄭良孫) 변효경(卞孝敬)전방(前榜)에 나타나 있다. 양봉무(梁鳳舞) 곽보민(郭保民)합천(陜川)의 야로현(冶爐縣)에 살았는데, 일찍이 여러 현의 교도(敎導)가
되었다. 박숭질(朴崇質) 김현(金鉉) 고헌(高獻) 강질(姜耋) 양담(楊澹) 서신(徐伸) 최유(崔游) 김섬(金蟾) 최숙계(崔淑溪) 최경(崔涇) 인사항(印士恒) 한척(韓陟) 이신(李莘) 박질(朴耋) 허동로(許董老) 정소(鄭韶)진주(晉州)에 살았다. 이활(李活)뒤에 등제하여 누차 승천해서
사간(司諫)이 되었다. 조백규(趙白圭) 김선재(金善哉) 이군거(李君擧)뒤에
이름을 백림(伯林)으로 고쳤다. 삼가현(三嘉縣)에 살았는데, 늙도록 과거 급제하기를 바랐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했다. 일찍이
지소산군사(知所山郡事)가 되었다. 성염조(成念祖)전방에 나타나
있다. 황연(黃鋋) 정효손(鄭孝孫) 우인숙(禹仁熟)예안인(禮安人)인데, 벼슬이
검한성부윤(檢漢城府尹)에 이르렀다.
이상 99인은 선공의 갑오년 생원
동년(生員同年)이다. 공의 차서는 최효손의 아래, 최만리의 위에 있다. 기해년에 재차 동년(同年)이 된 사람은 모두
9인이다.
이인손(李仁孫)둔촌(遁村)의 손자로 벼슬이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이르렀는데, 생원 시절에 공과 동배(同輩)였다. 이승손(李承孫)벼슬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는데, 생원 시절에 역시 공과 동배 사이였다. 이종검(李宗儉)벼슬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장돈의(蔣敦義)선산에 살면서 공과
함께 유학(遊學)하였다. 경자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뒤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천서(天瑞)는 시명(詩名)이
있었다. 황욱(黃郁)공과 함께 향교(鄕校)에서 종유하였는데, 뒤에 사마시(司馬試)에는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박윤(朴胤)공의 표형(表兄)인데, 경자년에
은사(恩賜)로 출신(出身)하여 일찍이 사온 주부(司醞主簿)가 되었다. 전동생(田秱生)공과
함께 정록(正錄)의 같은 벼슬을 하였고, 벼슬이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르렀다. 일찍이 승문원(承文院)에서 종직(宗直)이 공의 하관(下官)으로
있을 적에 나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선자(先子)는 깊은 포부를 두고도 크게 쓰지 못하였으니, 그대는 반드시 그것을 힘입어 귀현(貴顯)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김팽로(金彭老)공의 종질(宗姪)로 젊어서 공과 동학(同學)하였는데,
사마시에는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벼슬은 의흥 현감(義興縣監)에 이르렀다. 이영구(李永耉)문의(文義)에 살았는데, 벼슬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안질(安質)공과 서연(書筵)의 동관(同官)인데, 뒤에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지내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승진되어 죽었다. 배추(裴楸)세종(世宗) 때에
등제(登第)하여 일찍이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가 되었다. 김말(金末)경학(經學)에
정통하여 윤공 상(尹公祥), 김공 반(金公泮)과 함께
성균관(成均館)에 있으면서, 경지(經旨)에 대하여 자못 이동(異同)이 있었으나 서로 오르내리지 않았다. 세조(世祖) 때에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구(金鉤)사람됨이 순수하고 신중했으며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윤공 상(尹公祥)이 치사(致仕)한 후에는 그를
이어서 성균관(成均館)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열심히 후진들을
가르쳤는데, 당시 사람들이 박문(博聞)으로는 윤공 상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작고하자 문장(文長)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김반(金泮)강서인(江西人)으로 양촌(陽村)에게서 수업(受業)하였고, 벼슬은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이르렀다.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명(明) 나라에 조회갔을 때, 화어(畫魚)를 두고 지은 시에 “숨고 드러남은 형체가 비록 다르나 날아오르려는 뜻은 한가지라오. 어떻게
하면 꼬리를 태워 끊어버리고 하늘에 있는 용을 부여잡고 오를꼬.[潛見形雖異 飛騰志則同 若爲燒斷尾 攀附在天龍]” 하였으므로, 중조인(中朝人)들이
그를 지목하여 소단미 선생(燒斷尾先生)이라고 하였다. 뒤에 강서로 돌아가서 늙었는데, 조석(朝夕)의 끼니도 잇지 못하고 궁곤하게 살다가
작고하였다. 곽거완(郭居完)성균관에서 공과 함께
벼슬하였다. 이맹전(李孟專)대대로 선산에서 살았다. 누천하여 벼슬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소격서 영(昭格署令)에 이르렀는데, 중년(中年)에 벼슬하기를 싫어하여 향리(鄕里)로 물러나와 살면서 남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지금 나이가 이미 90세가 되었고, 부인(夫人) 김씨(金氏) 또한 86세인데, 모두
건강하다. 김맹지(金孟智)여러 주(州)의 교수관(敎授官)을
역임하였다. 권수(權銖)여러 주의 교수관을
역임하였다. 한권(韓卷)사람됨이 아무 데도 얽매이지 않았고, 문무(文武)의 재주가
있었다. 대간(臺諫)의 직을 역임하고 만년에 소산군사(所山郡事)가 되어, 배를 타고 낚시질을 하다가
익사하였다. 신영손(辛永孫)일찍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정양(鄭穰)진주인(晉州人)으로, 해서(楷書)와 행서(行書)를 잘 썼고, 벼슬은
순흥 도호부사(順興都護府使)에 이르렀다. 선공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라고 말씀하였다. 이보흠(李甫欽)영천인(永川人)으로, 문장(文章)이
있고 이치(吏治)에도 능했으며, 성품이 검솔(儉率)하여 비록 의복이 때묻고 해어졌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일찍이 순흥 부사(順興府使)로
있을 적에 금성군 유(錦城君瑜)의 협박에 의해 난(亂)을 도모했다가, 미처 이 사실을 치계(馳啓)하기 전에 일이 발각되어, 박천(博川)에
유배되었다가 끝내 처형되었다. 조오(趙峿)사람됨이 청렴하여 곤궁을 잘 견디었고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벼슬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모순(牟恂)진주인(晉州人)인데, 공과 장옥(場屋)에서 함께 종유하였다. 뒤에 과거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지내고, 지합천군사(知陜川郡事)로
작고하였다. 정지담(鄭之澹)김공 치(金公峙)의 사위인데, 정유년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은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이르렀다. 하길지(河吉之)일찍이 성균 주부(成均主簿)가 되었다. 최연(崔淵)김해(金海)에 살았는데, 공이 고령(高靈)으로 가서 교대(交代)하였다. 그 후 누천하여 대구(大丘), 곤양(昆陽),
흥해(興海) 삼군(三郡)의 수령을 지내고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이르렀다. 권형(權衡)김해에 살았는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었다. 누천하여 성균 사성(成均司成)과 사헌 집의(司憲執義)를 역임하고
향리에 물러나서 살았다. 하담(河澹)진주인(晉州人)인데, 선산(善山)에 살면서 공과 같은
이웃에 살았다. 일찍이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가 되었다. 아들은 위지(緯地)이다. 조계평(趙季砰)일찍이 상주 판관(尙州判官), 남원
부사(南原府事)가 되었다. 박시생(朴始生)밀양인(密陽人)인데, 공과는 동갑(同甲)에다
같은 마을에 살았다. 일찍이 광주(廣州)와 나주(羅州)의 목사(牧使)를 지내고, 검공조참판(檢工曹參判)으로
작고하였다. 김희(金熙)공의 표형(表兄)인데, 기해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위(衛)의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오흠로(吳欽老)공과 젊어서 함께 유학하였고,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뒤에 벼슬이 황주 판관(黃州判官)에 이르렀다. 어버이를 섬기면서 효성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김윤수(金允壽)같은 선산부 사람인데, 아우인 윤집(允集), 윤덕(允德)과 함께
모두 무재(武材)로 일컬어졌다. 윤수는 누천하여 경상좌우도 절제처치사(慶尙左右道節制處置使) 등을 역임하였다. 정자영(鄭自英)공과
정록(正錄)의 동관(同官)으로, 경서(經書)에 정통하였는데, 먼저 지취(旨趣)를 얻었을 경우에는 비록 그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견해를 변치 않고 고수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집요(執拗)하다고 일컬었다. 일찍이 태학(太學)의
직임에 있었고, 벼슬이 지중추(知中樞), 동지경연(同知經筵)에 이르러서 작고하였다.
이상 35인은 선공(先公)의 요우(僚友)나
향당(鄕黨)의 친척으로서 항상 서로 왕래하던 이들이다. 공께서 교유(交遊)한 이들이 이뿐만이 아니지만,
그러나 다 기록하자면 너무나 번거롭게 되기 때문에 그 중에 두드러진 이만을 기록하였다.
아, 선공 평생의 사우(師友)들은 모두 한때의 호걸(豪傑)들로서, 상업(相業)으로 일컬어진 이도 있고, 절의(節義)로 일컬어진 이도 있고,
경술(經術)로 일컬어진 이도 있고, 문장(文章)으로 일컬어진
이도 있고, 정사(政事)로 일컬어진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높게는 균형(鈞衡)에 처하고, 대각(臺閣)에 반열하였으며, 아래로는
주군(州郡)에 반열하고 교학(敎學)을 관장하였으며, 그 전리(田里)에 묻혀 살았던 이도 또한
선사(善士)가 되는 것을 잃지 않아서, 그 덕행(德行)과 사업(事業)을 누누이 칭술할 만하다.
선공이 어려서 학문을 할 적에는 사장(師長)들이 모두 원대(遠大)한 재목으로 기대하였고, 자라서 벼슬길에
나갔을 적에는 동료들이 모두 그 신의(信義)에 복종하였다. 그런데 한번 절욕(折辱)을 입음으로부터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몸이 궁곤할수록 행실은 더욱 가다듬었고, 지위가 낮을수록 도(道)는 더욱 높아서,
끝내 충효(忠孝)의 전덕(全德)을 우리 후인에게 끼쳐주었으니, 아, 누가 그 사우(師友)들에게 부끄러움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이상의
보도(譜圖), 기년(紀年), 사우 성씨(師友姓氏) 등의 기록은 무인년에 이미 찬술해 놓은 것을 지금 경자년에 다시 고정(考定)을 더하였고,
사업(事業) 및 제의(祭儀)에 대해서는 모두 무인년의 옛 것을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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