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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장영실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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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8일(정사) |
평안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석등잔 대·중·소 아울러 30개를 이제 가는 사직(司直) 장영실( 蔣英實)이 말하는 것을 들어 준비하라.” 하였다. 【원전】 2 집 665 면 【분류】
*재정(財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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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8일(정축) |
| 이간의 뇌물을 받은 황현·이승직·한을기 등을 태 20도로 논죄하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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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이간(李侃)의 뇌물을 받은 사람 중에서 먼저 대사성 황현(黃鉉)과 양주 부사
이승직(李繩直)·한을기(韓乙奇)·황득수(黃得粹)· 장영실( 蔣英實)·구중덕(丘仲德)·조맹발(趙孟發)·기석손(奇碩孫) 등을 추고(推考)하고 법률에 적용하여 장물에
따라 죄를 정하온즉, 장물이 관(貫) 이하이므로 태(笞) 20도에 해당합니다.” 하니, 명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다만 득수와
맹발만은 공신의 후손이니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2 집 668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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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7일(병신) |
| 의금부에서 이징과 이군실 등의 처벌을 건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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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징(李澄)과 이군실(李君實)이 동관(東關) 노상(路上)에서 각각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참마(站馬)를 달려서 사냥하다가 요동
도사(遼東都司)에게 욕을 보았으며, 또 각 참(站)에 이르러 중국 사람을 손으로 때렸사오니, 청하건대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분간하여 징은
형장 1백 대에 처하고, 군실과 종사관(從事官) 구경부(仇敬夫)·박세달(朴世達)· 장영실( 蔣英實)·신서(辛黍)·홍노(洪老)·이득춘(李得春)·이초(李軺)·장현(張玄)·조일신(曹日新) 등은 형장
90대로 하며, 장후(張厚)는 검찰관으로서 사냥을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영락 21년 11월 21일 사헌부 수교에, ‘일행이 죄를 범한 일이
있어도 숨기고 아뢰지 않는 검찰관은 제서유위(制書有違)의 죄목으로써 논한다.’고 하였사오니, 청하건대 후(厚)는 형장 1백 대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징과 군실은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후와 경부는 모두 직첩을 거두고 형장을 쳐서 외방에 부처하고,
세달·영실·서(黍)·노(老)·득춘·초(軺)·현(玄)·일신(日新) 등은 각각 2등을 감하여 직첩을 거두지 말게 하고, 영실과 현에게는
속전(贖錢)을 바치게 하였다. 【원전】 3 집 234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외교-명(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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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4일(갑자) |
| 벽동군 사람 강경순이 청옥을 진상하니 장영실에게
채굴하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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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동군(碧潼郡) 사람 강경순(姜敬純)이 푸른 옥[靑玉]을 얻어서 진상하였으므로, 사직(司直) 장영실( 蔣英實)을 보내어
채굴(採掘)하고, 사람들이 채취하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원전】 3 집 366 면 【분류】 *재정-진상(進上) /
*광업-채광(採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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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6일(을미) |
| 안숭선에게 명하여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 줄 것을 의논하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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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 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대 원(元) 나라의 소·항주(蘇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柳廷顯)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하니, 희 등이 아뢰기를, “김인(金忍)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3 집 514 면 【분류】 *인물(人物) / *과학-역법(曆法) /
*과학-천기(天氣) / *인사-임면(任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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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일(병자) |
| 새로 만든 누기의 구조와 원리 및 보관 장소와 누기 명의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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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부터
비로소 새 누기(漏器)를 썼다. 임금이 예전 누기가
정밀하지 못한 까닭으로 누기를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다. 파수용호(播水龍壺)는 넷인데,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수수용호(受水龍壺)는 둘인데,
물을 바꿀 때에 갈아 쓴다. 길이는 11척 2촌이고, 둘레의 직경(直徑)은 1척 8촌이다. 살대[箭]가 둘인데, 길이가 10척 2촌이고, 앞
면(面)에는 12시(時)로 나누고, 매시(每時)는 8각인데, 초(初)와 정(正)의 여분(餘分)이 아울러 1백 각이 된다. 각은 12분으로
나눈다. 밤의 살대[箭]는 예전에는 21개가 있었는데, 한갓 바꾸어 쓰기에만 번거로우므로,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거하여 낮과 밤에 오르고
내리는 것으로 구분하여, 이기(二氣)로 요약하여 살대[箭] 한
개를 당하게 하니, 무릇 살대[箭]가 12개이다. 간의(簡儀)와 참고하면 털끝만치도 틀리지 아니한다. 임금이 또 시간을 알리는 자가
차착(差錯)됨을 면치 못할까 염려하여, 호군(護軍) 장영실( 蔣英實)에게 명하여 사신
목인(司辰木人)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도록 하였으니, 그 제도 는 아래와 같다. 먼저 각(閣)
3간[楹]을 세우고, 동쪽 간[楹] 자리[座]를 두 층으로 마련하여, 윗 층에는 세 신(神)을 세우되, 하나는 시를 맡아 종(鐘)을 울리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울리며, 하나는 점(點)을 맡아 징을 울린다. 중간 층의 밑에는 평륜(平輪)과 순륜(循輪)을 설치하고 12신을
벌여 세워서, 각각 굵은 철사[鐵條]로서 줄기를 만들어 능히 오르내리게 하며, 각각 시패(時牌)를 들고서 번갈아 시간을 알린다. 그 기계의
운행하는 술법은, 가운데 간에 다락[樓]을 설치하여, 위에는 파수호(播水壺)를 벌여 놓고, 아래에는 수수호(受水壺)를 놓는다. 병[壺] 위에는 네모진 나무를 꽂되, 속이 비고, 면(面)도 허(虛)하게
하여, 길이는 11척 4촌(寸)이고, 나비는 6촌, 두께는 8푼, 깊이는 4촌이다. 빈 속에는 간격이 있고, 겉에서 한 치 가량 들어가게 한다.
왼쪽에는 동판(銅板)을 설치하여, 길이는 살대[箭]에 준하고, 넓이는 2촌인데, 판면(板面)에는 구멍 열 둘을 뚫어서 구리로 만든 작은 구슬을
받도록 하되, 구슬의 크기는 탄알[彈丸]만 하며, 아홉 구멍에 모두 기계가 있어서 여닫을 수 있도록 하여, 12시간을 주장하게 하고, 오른쪽에도
동판을 설치하되, 길이는 살대에 준하고, 나비는 2촌 5푼인데, 판면에는 25개의 구멍을 뚫어, 또한 작은 구리 구슬을 왼쪽과 같이 받게
한다.판(板)은 12살대에 준하여 모두 12판인데, 절기에 따라 갈아 쓰며, 경과 점을 주장하게 한다. 물을 받는 병에 살대를 띄우고, 살대
머리에 받드는 가로쇠[橫鐵]가 젓가락과 같은 것이 있는데, 길이는 4촌 5푼이고, 병 앞에 오목한 자리가 있고, 오목한 가운데 넓은 판(板)을
비스듬히 놓아, 머리는 네모지고, 속이 빈 나무 밑에 닿고, 꼬리는 동쪽 간[楹] 자리 밑에 이른다. 간막이 넷을 설치하여 용도(甬道)의 모양과
같이 하고, 간막이 위에는 큰 철환(鐵丸)을 놓되, 크기는 계란만 하게 한다. 왼쪽의 12개는 시(時)를 주장하고, 중간 5개는 경(更)과
매경의 초점(初點)을 주장하며, 오른쪽 20개는 점(點)을 주장한다. 그 철환을 놓아 둔 곳에는 모두 철환이 드나드는 데 열고 닫히는 것이
있고, 또 가로된 기계가 있어 설치하였는데, 그 기계의 모양은 숟가락과 같고, 한쪽끝은 굽게 하여 고리처럼 걸리게 하고, 한쪽 끝은 둥글게 하여
구리 구슬을 받도록 되었다. 중간 허리에는 둥근 축이 있어서 내리고 올리도록 되었으며, 그 둥근 끝은 구리통[銅筒]의 구멍에 닿는다. 구리통은
둘이 있어, 간막이 위에 비스듬이 설치하였는데, 왼쪽 것은 길이가 4척 5촌이고, 둘레의 직경은 1촌 5푼인데, 시를 주장하게 하며, 아랫쪽에는
12구멍을 뚫었다. 오른쪽 것은 길이가 8척이고, 둘레의 직경은 왼쪽 통과 같은데, 경점(更點)을 주장하며, 아랫쪽에 25개의 구멍을 뚫고,
구멍마다 모두 기계가 있다. 처음에는 구멍을 모두 열리게 하여, 동판의 작은 구리 구슬이 내려져서 기계를 움직이면, 그 기계가 스스로
구멍을 덮어 막아서 다음 구리 구슬이 굴러 지나가는 길이 되게 하여, 차례차례로 모두 그렇게 된다. 동쪽 간의 자리 웃층의 밑에 왼쪽에는 짧은
통 둘을 달았는데, 하나는 구리 구슬을 받고, 하나는 안에 숟가락 같은 기계를 설치하여, 숟가락의 둥근 끝이 반쯤 나와서 구리 구슬을 받는 통
밑에 닿는다. 오른쪽에는 둥근 기둥과 네모진 기둥을 각각 둘씩 세우고, 둥근 기둥은 속이 비게 하여 안에 기계를 설치하였는데, 모양이 역시
숟가락과 같고, 반은 나오고 반은 들어가게 하며, 왼쪽 기둥은 다섯이고, 오른쪽 기둥은 열이다. 네모진 기둥은 작은 통을 비스듬히 꿰어서
기둥마다 각각 네 개씩으로 되었다. 한 끝은 연잎 모양으로 되고, 한 끝은 용의 입 모양으로 되어, 연잎은 구리 구슬을 받고, 용의 입은 구리
구슬을 뱉는다. 용의 입과 연잎은 위와 아래가 서로 닿고, 그 위에 별도로 짧은 통 두 개를 달아 놓았는데, 하나는 경을 가리키는 구슬을 받고,
하나는 점을 가리키는 구슬을 받는다. 오른쪽 네모진 기둥은 연잎마다 아래에 곧은 짧은 통 두 개와 가로된 짧은 통 한 개를 붙이고, 그 가로된
통의 한쪽 끝을 왼쪽 기둥 네모진 기둥의 연잎 아래에 닿게 한다. 왼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과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각각 용의 입과 연잎의 사이에 닿는다.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반은 직통(直筒) 안으로 들어 갔는데, 파수호의
누수가 수수호에 내려서 모이면, 떠 있던 살대[浮箭]가 점점 올라와서 시간에 응하여, 왼쪽 동판(銅版) 구멍의 기계를 건드리고, 작은 구리
구슬이 떨어져 내려서 구리 통에 굴러 들어가, 구멍으로 좇아 떨어져서 그 기계를 건드리면, 기계가 열리고, 큰 구슬이 떨어져 자리 밑에 달린
짧은 통에 굴러 들어가서 떨어지면서 숟가락 같은 기계[機匙]를 움직이면, 기계의 한 끝이 통 안으로부터 스스로 시간을 맡은 신의 팔을 치받으면,
곧 종이 울린다. 경점도 그렇게 하되, 다만 경을 울리는 구슬[更丸]은 달려 있는 짧은 통에 들어가서 떨어지면서 숟가락 같은 기계를 돌리면,
왼쪽 둥근 기둥 가운데로부터 경을 맡은 신의 팔을 치받아서 북을 올리고, 점통(點筒)에 굴러들어가서 다시 초점(初點)의 기계를 돌리면, 오른쪽
기둥 가운데로부터 점을 맡은 신의 팔을 치받아서 징을 울리고, 연잎 밑에 곧은 작은 통에 들어가 그친다. 그 굴러들어가는 곳에는 기계를
설치하여, 처음에는 경을 알리는 구슬[更丸]의 길이 막혔다가, 굴러들어감에 미쳐서는 들어간 길이 닫히고, 경의 길이 열린다. 나머지 경에도 모두
그렇다. 5경이 마치기를 기다려서 빗장을 뽑고 나온다. 매경(每更) 2점(點) 이하의 구리 구슬은 달려 있는 짧은 통에 떨어져 들어갔다가,
연잎으로 굴러들어가서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 그친다. 다음 점의 구리 구슬이 굴러 지나가면서 또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 그친다. 그 구리
구슬이 그치는 통에는 구멍이 있고, 빗장을 질러서, 닫혔다가 점의 구리 구슬이 떨어지면서 그 맨 아래의 기계를 건드리면, 기계에 이은 쇠줄이
차례로 모든 빗장을 뽑고, 앞서 3점의 구리 구슬과 더불어 일시에 함께 내려온다. 그 시간을 주장하는 큰 구슬이 달려 있는 짧은 통에 떨어져
둥근 기둥에 붙은 통에 굴러들어가 떨어지면서 가로나무[橫木]의 북쪽 끝을 밟는다. 나무의 길이는 6척 6촌이고, 나비는 1촌 5푼이며, 두께는
1촌 7푼인데, 가로나무의 가운데 허리의 주가 되는 짧은 기둥이 좁은 가로나무에 닿돌고 원축(圓軸)을 붙여서오르내리게 하도록 되었다. 가로나무의
남쪽 끝에는 손가락같은 둥근 나무를 세웠는데, 길이는 2척 2촌이고, 시간을 알리는 신의 발 밑에 닿는다. 발 끝에는 작은 윤축(輪軸)이
있는데, 큰 구슬이 떨어지면서 북쪽 끝을 누르면, 남쪽 끝이 올라가면서 신의 발을 받들어 자리 중간층의 위에 오른다. 가로나무의 북쪽 끝의
북쪽에 작은 판을 세워서 여닫게 하였는데, 판에는 쇠줄이 있어서, 위로는 시간을 주장하는 매달린 통[懸筒]의 숟가락 같은 기계에 연(連)하여,
숟가락이 움직이면, 판(板)이 열려서 앞에 구리 구슬이 나오게 한다. 가로나무의 남쪽 끝이 낮아지면서 시간을 알리는 신(神)이 윤면(輪面)에
돌아오고, 다음 시간의 신(神)이 곧 대신하여 올라온다. 그 바퀴가 도는 제도는 바퀴 밖에 작은 판(板)을 가로 놓되, 길이는 1척 가량으로
하고, 그 가운데에 4, 5촌 가량 깊이의 구덩이를 파서 동판(銅板)을 그 위에 가로 올려 놓되, 그 세(勢)를 순하게 기울게 하며, 한쪽 끝에
축(軸)을 설치하여 열리고 닫히게 한다. 시간을 알리는 발[足]이 처음은 동판(銅板)아래로 반 치[半寸]쯤 들어갔다가 올라가면, 동판이 열려서
올라오고, 올라오면 도로 닫힌다. 그 시간이 다하여 윤면(輪面)에 돌아오면, 발끝에 쇠바퀴가 순하게 동판을 굴리면서 내려와서 잠시도 멈추지
아니한다. 다음 시간의 신(神)도 그러하다. 무릇 모든 기계가 다 숨겨져 있고 드러나지 아니하여, 보이는 것은 관대(冠帶)를 갖춘
목인(木人)뿐이다. 이것이 그 대략의 모양이다. 김빈(金鑌)에게 명하여 명(銘)과 아울러 서(序)를 짓게 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제왕의 정치는 때를 조화하게 하고, 날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중함이 없고, 상고해 실험하는 법칙은 의상(儀象)과 귀루(晷漏)에
있으니, 대저 의상(儀象)이 아니면 천지의 운행을 살필 수 없고, 귀루(晷漏)가 이니면 밤낮의 한계를 표준할 수 없다. 천년의 긴 세월은
일각(一刻)의 틀리지 아니함에서 비롯하고, 모든 공적의 빛남은 촌음(寸陰)을 헛되게 하지 아니하는 데에 말미암는 까닭으로, 역대의
성신(聖神)들이 하늘에 순응하여 나와서 다스리되, 여기에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요(堯)임금의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두시고, 대순(大舜)의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드는 뜻을 본받으시어, 이에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의상을 제작하여 측후(測候)의
근거를 삼고, 인해 누기(漏器)를 새로 만들어 시각(時刻)을 바르게 하여, 궁궐 안 서쪽에 각(閣) 세 간을 세우고, 호군 장영실( 蔣英實)에게 명하여 시간을 맡는
목인 3신(神)과 12신을 만들어 닭과 사람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였다. 동쪽 간에는 좌(座) 두 층을 마련하여 삼신(三辰)을 윗층에 두되,
하나는 앞에 놓인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고, 하나는 앞에 놓인 북을 쳐서 경을 알리고, 하나는 앞에 놓인 징[鉦]을 쳐서 점(點)을 알리게
하였다. 12신은 각각 신패(辰牌)를 잡고 둘러서며, 평륜(平輪)이 중간 층의 밑에 숨겨져서 때에 따라 번갈아 올라온다. 가운데 간[中楹]의
중간에는 병[壺]을 놓고 기계를 설치하여, 철환(鐵丸)을 써서 그 기계를 돌린다. 시간이 이를 때마다 여러 신(神)이 문득 응한다. 의상을 참고
연구하매 하늘과 어긋나지 아니하여, 참으로 귀신이 있어 지키는 것 같았으니, 보는 자가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실로 우리
동방(東方)의 전고에 없는 거룩한 제도이다. 드디어 그 집을 보루각(報漏閣)이라 이름하고, 신(臣) 빈(鑌)에게 명하여 장차 후래에 밝게 보이게
하시니, 신이 절하고 명(銘)을 지어 드립니다.” 하고, 명(銘)에 이르기를, “음양(陰陽)이 번갈아서 밤과 낮이 바뀌어지고, 하늘도
말 없이 돌아 신공(神功)이 자취 없네. 이루시고 보필하여 귀루(晷漏)를 지었도다. 황제의 창작이나, 역대로 법은 달라, 우리 동쪽 나라도 옛
제도가 허술하더니, 크나큰 이 제도를 비로소 만드셨네. 우리 임금 밝으시어 선기옥형(璇璣玉衡) 만들고서, 누기(漏器)도 새로 하니,
파수호(播水壺)가 네 개이고, 수수호(受水壺)가 두 개인데, 밤과 낮이 바뀜이 각에서 차츰 비롯하여 산법(算法)을 세우시되, 이륙(二六)으로 보였도다.
조두(勺斗)를 치는 것은 시간이 어긋날까, 목인(木人)을 만들어서 수직(守直)을 아니 쓰네. 여러 신(神)을 만들어서 누수(漏水)를 맡게 하고,
높은 집을 이룩하여 상하 좌석 마련하고, 저기 있는 동편 간[東楹]에는 3신이 위에 있어, 종과 북과 징 하나씩을 나누어 가지고서 닭의 울음
대신하니, 그 소리 질서(秩序) 있네. 아래에는 12신이 신패(辰牌)를 가지고서 평륜면(平輪面)에 둘러 있어, 번갈아 오르면서 시간을 알리도다.
그 기계 연구하니 가운데 간[中楹]이 징험일세. 층루(層樓)를 막았는데, 잇대어 병을 놓고, 두 개의 동판(銅板)에다 구멍 뚫고, 살대를 꽂아
기계를 더하고서 철환을 받게 하여, 호면(壺面)에 세웠도다. 살대[箭]가 올라가면 기계가 움직이고, 철환이 떨어져 굴러가는 길이 비꼈는데, 신의
밑에 닿았도다. 두 갈래가 넷으로 나뉘어서 골목길과 같았도다. 통을 좌우로 운전하여 철환을 받게 하고, 통에는 기계 구멍[機竅]이 동판(銅板)의
수(數)와 같도다. 별도로 큰 철환이 통 가에 벌여 있어, 번갈아 기계가 발동하여 번개처럼 빠르도다. 기계가 닿는 곳에 사신(司辰) 직책
다하여서, 보는 이가 감탄하네. 거룩할사, 이 제도는 하늘 따라 법 만드니, 천지조화 짝지어서 범위(範圍)가 틀림 없네. 적은 시각 아껴 써서
모든 공적 빛났도다. 그 나라에 사는 백성 스스로 감화하여 어기지 아니하네. 표준을 세우고서 무궁토록 보이도다.” 하였다.
보루각(報漏閣)에 새 누기(漏器)를 놓고 서운관생(書雲觀生)으로 하여금 번갈아 입직(入直)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경회루의 남문과
월화문(月華門)·근정문(勤政門)에 각각 금고(金鼓)를 설치하고, 광화문에 대종고(大鍾鼓)를 세워서, 당일 밤에 각 문의 쇠북을 맡은 자가
목인(木人)의 금고 소리를 듣고는 차례로 전하여 친다. 영추문(迎秋門)에도 큰 북을 세우고, 오시에 목인의 북소리를 듣고 또한 북을 치고,
광화문의 북을 맡은 자도 전하여 북을 친다. 경회루 남문과 영추문·광화문은 서운관생이 맡고, 나머지 문은 각각 그 문에 숙직하는 갑사들이
맡았다. 영실(英實)은 동래현(東萊縣) 관노(官奴)인데, 성품이 정교(精巧)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工匠) 일을 맡았었다. 【원전】 3 집
577 면 【분류】 *과학-역법(曆法)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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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일(정축) |
| 지중추원사 이천에게 주자를 만들어 책을 박도록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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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추원사
이천(李蕆)을 불러 의논하기를,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시고 큰 글자를 주조(鑄造)할 때에, 조정 신하들이 모두
이룩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태종께서는 억지로 우겨서 만들게 하여, 모든 책을 인쇄하여 중외에 널리 폈으니 또한 거룩하지 아니하냐. 다만
초창기(草創期)이므로 제조가 정밀하지 못하여, 매양 인쇄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먼저 밀[蠟]을 판(板)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밀의 성질이 본디 유(柔)하므로, 식자(植字)한 것이 굳지 못하여, 겨우 두어 장만 박으면 글자가 옮겨 쏠리고 많이
비뚤어져서, 곧, 따라 고르게 바로잡아야 하므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내가 이 폐단을 생각하여 일찍이 경에게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더니, 경도 어렵게 여겼으나,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板)을 만들고 주자(鑄字)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이제 대군들이 큰 글자로 고쳐
만들어서 책을 박아 보자고 청하나, 내가 생각하건대, 근래 북정(北征)으로 인하여 병기(兵器)를 많이 잃어서 동철(銅鐵)의 소용도 많으며,
더구나, 이제 공장들이 각처에 나뉘어 있어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이 심히 번거롭고 많지마는, 이 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직전(直殿) 김빈(金鑌)·호군 장영실( 蔣英實)·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사인(舍人) 정척(鄭陟)·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경연에 간직한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騭)》·《논어》 등 책의 자형(字形)을 자본으로 삼아,
주자(鑄字) 20여 만 자(字)를 만들어, 이것으로 하루의 박은 바가 40여 장[紙]에 이르니, 자체(字體)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원전】 3 집 578 면 【분류】 *출판-인쇄(印刷) / *출판-서책(書冊) /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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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6일(갑오) |
| 중국 사람 지원리와 김새 등 7인을 요동으로 풀어
보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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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김옥진(金玉振)을 시켜서 중국 사람 지원리(池源里)와 김새(金璽) 등 7인을 요동으로 풀어 보냈다. 처음에 새가 야인에게 포로되어서 오랫동안
북방에서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도망쳐서 왔다. 새의 성질이 백공(百工)의 일에 정교(精巧)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금은(金銀)을
제련(製鍊)하여 주홍(朱紅)의 가벼운 가루로 하엽록(荷葉綠) 따위의 물건을 만들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이 장영실( 蔣英實)에게 명하여 그 기술을 전습(傳習)하게 하였다. 새가 말하기를, ‘돌맹이를 제련하여 금과 은을
만들 수 있다.’ 하여, 곧 그 말에 의거해서 널리 돌을 구해서 보이니, 말하기를, ‘모두 진짜 돌이 아니다.’ 해서, 마침내 전습하지
못하였다. 단지 가벼운 가루로 하엽록(荷葉綠) 만드는 것을 배웠을 뿐이며, 주홍(朱紅)은 역시 전습하지 못했다. 나라에서 그 재주를 사랑해서
머물러 있게 하려고 기생으로 아내를 삼게 하여 후하게 대접하니, 새도 역시 기뻐하여 가기를 원치 않았다. 정부 대신이 혹은 말하기를, ‘이 앞서
포로되었던 중국 사람이 북방에서 도망쳐 오면 즉시 중국에 풀어 보내어, 이제 벌써 1천여 인이나 되었습니다. 또 우리 나라가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는 것은 중국에 소문이 났는데, 한 사람 까닭으로 사대하는 성심에 누가 된다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니,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혹은 이르기를, ‘당초에 중국의 명령이 없어도 들여보낸 자가 벌써 1천 인이 되었는데, 이번에 비록 보내지 않기로서니 무엇이
염려되겠으며, 하물며 이들 네 사람뿐이니 반드시 들여보낼 것이 없습니다.’ 하여, 두 가지 의논이 결정을 보지 못했으나, 그 수종(隨從)한
사람의 족친들이 아직도 동녕위(東寧衛)에 살고 있어서, 끝내 자취를 숨길 수 없으므로, 이때에 와서 풀어 보냈다. 【원전】 4 집 87
면 【분류】 *외교-명(明) / *광업-광산(鑛山) / *광업-제련(製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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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7일(임진) |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 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이 마련한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이에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제왕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 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 주는 요결(要訣)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상고하고 징험하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여 한 기구 한 형상만으로는 능히 바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일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모든 의기(儀器)를 제정하게 하였는데, 대소
간의(大小間儀)·혼의(渾儀)·혼상(渾象)·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日星定時)·규표(圭表)·금루(禁漏) 같은 기구가 모두 지극히 정교하여 전일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 오직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모든 기구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하였으므로 시간마다 점검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 집을 세웠도다. 풀[糊]먹인 종이로 일곱 자 높이의 산을 만들어 집 복판에 설치하고, 그 산 안에다
옥루기(玉漏機) 바퀴를 설치하여 물로써 쳐올리도록 하였다.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탄자만 하고, 오색 구름이 둘러서 산허리 위를
지나도록 되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돌아서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에 들어가며, 비스듬한 형세가 천행에 준하였고, 극의 멀고
가까운 거리와 돋고 지는 분수가 각각 절기를 따라서 하늘의 해와 더불어 합치하도록 되어 있다. 해 밑에는 옥으로 만든 여자 인형 넷이 손에 금
목탁을 잡고 구름을 타고,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서 있어 인·묘·진시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매양 목탁을 치며,
사·오·미시 초정에는 남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목탁을 치고, 서쪽과 북쪽에도 모두 이렇게 한다. 밑에는 네 가지 귀형(鬼形)을 만들어서 각각 그
곁에 세웠는데 모두 산으로 향하여 섰으며, 인시가 되면 청룡신(靑龍神)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에는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돌아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주작신(朱雀神)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는데, 차례로 방위를 향하는 것은 청룡이 하는 것과 같으며, 딴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산 남쪽 기슭에는 높은 축대(築臺)가 있어, 시간을 맡은 인형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섰으며,
인형 무사 셋은 모두 갑옷 차림인데 하나는 종과 방망이를 잡고서 서쪽을 향해서 동쪽에 섰고, 하나는 북[鼓]과 부채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섰고, 하나는 징[鉦]과 채쭉을 잡고 동쪽을 향해서 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서 있어서, 매양 시간이 되면
시간을 맡은 인형이 종 치는 인형을 돌아보고, 종 치는 인형도 또한 시간을 맡은 인형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게 되며, 매경(每更)마다 북과 부채를
잡은 인형이 북을 치고, 매점마다 징과 채를 잡은 인형은 징을 치는데, 서로 돌아보는 것은 종 치는 인형과 같으며, 경·점마다 북 치고 징 치는
수효는 모두 보통 시행하는 법과 같다. 또 산 밑 평지에는 열두 방위를 맡은 신들이 각각 제자리에 엎드려 있고, 열도 방위 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어 상시에는 닫혀 있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쥐 모양으로 만든 신 뒤에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인형 옥녀(玉女)가 자시패를 가지고
나오며, 쥐 모양으로 만든 신은 그 앞에 일어선다. 자시가 다 가면 옥녀는 되돌아서 구멍에 들어가는 동시에 구멍이 저절로 닫혀지고 쥐 모양의
신도 제 위치에 도로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소 모양으로 만든 신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옥녀가 또한 나오며, 소 모양의 신도 일어나게
되는데, 열두 시간이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 오방위(午方位) 앞에는 또 축대가 있고 축대 위에는 기울어진 그릇을 놓았고 그릇 북쪽에는 인형
관원이 있어, 금병(金甁)을 가지고 물을 따르는 형상인데 누수 남은 물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흐르며, 그릇이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반듯해지며,
가득 차면 엎어져서 모두 옛말과 같이 되어 있다. 또 산 동쪽에는 봄 3개월 경치를 만들었고, 남쪽에는 여름 경치를 꾸몄으며, 가을과 겨울
경치도 또한 만들어져 있다. 《시경》 빈풍도(詩經豳風圖)에 의하여 인물·조수·초목 여러 가지 형용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절후에 맞추어 벌려
놓았는데 칠월 한 편의 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집 이름을 흠경이라 한 것은 《서경》 요전(堯典)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대저 당우 시대로부터 측후(測候)하는 기구는 그 시대마다 각자
제도가 있었으나, 당·송 이후로 그 법이 점점 갖추어져서 당나라의 황도유의(黃道遊儀)·수운혼천(水運渾天)과 송나라의
부루표영(浮漏表影)·혼천의상(渾天儀象)과 원나라의 앙의(仰儀)·간의(簡儀) 같은 것은 모두 정묘하다고 일렀다. 그러나 대개는 한 가지씩으로
되었을 뿐이고 겸해서 상고하지는 못했으며, 운용하는 방법도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 많았는데 지금 이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풍도(豳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임금께서 여기에 항상 접촉하고 생각을 깨우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뜻을 곁들였으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반(沐浴盤)과 무왕의 호유명(戶牖銘)과 같을 뿐이리오. 그 하늘을 본받고 때를 좇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흠경각이 완성되자 신에게 명하시어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심으로 삼가 그 줄거리를 적어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바치나이다.” 하였다. 【원전】 4 집 123
면 【분류】 *과학-역법(曆法) / *건설-건축(建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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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5일(병신) |
| 경상도 채방 별감 장영실이 창원·울산·영해·청송·의성 등 읍의 동철과 안강현의 연철을 바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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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채방
별감(採訪別監) 장영실( 蔣英實)이 창원(昌原)·울산(蔚山)·영해(寧海)·청송(靑松)·의성(義城) 등 각 읍에서 생산된
동철(銅鐵)과 안강현(安康縣) 소산 연철(鉛鐵) 등을 바쳤다. 【원전】 4 집 163 면 【분류】 *재정-진상(進上) /
*광업-광산(鑛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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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6일(정축) |
| 대호군 장영실이 만든 안여가 견실하지 못하여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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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군(大護軍) 장영실( 蔣英實)이 안여(安輿)를 감조(監造)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원전】 4 집 404 면 【분류】 *교통(交通) / *사법-재판(裁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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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5일(을묘) |
| 사헌부에서 박강·이순로·이하의 불경죄를 징계하기를
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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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에서
상소(上疏)하기를, “신하의 죄는 불경(不敬)한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불경(不敬)한 데 관계되면 비록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는 법이온데, 하물며 그 큰 것이겠습니까. 박강(朴薑)·이순로(李順老)·이하(李夏) 등은 서로 잇달아 명령을 받아
이천(伊川)의 행궁(行宮)을 감독 제조하였는데, 기와를 덮고 구조(構造)를 장식한 것이 대부분 견고하지 않았을 뿐더러, 부서진 집의 기와를 즉시
걷고서 고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못을 쳐서 긴 첨아(簷牙)를 꺾어 부러지게 하고는 진흙을 사용하여 부접(附接)하였으며, 대궐 안의 안공(鞍工)으로 하여금 기와를 처마에 잇게 하다가
뜻하지 않은 데에 떨어졌으나, 다행히 사고는 없었습니다. 만약 혹시 보좌(寶座)에 가까이 부딪쳤더라면, 박강 등의 한 몸뚱이는 만번 죽더라도
어찌 보상(報償)하겠습니까. 이것을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한심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는 바입니다. 대저 부호(富豪)의 자식도 마루 가에
앉지 않는데, 하물며 천승(千乘)의 임금이겠습니까. 다행히 사고가 없었다고 해서 특별히 가벼운 죄에 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이
불경(不敬)에 관계되면 보통의 사면(赦免)에는 용서받을 수 없으며, 그 임금이 타는 배를 잘못하여 견고하게 하지 않은 것도 오히려
대불경(大不敬)의 조목에 관계되는데, 박강 등은 심사(心思)와 이목(耳目)의 힘을 다하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훈벌(勳閥)의
후손이라 해서 전일의 죄를 함께 헤아려 그 죄를 바로잡지 않겠습니까. 이순로와 이하는 다만 직첩(職牒)만 회수하고, 박강은 다만 그 관직만
해임시키니, 죄는 큰데도 벌은 경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세상 사람의 마음에 굽어 따라서, 박강은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고 이순로와 이하는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어 불경(不敬)한 사람을 징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하고, 이내 승정원에 이르기를, “헌부(憲府)의 소(疏)는 장영실(蔣英實)을 탄핵함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원전】 4 집 40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건설-건축(建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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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7일(정사) |
| 장영실에게
2등을, 임효돈과 김효남에게 1등을 감형하고 조순생은 처벌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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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대호군(大護軍) 장영실( 蔣英實)이 안여(安輿)를 감독하여 제조함에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고 부서지게 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1백 대를 쳐야 될 것이며, 선공 직장(繕工直長) 임효돈(任孝敦)과 녹사(錄事) 최효남(崔孝男)도 안여(安輿)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또한 견고하게 하지 아니했으며, 대호군(大護軍) 조순생(趙順生)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곳을 보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개를 쳐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2등을
감형(減刑)하고, 임효돈과 최효남에게는 1등을 감형하며, 조순생에게는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원전】 4 집 408 면 【분류】
*교통-육운(陸運) / *공업(工業) / *사법-행형(行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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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4년(1442 임술 / 정통(正統) 7년)
5월 3일(임술) 2번째기사
박강·이순로·이하·장영실·임효돈·최효남을 불경죄로
다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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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박강(朴薑)·이순로(李順老)·이하(李夏)·장영실(蔣英實)·임효돈(任孝敦)·최효남(崔孝男)의 죄를 가지고 황희(黃喜)에게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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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不敬)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해야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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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4일(을사) |
| 보루각을 창덕궁에 옮기고, 간의대는 뜯어버리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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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여, 보루각(報漏閣)을 창덕궁(昌德宮)에 옮기고, 간의대(簡儀臺)는 뜯어버렸다. 【원전】 14 집 29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과학-천기(天氣)
[주D-001]보루각(報漏閣) :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경복궁과 창덕궁 안에 있었음. 일명 누국(漏局)이라고도
함.[주D-002]간의대(簡儀臺) : 이조 세종 때에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간의(簡儀)를 올려놓고 천문을 관측하던 대.
간의는 세종 17년에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 등이 만든
천체(天體)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는 기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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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일(병인) |
| 석강에서 우리 나라의 정악과 아악을 바루는 문제와 여악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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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공자(孔子) 때에도 오히려 옛것에 가까왔고, 주례(周禮)가 또 노(魯)나라에 있었지만 그때에는
예악이 잔폐하여 공자가 바룬 다음에야 악(樂)이 바루어졌습니다. 우리 나라 예악을 보면 본디 근본이 없는데 이제는 점점 경박스럽고 더럽게
되어갑니다. 가항(街巷)의 악은 모두 정성(正聲)이 아니고 정위(鄭衛)의 악(樂)과 같사오니, 비록 갑자기 모두 고쳐 복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예관(禮官)은 모름지기
유의해야 합니다.” 하고, 특진관 이장곤(李長坤)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악은 고의(古意)를 조술(祖述)한다고는 하지만 순수한
정악(正樂)이 아닙니다. 신이 장악원(掌樂院)의 일을 보는데, 【당시 장곤이 장악원
제조였다.】 전조 말 신우(辛禑) 때의 악이 급촉하고 비속하였는데 아조(我朝) 태조·태종에 이르러서도 미처 개정하지 못하였다가,
세종조에 이르러 박연(朴堧)이 악률(樂律)에 정하였으며 장공(匠工) 장영실( 蔣榮實)도 제작하는 것이 극히
정교하였습니다. 세종도 제도를 증감하여 의물(儀物)이 비로소 이때에 마련되었습니다. 종률(鐘律) 같은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는데,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불악(佛樂) 또한 많았고, 성종조(成宗朝)에는 성현(成俔)이 악률에 아주 정하여 악보(樂譜)가 약간 이루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뒤에는
증수(增修)하는 자가 없어 날이 오랠수록 점점 잘못되었으니 제사에 쓰는 악 또한 어찌 순수한 정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좌방(左坊)의 악은
이와 같고 우방(右坊)은 향악(鄕樂)으로 정위의 악과 같고, 그 사이 남녀가 서로 즐기는 악은 반정(反正)한 다음에야 모두 산거(刪去)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갑자기 옛날의 정악(正樂)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국악(國樂)이 상국에서 전해졌다지만
종(鐘)·석경(石磬)의 청탁이 착란하였고, 그 악기의 파손된 것은 주관하는 자가 고쳤으나 더욱 잘못되어 신과 정자지(鄭子芝)가 더욱 교정하였지만
어찌 모두 적의하다 하겠습니까?” 하고, 이청(李淸)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악은 음성이 심히 어그러져 세쇄한 말절(末節)도
오히려 바루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그 기본을 일으키겠습니까? 듣건대 옛적에 중국에 악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하니 이제 사신이 상국에 갈 때
반드시 질정관(質正官)을 보내어 중국의 예악 문물을 토구(討究)하도록 하소서. 중국이 비록 판탕(板蕩)했다 한다지만 유풍(流風) 여운(餘韻)이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영민한 자를 가려 뽑아 고증해 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자지가 어찌 음률을 안다고 하겠으며,
율려습독(律呂習讀)을 세우는 것은 확실히 아름다운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과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장곤은
아뢰기를, “만약 종률(鐘律)을 만든다면 미(米)의 대소와 관(管)의 분촌(分寸)은 정자지와는 만들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그러진 것을 바루고자 불악(佛樂)이나 외설한 소리는 이미 고치도록 하였지만 여악(女樂)이 있기 때문에 악이 바루어지지
않는다. 이 여악 또한 고치려 하지만 내연(內宴)에서 대신 쓸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다.” 하매, 이청이
아뢰기를, “아악(雅樂)을 바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여악을 없애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악을 없애는 일을
장악원에서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내연에서는 장차 무슨 악으로 대치해야겠느냐?” 하매, 장곤이 아뢰기를, “신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내전(內殿)에서 자친을 받드는 데에는 확실히 악을 폐할 수 없으니 무엇으로 대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점이 아니라면 곧
없애버려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내전에서는 악을 폐할 수 없지만 여악이어야 자친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 옛날 궁중에서 썼던 악을 널리 고찰한 것을 가지고 처리하라.” 하였다. 【원전】 15 집 506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예술-음악(音樂) / *역사-전사(前史) / *외교-명(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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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7일(무술) |
| 조강에서 우리 나라의 악제가 틀리게 되었음을 아뢰고 남악까지
없애기를 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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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장옥(張玉)이 아뢰기를, “지금 간의대(簡儀臺)의 도수가 틀리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 나라의 악제(樂制)가 반드시 크게 잘못되었을 것이니, 그 기구의 틀린 데를 또한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찬성 이장곤(李長坤)은 아뢰기를, “신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로서 악기들을 보건대 과연 잘못된 데가 많았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세종께서는 하늘이 낸 예성(睿聖)이셨고 또한 신하 박연(朴堧) 및 악사(樂師) 장영실( 蔣英實)이 때에 맞추어 났었기
때문에, 성음(聖音)을 제작함이 헤아릴 수 없이 신묘하여 소리를 들어보면서 고치고 기구를 관찰하면서 바로잡아 조금도 틀리지 않고 그렇게
묘했었는데, 요사이는 기구가 틀린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정자지(鄭子芝) 같은 사람이 비록 음률(音律)을 아는 것 같지만 어찌 그 근본을
알겠습니까? 수직(守直)하는 관원이 조심하지 않고 또한 도둑맞자, 비록 해조(該曹)가 즉각 개수(改修)하였지만 어찌 능히 그 제작을 잘 고찰하여
그 제도에 맞게 하였겠습니까? 이러므로 성음이 한결같지 못함이 과연 장옥이 아뢴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고, 장옥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단지 예(禮)에만 힘쓰고 악(樂)에는 미치지 않으며 성상께서도 또한 여기에는 유의하지 않으시어, 서로가 만홀히
여기고 방치합니다. 예악은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는 것인데 악이 이렇게 방치되었으니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장곤이
아뢰기를, “악의 요점은 신(神)과 사람을 화합시키고 상하의 인정을 통하게 하는 것인데, 지금의 악은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이는 특히
음사(淫邪)한 악입니다. 정부가 기악(妓樂)을 이미 개혁했기 때문에 남악(男樂)마저 아울러 폐할 수 없으니, 관복(冠服) 등의 의식(儀式)을
가까운 시일에 마땅히 자상하게 정하여 아뢰겠습니다.” 하고, 장옥이 아뢰기를, “이는 지극히 합당한 말입니다. 지금 여악(女樂)을
없앴는데 남악마저 다 없앤다면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고, 참찬관 박세희는 아뢰기를, “악을 어찌 성음에서
찾는 것이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성음도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악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인데, 항간에서
사용하는 것은 모두 방탕한 소리와 사특한 악이니, 어찌하면 방탕을 개혁하여 전아(典雅)해지게 할 수 있겠는가? 법을 세워 금단하면 될 수
있을까?” 하매, 장옥이 아뢰기를, “어찌 법을 세워 금하겠습니까? 교화(敎化)가 밝아지고 인심이 바로잡아지면 악이 저절로 바로잡힐
것입니다.” 하고, 세희는 아뢰기를, “예악이 다 같이 시행된 다음에야 악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악이 저절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고
예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지금 예악이 세워지지 않았으니 교화가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태황태후(太皇太后)의 상사가 있었을 때 그 임시에야 고정(考定)할 수 없어 잘못한 일이 많았으니, 이는 평소에 강구(講究)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매, 지사 남곤이 아뢰기를, “대저 예를 거행함이 시대마다 각각 같지 않아, 반드시 해박(該博)한 사람이 있어야 능히
두루 알아 적중하게 거행할 수 있습니다. 성음은 조종조에 이미 이루어놓은 법이 있으니 지금 다시 더할 것이 없이 옛 법제대로 수선하여 씀이
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 종법(宗法)은 시행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관혼 상제(冠婚喪祭)는 모두 마땅히 옛 법례를 찾아내어
강명(講明)해야 하는데, 이제까지 거행하지 않음은 어쩐 일인가?” 하매, 곤이 아뢰기를, “종법에 관한 전교(傳敎)는 신이 미처 듣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물러가 자상하게 정하겠습니다. 혼례는 전에 이미 거행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힘써 거행하는 사람이 있고, 관례도 또한 거행하도록
하였는데 어찌 거행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상례(喪禮)는 인도(人道)의 큰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례(常例)로 거행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거행하도록 한 것이니 해조(該曹)가 마땅히 스스로 거듭 밝혀야 한다.” 하였다. 장령 김인손(金麟孫)이
아뢰기를, “비록 예악을 말하기는 하지만 덕을 백년쯤 쌓아야 일어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때그때 닦아 거행하는 일도 또한 홀만히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사간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예악을 일으키기란 진실로 한때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도 폐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듣건대 외방(外方)에서 왜인(倭人)들을 대접할 때에 여기(女妓)에게다 남복(南服)을 입혀 음악을 시킨다고 합니다. 이는
필시 남악(男樂)을 구득할 수 없기 때문이나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그릇된
짓이다.” 하였고, 장곤이 아뢰기를, “근자에 효도로써 다스리기를 앞세우시기 때문에, 무릇 돌아가 부모 봉양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소원대로 들어주시니 이는 진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옛 예에 어버이의 나이 90이라야 모든 아들이 봉양하러 돌아갔었고, 80이나 70에는
각각 차등이 있었습니다. 요사이 권벌(權橃)이 어버이가 늙었다는 것으로 삼척(三陟)에 보임(補任)되기를 바랐는데, 벌의 어버이 나이 70이 되지
못하였고 또한 봉양할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벌처럼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은 구득하기 쉽지 않으니 봉양하러 돌아감을 윤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벌이 어버이가 늙기 때문에 봉양하러 돌아가기를 바라되, 그의 말이 매우 간절하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원전】 15 집 551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과학-천기(天氣) / *인사-관리(管理)
/ *예술-음악(音樂) / *가족-친족(親族)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풍속-예속(禮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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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1일(계사) |
| 관상감에서 간의와 혼상 등의 천문 관측 기구를 보수하기를
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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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 간의(簡儀)·혼상(渾象)은 세종조(世宗朝) 때 만든 것으로, 천문(天文)을 관측하는 기구가 하나
뿐이어서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보수(補修)하자니 기후를 관측할 기구가 없습니다. 때문에 전일에 하나를 더 만들자고 건의했었는데 이제
다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의 기구는 별들의 배치와 옻칠한 데가 혹 벗겨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새 기구를 배설(排設)할 적에는 전의
기구의 어긋난 곳을 교정(校正)하고, 장인(匠人)을 시켜 보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전의 기구는 어느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을는지
아울러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보수한 전의 기구는 내관상감(內觀象監)에 두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16 집 510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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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4일(기축) |
| 동지에 동구와 혜정교에 있는 앙부 일구를
측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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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에
종묘(宗廟)의 동구(洞口)와 혜정교(惠政橋)에 있는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측후(測候)하였는데 태양 행도(行度)가 동지의 획(畫)에 모두 어긋났다. 간의대(簡儀臺)의 소규표(小圭表) 그림자 길이는 1장 4척 5촌 4분이었고, 대규표(大圭表) 그림자
길이는 7장 3척 4촌 1분이었다. 【원전】 19 집 676 면 【분류】 *과학-역법(曆法)
[주D-001]앙부일구(仰釜日晷) :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일종의 해시계.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蔣英實) 등에게 명하여 만들게 한 것으로 처음에는 흠경각(欽敬閣)에다 설치하였고 또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하였다.[주D-002]간의대(簡儀臺) :
일종의 천문(天文) 관측 기구인 간의(簡儀)를 설치해 둔 곳. 세종
16년에 경회루(慶會樓) 북쪽에다 축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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