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씨(孟氏)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통기(通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노(魯) 나라 임금 백금(伯禽 주공(周公)의 아들)의 후예가 다
중(仲)ㆍ숙(叔)ㆍ계(季)로 씨(氏)를 삼아 오다가 중씨는 맹씨로 고쳤으므로 자손들이 맹으로 씨를 삼았다. 그 뒤에 격공의(激公宜) 혹은 이름을 언박(彦璞)이라 하였다. 란 이가 '仉' 음은 장(蔣).
진미공(陳眉公 : 미공은 진계유<陳繼儒>의 호)의 《니고록(妮古錄》에 "맹격(孟激)의 자는 공의(公宜)로 맹자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장(蔣)씨이다." 하였는데, 혹은 구(仇)씨라 한다. 씨를 맞이하여 맹자를 낳았다. 맹자의
나이 3세 때에 아버지 의(宜)가 졸(卒)하였는데, 그 어머니는 어진 덕이 있었다. 이에 세 차례나 집을 옮겨 다니다가 비로소 학궁(學宮)
부근에 집을 정하고 맹자를 가르치기를 매우 엄하게 하였으며, 맹자가 성장하여서는 자사(子思)의 문인(門人)에게 수업하였고 졸(卒)하여서는 그
고을의 사기산(四基山) 남쪽에 안장(安葬)되었다." 선사묘(先師廟)의 향사표(享祀表)를 상고해 보면, "맹자의 아버지는 맹손격(孟孫激) -또는 공의(公宜)라 한다.- 으로 추(鄹) 나라 사람이고 맹손씨의 후예
-《경화록(景華錄)》에 "추(騶) 나라 사람이다." 하였다.- 로 주 열왕(周烈王) 6년에 졸하였고, 맹자의 어머니는 장(仉) -혹은
범(ꝙ)씨, 혹은 구(仇)씨라 한다.- 씨이다. 맹자의 아버지는 원 나라 연우(延祐 인종의 연호) 3년(1316)에 주국공(邾國公)에 봉해지고,
명 나라 가정(嘉靖) 9년에 선현(先賢) 맹손씨를 추봉, 계성사(啓聖祠)에 배향되었고, 청 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옹정(雍正) 2년에
숭성사(崇聖祠)로 고쳐 배향되었고, 우리나라 숙종 27년에 계성사에 배향되었다." 하였다. 맹자의
휘(諱)는 가(軻), 자는 자여(子輿), 추(鄒) 나라 사람으로 아버지는 격공의, 어머니는 장씨, 부인은 전(田)씨이고 자사(子思)의
문인(門人)인데, 기유년에 나서 84세에 졸하였다. 송 나라 원풍(元豐 신종(神宗)의 연호) 6년(1083)에 추국공(鄒國公)으로 추봉,
문묘(文廟)에 배향하였고, 원 나라 지순(至順) 원년에 추국 아성공(鄒國亞聖公)으로 봉하였고, 명 나라 경태(景泰 경제(景帝)의 연호)
3년(1452)에 맹자의 사손(嗣孫)에게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세습(世襲)하게 하였고, 가정(嘉靖) 9년에 아성 맹자(亞聖孟子)로 봉하였고, 청
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태조 7년(1398)에 문묘 서편 둘째번 자리에 배향하였다. 《한서(漢書)》주(注)에
'맹자의 자는 자거(子車)이다.' 하였고, 고영인(顧寧人 영인은 고염무(顧炎武)의 자)의《광운(廣韻)》뒤에 쓴 글에, "《예부운략(禮部韻略)》에서《광운》의 가(軻) 자의 주(注)를 인용하여 '맹자가 일생을 가난에
살다가[居貧] 불우하게 마친[轗軻] 때문에, 이름을 가(軻), 자를 자거(子居)라 했다.' 하였으나 지금《광운》가 자의 주에 그런 글이
없다." 하였는데, 위(魏) 나라 왕숙(王肅)의《성증론(聖證論)》에도 '맹자의 자는 자거(子居)이다.' 하였으며
상탄(常坦)의《종사명현전(從祀名賢傳)》에 '맹자는 맹손씨의 후예이다.' 하였다. 명 나라 장황(章潢)의《도서편(圖書編)》에,
"명 나라 홍무(洪武) 5년(1372)에 맹자의 문묘 배향을 철폐시켰다가
1년쯤 되어 다시 복원시켰다." 하였고, 《패사(稗史)》에, "명 태조가《맹자》를 읽다가 이루(離婁)편에 '임금을 초개(草芥)나 구수(寇讐)처럼 본다.'는 말을 보고 매우 불가하게
여겨 문묘의 배향을 철폐시키려 하면서, 이를 만류하는 자는 역신(逆臣)을 부종(附從)한 법률로 단정, 금오(金吾)로 하여금 사사(射死)시키도록
엄명을 내렸는데, 예부상서(禮部尙書) 전당(錢唐)이 널[櫬]을 메고 들어와 가슴을 드러내고 화살을 받으면서 '신이 맹가(孟軻)를 위하다가
죽는다면 죽어도 남은 영광이 있을 것이다.' 하므로 태조가 그 정성에 감동되어 태의(太醫)로 하여금 치료케 하였고 배향도 철폐되지
않았다." 하였다. 맹자가 주 열왕(周烈王) 4년 4월 2일에 출생하였는데《산당사고(山堂肆古)》에 '맹자가 주
정왕(周定王) 37년 4월 2일에 출생했다.' 하였다. 그러나 정왕은 왕위(王位)에 있은 지가 21년뿐이었고 또 공자(孔子)가 출생하기 수십 년
이전이 되므로 이 말은 옳지 않다. 맹자가 졸(卒)한 해로 미루어 보면 출생한 해를 마땅히 주 열왕 4년으로 보아야 한다.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응소(應劭)ㆍ조기(趙岐)나 《공총자(孔叢子)》에서 모두 '직접 자사에게 수업했다.' 하였다. 그러나 삼가
상고해 보면, 자사가 위후(衛侯)와 만났을 때는 그 나이가 이미 1백 세를 넘었고 또 그 뒤로 6년이 되어서야 맹자가 출생하였으니 절대로
자사에게 수업할 수 없는 일이다. 맹자가 주 난왕(周赧王) 26년(서기전 289) 정월 15일에 84세를 1기로
졸(卒)하였다.《산당사고》에 '맹자가 주 난왕 26년 정월 15일에 84세를 1기로 졸했다.' 하였고《격치총서(格致叢書)》에 '맹자가 주 난왕
26년 11월 15일에 84세를 1기로 졸했다.' 하였으니, 두 말이 서로 부합되는 듯하나 정월과 11월이 다르며, 명 나라
왕세정(王世貞)의《완위여편(宛委餘篇)》에 '맹자가 주 정왕(周定王) 37년 4월 2일에 출생하여 주 난왕 26년 정월 15일에 84세를 1기로
졸했다.' 하였으니, 그
당시의 정월 15일은 곧 후세의 11월 15일이다. 경재(敬齋) 이치(李治)의《고금주(古今黈)》에, "《맹자》에 '진 중자(陳仲子)의 형(兄)인 대(戴)가 합(蓋) 땅에서 받는 녹(祿)이
만종(萬鍾)이나 된다.' 하였는데, 대합(戴蓋)은 타는 수레[乘軒]이다." 하였다.《맹자외편(孟子外篇)》에
대하여《일지록(日知錄)》에, "《시경(詩經)》유천지명(維天之命)의 전(傳)에
맹 중자(孟仲子)의 말을 인용하여 '천명(天命)의 다함 없음[無極]을 말하여 주(周) 나라의 예(禮)를 찬미했다.' 하였고《시경》비궁(閟宮)
전에도 맹 중자의 말을 인용하여, '비궁은 바로 매궁(禖宮 후직(后稷)의 어머니인 강원(姜嫄)의 사당)이다.' 하였고,《정의(正義)》에
조기(趙岐)의 말을 인용하여 '맹 중자는 맹자의 종제(從弟)로 맹자에게 배운 자이다 한다.' 하였고 보(譜)에는 '맹 중자는 자사(子思)의
제자이다. 일찍이 맹가(孟軻)와 함께 자사를 섬기다가 뒤에는 맹가에게 배워서 글을 짓고 시(詩)를 논했다.' 하였는데 모씨(毛氏)가 그 말을
채택 인용하였으니, 이는 맹 중자의 글이 따로 있는 것이다." 하였고, 육기(陸璣)의《시초목소(詩草木疏)》에,
"자하(子夏)는 노(魯) 나라 사람 신공(申公)에게, 신공은 위(魏) 나라
사람 이극(李克)에게, 이극은 노 나라 사람 맹 중자에게, 맹 중자는 조(趙) 나라 사람 손경(孫卿)에게, 손경은 노 나라 사람 대모공(大毛公
모형(毛亨)을 말한다)에게, 대모공은 소모공(小毛公 모장(毛萇)을 말한다)에게 전수했다." 하였다.
《맹씨보(孟氏譜)》에 '중자(仲子)의 이름은 고(睾)이니, 맹자의 아들이다.' 하였고《삼천지(三遷志)》에 '맹자가 전(田)씨를 맞이하여
중자를 낳았다.' 하였고 진 미공(陳眉公)의《니고록(妮古錄)》에도 '맹 중자의 이름은 고(睾)로 맹자의 아들인데, 보(譜)에 보인다.'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조씨(趙氏 조기(趙岐))의 주(注)를 따라서 '중자는 맹자의 종제이다.' 하였으니, 보(譜)의 말과 같지 않다.
서하(西河) 모기령(毛奇齡)의《학교문(學校問)》에, "맹자 어머니의
묘(墓) 주위에 맹자의 석상(石像)이 있으니, 묘문(墓門) 사이에 꿇어앉은 모습이다. 묘의 소재는 비록 분명히 말하지 않았으나 추향(鄒鄕)
사기산(四基山) 남쪽에 있는 맹자의 묘 부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왕부(王府)의 능(陵)은 대악로(岱岳路) 위에 있고 맹자의
묘(廟)는 그 아래에 있다." 하였다. 이것이 맹자의 파계(派系)와, 생졸(生卒)의 줄거리이다. 위숭(衛嵩)은,
"맹자가, 각국(各國)을 유력(遊歷)한 선후(先後)를 비록 상고할 수는 없으나
본서(本書《맹자》를 이름)를 가져 증거해 보면, 반드시 송(宋)에서 추(鄒)에 돌아왔다가 추에서 임(任)ㆍ설(薛)ㆍ등(滕)에 갔고 그 뒤
양(梁)ㆍ제(齊)에 간 것이다." 하였고, 고영인(顧寧人)은, "맹자가 제(齊)ㆍ양(梁) 두 나라에 있은 기간은 다 오래지 않았는데, 본서에는 제에 관한 기사가 특별히 많다. 다시
말하면 맹자가 일찍이 제의 경(卿)이 되었으므로, 적어도 4~5년간은 제에 있었을 것이다. 맹자가 양에 간 때는 혜왕(惠王)의 말년(임인)으로
양왕(襄王 혜왕의 아들)이 즉위(임인)하자마자 양에서 떠난 때문에 양에 관한 기사는 많지 않다. 그런데 '맹자가 혜왕 35년(을유)에 양에
갔었다.'는 말은, 혜왕의 다음 원년(을유)을 양왕(襄王)의 원년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리고《사기(史記)》와《맹자(孟子)》 서(序)에, "양 혜왕 35년에 맹자가
양에 갔었고 그 뒤 23년(정미)째 되어 제(齊)에서 연(燕)을 쳤는데 맹자가 마침 제에 있었다." 는 말은 맞지 않다.
《맹자》에 '맹자가 제(齊)에서 경(卿)이 되었다.' 한데 대하여《일지록》에, "맹자가 양(梁)에서는 손[客]이었으므로, 제왕(齊王)에게는 신(臣)이라 칭하고 양왕(襄王)에게는 신이라 칭하지
않았다." 하였다. 이것이 맹자의 출처(出處)에 대한 줄거리이다. 《맹자외편》은《맹자》이외에 있는 외서(外書)
4편으로 성선변(性善辨)ㆍ문설(文說)ㆍ효경(孝經)ㆍ위정(爲正)을 말하는데, 그 글이 넓고 깊지 않으니 맹자의 진작(眞作)이 아닌 것 같으나,
지금 대충 수록하려 한다.《일지록》에, "《사기》에 오피(伍被)가
회남왕(淮南王 한 고조(漢高祖)의 손자 안(安)을 말한다)에게 대답할 때《맹자》의 '은 주(殷紂)는 천자(天子)였으나 죽을 때는 필부(匹夫)보다
못했다.'는 말이 인용되었고, 양자운(揚子雲 자운은 양웅(揚雄)의 자)의《법언(法言)》수신(修身)에《맹자》의 '대저 뜻이 있어도 이르지 못하는
자는 있으나 뜻이 없이 이르는 자는 있지 않다.'는 말이 인용되었고,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에《맹자》의 '내가 하광(河廣)을
보고 선왕(先王)의 남은 덕화가 지극함을 알았다.'는 말이 인용되었고, 또《맹자》의 '요순(堯舜)의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 인용되었고,《주례(周禮)》대행인(大行人) 주에《맹자》의 '제후(諸侯)에게는 왕사(王事 제후가 왕에게
조회하는 일)가 있다.'는 말이 인용되었고, 송 나라 포조(鮑照)의 하청송(河淸頌)에 《맹자》의 '천년 만에 성인(聖人)이 한번씩 나오는 것은
마치 아침이 가면 저녁이 오는 것과 같다.'는 말이 인용되었고,《안씨가훈(顔氏家訓)》에《맹자》의 '그림자를 그리니, 그 본형(本形)을
상실한다.'는 말이 인용되었고,《양서(梁書)》처사전 서(處士傳序)에《맹자》의 '지금 사람들은 작록(爵祿)에 있어, 얻으면 금방 살아난 듯하고
잃으면 금방 죽는 듯한다.'는 말이 인용되었고,《광운(廣韻)》규 자(圭字) 주에《맹자》의 '64서(黍)가 1규(圭)가 되고 10규(圭)가
1홉[合]이 된다.'는 말이 인용되었고,《맹자집주(孟子集註)》 가운데 정자(程子)가 《순자(荀子)》에서 '맹자가 세 차례나 제왕(帝王)을
만나고도 행사(行事)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므로 문인(門人)이 의아해하자 맹자가, 「내가 우선 제왕의 사심(邪心)부터 다스려 주어야겠다.」
했다.'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지금의《맹자》에 이런 말들이 한 대문도 없으니, 이른바 《맹자외편》의 글이 아닌지 모른다."
하였다. 그리고《사기(史記)》 색은(索隱)에 인용된 황보밀(皇甫謐)의 말에 "맹자가 '우(禹)는 석뉴(石紐)에서 났는데, 서이(西夷) 사람이다.' 했다." 하였는데, 아마
《맹자》에 '순(舜)은 제풍(諸馮)에서 났다.'는 말의 잘못인 것 같으며,《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맹자》가 11편이다.'
하였고,《풍속통(風俗通)》에 '맹자가 중(中)ㆍ외(外) 11편의 글을 지었다.' 하였으나 지금에 전해지지 않으니, 이른바 《맹자외서》 4편은
이미 없어진 것이다.《일지록》에, "맹자가《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 29가지인데, 지금《논어》에 보이는 것은 8가지로서, 예를 들면,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을에 인후(仁厚)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과 "임금이 막 훙(薨)하였을
적에는 모든 국정(國政)을 수상[冢宰]의 결재에 따른다."는 것과 "위대하다, 요(堯)의 임금됨이여." 한 것과 "제자들아, 북[鼓]을 울려
성토(聲討)하라."는 것과 "오당(吾黨)의 사(士)가 광간(狂簡: 뜻은 크나 실천이 소홀한 자)하다."는 것과 "향원(鄕愿 : 근실한 척하여
남의 추앙을 받는 자)은 덕을 해치는 적(賊)이다." 한 것과, "그럴 듯하면서도 아닌 자를 미워한다."는 유이다. 그 인용된
바가《논어》와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 부자(夫子 공자를 말한다)의 말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니(仲尼)가 간 뒤에 그
은미한 말들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였다.《일지록》에, "《맹자자양(孟子字樣)》에 '구경(九經 여기는 역(易)ㆍ시(詩)ㆍ서(書)와 3전(傳), 3예(禮)를 말한다)과《논어》는
다 석경(石經 돌에 새긴 경서(經書))을 근거로 한 때문에 자체(字體)가 변하지 않았으나《맹자》의 자체는 많이 지금것에 가까우니, 예를 들면, 지(知) 자는 지(智) 자로, 열(說) 자는 열(悅) 자로, 여(女) 자는 여(汝)
자로, 피(辟) 자는 피(避) 자로, 제(弟) 자는 제(悌)자로, 강(彊) 자는 강(强) 자로 많이 써서《논어》와는 다르다. 이는
위(魏), 진(晉) 이하 오랫동안 전록(傳錄)해 온 데서 변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석경(石經)의 공로 또한 적지 않다. 또《당서(唐書)》에
'빈주(邠州)는 이전에는 빈주(豳州)로 써 오다가 개원(開元) 13년(725)에 빈(豳) 자 모양이 유(幽) 자와 비슷하다 하여 빈(邠) 자로
고쳤다.' 하였는데, 지금《맹자》에만 빈(邠)자로 씌어졌다." 하였다.《정자통(正字通)》에, "주희(朱熹)의 아버지 이름이 송(松) 자이나《강목(綱目)》에서 아예 휘(諱)하지 않았는데, 송
광종(宋光宗)의 휘인 돈(惇) 자에 대해서는 사서집주(四書集註)에 돈 자가 있지 않다. 예를 들면,《맹자》호변(好辯)장에 돈전(惇典)이
후전(厚典)으로 고쳐진 것은 그 당시 그 문인이 임금 앞에 글을 기록해 바칠 때 돈자를 휘(諱)해버린 때문이다." 하였다.
《맹자》의 '필유사언이물정심(必有事焉而勿正心)'에 대하여《일지록》에, "예 문절(倪文節 문절은 시호, 이름은 사(思))이 '필유사언이물망 물망 물조장(必有事焉而勿忘 勿忘 勿助長)'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전사(傳寫)의 착오에 의하여 망(忘) 자로 써야 할 것을 정심(正心) 두 자로 씌어진 것이다.' 하였다. 말하자면,
호연(浩然)의 기(氣)를 기르려 할 적에는, 즉 목표로 하는 일이 있을 적에 그것을 잊지 않아야 하고 이미 잊지 않았으면 또 미리 조장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망(勿忘)을 두 구절로 겹쳐 쓴 것은 작문법(作文法)의 한 가지이다." 하였다. 경재(敬齋)
이치(李治)의《고금주(古今黈)》에, "《맹자》에 '차비화자 무사토친부
어인심독무교호(且比化者 無使土親膚 於人心獨無恔乎)'라 하였는데, 비(比) 자는 본시 친비(親比)라는 비 자의 뜻이지만 미친다[及]의 뜻으로
풀이해도 된다. 다시 말해서 시체가 화삭(化鑠 썩고 삭는다는 뜻)하는 시기에 미쳐[比及]로 보아야 하는데, 회암(晦庵 주희(朱熹)의 호)이
비자를, '죽은[化] 이를 위[爲]한'다의 뜻으로 풀이하였으니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맹자》의 '위장자절지(爲長者折枝)'에 대하여
주자집주(朱子集注)에 '어른을 위하여 초목(草木)의 가지를 꺾어 준다.'로 풀이하였는데,《문선(文選)》광절교론(廣絶交論)의 '포복위이
절지지치(匍匐逶迤折枝舐痔)'의 주를 상고해 보면, 조기(趙岐)의 맹자주(孟子注)를 인용하여 '절지는 긁는 것[搔擺]이다.'로 풀이하였고
또《예기(禮記)》의 경억소지(敬抑搔之) 주에도 '절지는 긁는 것[爬搔]이다.' 하여, 후세에 이를 변론하는 선비들이 많다."
하였다.《일지록》에, "《맹자》의 인이치지장악지간(引而置之莊嶽之間)
주에 '장악은 제(齊)의 가리(街里)의 이름이다.' 하였는데, 장은 가로(街路)의 이름이고 악은 마을의 이름이다.《좌전(左傳)》양공(襄公)
28년 조를 보면, 득경씨지목백거어장(得慶氏之木百車於莊) 주에 '장은 여섯 굴대[六軌]가 달릴 만한 길이다.' 하였고, 이어 반진우악(反陳于嶽)
주에 '악은 마을의 이름이다.' 했다." 하였다. 《맹자》의 유위신농지언(有爲神農之言) 주에, "허행(許行)은, 사마천(史馬遷)이 말한 농가류(農家類)이다." 하였고,
김인산(金仁山 인산은 원 나라 김이상(金履祥)의 호)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말함)의《육가이동(六家異同)》에는 농가류가 언급되지 않았고, 반고(班固)의《한서》예문지(藝文志)에 구류(九流)로 분류하여 비로소
농가류가 언급되었다." 하였는데, 주자집주(朱子集註)에서 우연의 착오를 미처 고치지 못한 것이다. 송 나라
손곡상(孫穀祥)의《야로기문(野老紀聞)》에, "제(齊) 나라 지방에 고(蠱)의
유가 있다. 그 중에 큰 지렁이[蚯蚓]를 사람들이 곡선(曲善)이라 하는데, 땅을 주름잡아[擘地]서 다니고 울 적에는 소리가 난다."
하였으니,《맹자》에 '나는 반드시 중자(仲子)를 거벽(巨擘)으로 여긴다.'는 거벽은 바로 큰 지렁이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인이후충기조(蚓而後充其操) 주에 '거벽은 엄지손가락이다.' 한 말은 잘못으로 본다. 또《맹자》에 '금지여양묵변자 여추방돈 기입기립
우종이초지(今之與楊墨辨者 如追放豚 旣入其苙 又從而招之)'라 한 데 대하여 말하는 이가 '입(苙)은 우리[闌]이다.'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입은
백지(白芷 향초(香草) 이름)의 이명(異名)으로 돼지가 즐겨 먹는 풀이다. 즉 이미 제 갈 데로 가버린 양묵(楊墨)을 다시 불러들이려 하는
것은, 사설(邪說)을 잘 퇴치시키는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하(西河) 모기령(毛奇齡)이, "정전제(井田制)가 황제(黃帝) 때에 시작된 것은 예부터 그 명문(明文)이 있는데 주씨(朱氏 주희(朱熹)를 이름)만이
'상(商) 나라에서 맨 처음 정전제를 실시했다.' 한다. 그러나《시경》신남산(信南山)의 '저 남산(南山) 밑은 본래 우(禹)가 다스렸다.'는
것은 물론,《좌전》애공(哀公) 원년에 '하 소강(夏少康)이 겨우 밭 1성(成 사방 10리를 말함)에 군사 1여(旅 5백 명을 말함)가
있었다.'는 것과《예기》왕제(王制)의 '3부(夫)가
1옥(屋)이 되고 3옥이 1정(井)이 된다.'는 것도 다 우(禹)의 제도를 말한다. 그리고《서경(書經)》익직(益稷)에 '우(禹)가 「내가
아홉 개의 내[川]를 터서 네 개의 바다로 흐르게 하고 견(畎)과
회(澮)를 파서 내[川]로 흐르게 했다.」한다.' 하였고,《논어》태백(泰伯)에도 '우(禹)는 구(溝)와
혁(洫)에 온 힘을 다했다.' 하였으니, 정전제는 분명 하(夏) 나라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맹자》를 주해(注解)하면서, 정전제가 상
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지적(地積)은 보(步)로는 기준할 수 있으나 척(尺)으로는
기준할 수 없다. 주(周) 나라 제도에 6척(尺)을 1보(步)로, 1백 보를 1묘(畝)로 하였으므로 상(商) 나라에서는 반드시 6척을 1보로,
70보를 1묘로 하였을 것이니, 지금 제도에서 6척을 1궁(弓)으로, 2백 40궁을 1묘로 하는 비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보만 궁으로 고치고
척은 고치지 않은 것을 보면, 지적(地積)의 장단(長短)을 전혀 척만 가지고는 측량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고정림(顧亭林
고염무(顧炎武)의 호)이,《맹자》의 '그 결과는 모두 10에서 1을 받는 세제(稅制)이다.'는 말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예로부터 전부(田賦)의 제도는, 사실 우(禹)가 수토(水土)를 정리한 뒤에 상ㆍ중ㆍ하 등의
토질(土質)을 참작, 전부를 부과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다. 후세의 왕자(王者)들은 이것을 그대로 준용(準用)해 왔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시경》신남산(信南山)에 '저 남산 밑은 본래 우(禹)가 다스리던 곳, 잘 개간된 들판과 습지에 종손(宗孫)이 와서 밭갈이하누나.
경계를 정하고 도랑을 치니, 두둑이 남과 동으로 이어졌네.' 하였으니, 그렇다면 주(周) 나라에서 경지를 정리한 것도 끝내 우(禹)의
유법(遺法)인 것이다.《시경》신남산에 대한《공씨정의(孔氏正義)》에도 '구승(丘乘)의
법은 우(禹)가 실시한 것이다.' 하였다.《맹자》에 '하후씨(夏后氏)는 50묘(畝)로 공법(貢法)을, 은(殷) 나라 사람은 70묘로
조법(助法)을, 주(周) 나라 사람은 1백 묘로 철법(徹法)을 실시했다.' 하였는데, 정전(井田)의 제도는 1정(井)의 경지(耕地)를 아홉으로
구획(區劃)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순(蘇洵)이 '만부(萬夫)의 경지는 방(方) 33리(里) 반(半)이 되는데, 그 사이에는 천(川)과
노(路)가 한 개씩이고 회(澮)와 도(道)가 아홉 개씩이고 혁(洫)과 도(涂)가 1백 개씩이고 구(溝)와 진(畛)이 1천 개씩이고 수(遂)와
경(徑)이 1만 개씩이니, 하(夏) 나라에서 꼭 50묘씩으로, 은 나라에서 꼭 70묘씩으로, 주 나라에서 꼭 1백 묘씩으로 정하였다면 한
왕자(王者)가 새로 나올 적마다 반드시 진도(畛涂)를 고치고 구혁(溝洫)을 바꾸고 도로(道路)를 옮겨야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괜히 번잡스럽기만
하고 백성에게는 아무 이익도 없을 것이니 어찌 그러하였겠는가.' 하였다. 대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에 백성에게
부세(賦稅)를 거둬들이는 데의 차이점은 공법ㆍ조법ㆍ철법의 명칭이 다를 뿐, 50묘ㆍ70묘ㆍ1백 묘의 다소(多少)에 있지 않다. 50묘니 70묘니
1백 묘니 하는 것은 사용되는 장척(丈尺)이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이고 경지가 많아지거나 적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모두 10에서
1을 받는 세제(稅制)이다.' 한 것이다. 옛적에 새로 나온 왕자(王者)는 으레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고 도수(度數)를
달리했다.《예기》왕제(王制)에 '옛적에는 주척(周尺)으로 8척(尺)을 1보(步)로 하였고, 지금의 주척은 6척 4촌(寸)을 1보로 한다.'
하였으니, 그 당시 시세에 맞추어 제정하였던 점도 들 수 있다. 한 나라 때에는 토지는 넓고 인구는 드문 때문에 그 묘수(畝數)가 많았고,
은ㆍ주 때에는 토지가 바뀌고 인구가 많은 때문에 그 묘수가 점차 적어져서 한 나라 때의 1묘를 2묘로 만들었으니, 그 명칭은 다르나 결과는
마찬가지이다.《좌전》성공(成公) 2년에 '국좌(國佐)가 진(晉) 나라 사람에게, 「선왕(先王)이 천하의 토지를 정리, 그 토질에 맞는 식물을
재배하여 그 이익을 얻도록 했다.」한다.' 하였으니, 삼대 시대의 왕자가 어찌 그처럼 번잡하기만 하고 백성에게 아무 이익도 없는 일을
했겠는가?" 《맹자》의 '부모에게 불순(不順)한 사람이다.' 한 데 대하여《일지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서경》요전(堯典)에 '요(堯)가 「나도 들었지만 어떠하더냐?」 묻자
사악(四岳)이,「고수(瞽瞍)의 아들로 아비는 미련하고 어미는 사납고 아우 상(象)은 교만한데도 능히 효우(孝友)로써 화합, 그들로 하여금 차츰
선(善)으로 자치(自治)하여 간악한 데 이르지 않게 했다.」 대답했다.' 하였으니, 요(堯)가 순(舜)을 등용한 시기는 고수가 마음을 돌린
이후가 된다. 그런데 지금《맹자》에 '요(堯)가 아홉 아들과 두 딸로 하여금 백관(百官)ㆍ우양(牛羊)ㆍ창름(倉廩)을 가져 순(舜)을
초야(草野)에서 섬기도록 하였으나…… 순은 자신이 부모에게 불순하였다 하여, 마치 돌아갈 데 없는 궁한 사람의 심정과 같았다.' 하였으니, 이는
사실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성인(聖人)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천하의 자식된 자들로 하여금 그 마음가짐이 그러해야만 큰
효(孝)가 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인데, 후세의 선비들이 그것을 사실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두 형수(兄嫂)에게는 나의 침실을
맡기겠다.'는 상(象)의 터무니없는 말도 그대로 믿어야 될 것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예기》단궁(檀弓)에 '공자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때문에 그 묘(墓)를 알 수 없었다.'는 데
대하여 선유(先儒)들도 이미 의심해 왔는데, 여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한 가지 증언이 있다. 즉《중용(中庸)》에 '자식된 도리로 말하면 나는
아버지를 잘 섬기지 못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부자(夫子)는 일찍이 아버지를 모셨던 것이다. 또《맹자》에 '먼저는 선비의 신분으로 아버지의
상(喪)을, 뒤에는 대부(大夫)의 신분으로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먼저는 삼정(三鼎 선비의 제례(祭禮))으로 아버지의 제사를, 뒤에는 오정(五鼎
대부의 제례)으로 어머니의 제사를 모셨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맹(孔孟)이 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치에 가까운 말이다. 《맹자》의 '자제장어노(自齊葬於魯)'에 대하여《일지록》에,
"맹자는 '제(齊)에 있다가 노(魯)로 가서 장사(葬事)했다.'는 것은 장사를
말한 것이고 상사(喪事)를 말한 것이 아니다. 즉 개장(改葬)을 말한 것이다.《의례(儀禮)》에 '개장할 적에는 시마복(緦麻服)을 입었다가 장사가
끝나면 곧 벗어버린다.' 하였으므로, 맹자가 다시 제(齊)로 돌아와 영(嬴) 땅에 머물렀고 또 충우(充虞)가 그 짬을 내어 물었던 것이다. 만약
분상(奔喪)하였다가 돌아올 만큼 급박한 시기였다면 장사가 끝나자마자 곧 제경(齊卿)으로 출사(出仕)하였을 것이고 또 충우도 말을 물어볼 만한
짬이 없었을 것이니, 이는 전(傳)에 말한 대로 '공자(孔子)가 석 달 동안 출사하지 못하게 되면 그 마음이 초조하였다.'는 예와 같다고
하겠으나, 자신이 부모의 삼년상(三年喪)을 입지 않고서야 어떻게 등(滕) 나라의 세자(世子)를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맹자》에 '삼숙이출주(三宿而出晝)'라 한 데 대하여 주자는 '마땅히 획(畫)자로 보아야 한다. 제 나라에 획읍(畫邑)은 있으나
주자가 든 지명(地名)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맹자》에 의심난 곳이 어찌 이뿐이랴. 지금 그 대충만 제시하는 바이다. 맹자의
제자들 가운데 상고할 만한 이로는《폭서정집(曝書亭集)》에, "악정자
극(樂正子克)은 송 나라 정화(政和) 연간에 이국후(利國侯) 조기(趙岐)가
"노(魯)의 신하이다." 하였다. 를, 만자 장(萬子章)은 박흥백(博興伯)을, 공손자 추(公孫子丑)는 수광백(壽光伯)을, 호생자
불해(浩生子不害) 호생자를 혹은 고자(告子)라 한다. 는 동아백(東阿伯)
조기가 "제(齊) 나라 사람이다." 하였다. 을, 맹 중자(孟仲子)는
신채백(新蔡伯) 조기가 "맹자의 종제(從弟)이다." 하였다. 을, 진자
진(陳子螓)은 봉래백(蓬萊伯)을, 충자 우(充子虞)는 창락백(昌樂伯)을, 옥려자 연(屋廬子連)은 봉부백(奉符伯)을, 서자벽(徐子辟)은
선원백(仙源伯)을, 진자 대(陳子代)는 기수백(沂水伯)을, 팽자 갱(彭子更)은 뇌택백(雷澤伯)을, 공도자(公都子)는 평음백(平陰伯)을, 함구자
몽(咸丘子蒙)은 수성백(須城伯)을, 고자(高子)는 사수백(泗水伯) 조기가 "제 나라
사람이다." 하였다. 을, 도자 응(桃子應)은 교수백(膠水伯)을, 분성자 괄(盆城子括)은 내양백(萊陽伯)을 추증(追贈)하였고 또
등자 갱(滕子更)이 있다." 하였다. 오내(吳萊)가, "맹자의 학문은 증자(曾子)와 자사(子思)에게서 나온 것인데, 순경(荀卿) 같은 이도 덩달아서 '세속의
구유무유(溝猶瞀儒 모두 어리석다는 뜻)한 자들이 잔뜩 떠들어대면서 선왕(先王)을 대충 본받았답시고 지난 것을 들어 말을 지어내어 그 정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과 달라, 치법(治法)에 있어 후왕(後王)을 본받을 뿐이다.' 조롱하였으니, 구유무유한 자들이란 바로
만장(萬章)ㆍ공손추(公孫丑) 등을 지적한 말이다. 순경은 전국 시대에서 대유(大儒)란 호칭을 받았으면서도 같은 문(門)에서 호(戶)를 달리한
바가 이와 같았다." 하였다. 《일지록》에, "조기(趙岐)가 주(注)한《맹자》를 상고해 보면 '계손(季孫)과 자숙(子叔)은 엄연히 두 사람으로 모두 맹자의
제자이다. 즉 계손이, 맹자가 시자(時子)의 호의를 사절하려는 것을 알고 기어이 맹자로 하여금 사절하지 않도록 종용하기 위하여, 「이상합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숙도 이해할 수 없다고 내심 의아해하면서, 시자의 호의를 받아들였으면 하고 있습니다.」한 것이고
사기위정(使己爲政) 이하는 맹자의 말이다.' 했다." 하였다. 선공(宣公) 손석(孫奭)도 이 설을 따른 때문에,
"정화(政和) 5년(1115)에 태상시(太常寺)의 건의에 따라 계손을
풍성백(豐城伯)으로 자숙을 승양백(乘陽伯)으로 추증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집주(集註)가 나온 뒤로부터 비난이 시작되어 세상에서 조(趙)씨의
설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 오입부(吳立夫 입부는 원 나라 오내(吳萊)의 자)가《맹자제자열전(孟子弟子列傳)》2권을 찬(撰)한바 그 전서(全書)는
비록 전해지지 않지만 그 서(序)에 '맹자의 제자가 19명이다.' 하였으니, 이는 주자의 설을 따라서 계손ㆍ자숙 두 사람을 삭제하지 않고
거기다가 등갱(滕更)을 더 넣어 19명의 수로 되었다.《맹자》진심(盡心)편을 상고해 보면 공도자(公都子)가 '등갱이 문하(門下)에 있을 때'라
말한 대문에 조기가 주하기를 '등갱은 등 나라 임금의 아우로 맹자를 찾아와 배웠다.' 하였으니, 맹자의 제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송 나라 때
태상시(太常寺)의 건의에 어찌 등갱에게만 작호(爵號)가 추증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사기》색은(索隱)에는 '공명고(公明高)는
맹자의 제자이다.' 하였고《광운(廣韻)》주에는 '이루(離婁)는 맹자의 문인이다.' 하였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말이므로 군자(君子)가 믿지
않는다. 그리고《광운》주의 구(丘) 자 해석에 '제(齊) 나라에 만구(曼丘)가 있었다.' 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맹자》7편에
그런 글이 보이지 않으니, 만구를 맹자의 제자라 해야 할는지 제자가 아니라 해야 할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하였는데, 이는 죽타(竹坨) 주이준(朱彝尊)의 말이다. 고영인(顧寧人)이 조기(趙岐)의 말을 인용하여, "고자(告子)의 이름은 불해(不害)로 유자(儒者)와 묵자(墨者)의 도(道)를 겸치(兼治)한
사람인데, 일찍이 맹자에게 배웠으나 성명(性命)의 이치를 완전히 통하지 못하였고 또 고자(高子)는 제(齊) 나라 사람으로 맹자에게 배워
도(道)에 유의하였으나 정확하지 못한 채 그만 다른 학술을 배웠고, 또 분성괄(盆城括)은 일찍이 맹자에게 배우려 하여 도를 물었으나 통하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하였는데, 송 휘종(宋徽宗) 정화(政和) 5년에 모두 작호가 추증된 것은 맹자의 제자이기 때문이다.《사기》색은에 '만장ㆍ공명고
등은 다 맹자의 문인이다.' 하였고,《광운》 주에도 '이루(離婁)는 맹자의 문인이다.' 하였으나 어디서 근거된 말인지 알 수
없다." 하였다. 《회남자(淮南子)》를 상고해 보면, "황제(黃帝)가 현주(玄珠)를 잃어버리고는 이주(離朱)와 첩철(捷剟)을 시켜 찾도록 했다."
하였고, 그 주에 '이 두 사람은 다 황제의 신하이다.' 하였으며,《포박자(抱朴子)》에, "팽조(彭祖)의 제자에 이루공(離婁公)이 있었다." 하였는데, 이는 다 신빙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주이준이, "반씨(班氏 반고(班固)를
말한다)의《고금인표(古今人表)》를 보면 '맹자가 제2등에, 그 제자 공손추(公孫丑)가 제3등에,
만장(萬章)ㆍ악정자(樂正子)ㆍ고자(告子)ㆍ고자(高子)가 제4등에, 서자(徐子)가 제5등에 들고 나머지는 참여되지 못한다.' 했다."
하였다. 내가 상고해 보건대, 왕충(王充)이 자맹론(刺孟論)을, 풍휴(馮休)가 산맹론(刪孟論)을,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의맹론(疑孟論)을, 이태백(李泰伯)이 비맹론(非孟論)을, 조이도(晁以道)가 저맹론(詆孟論)을, 황차신(黃次辰)이 평맹론(評孟論)을,
순경(荀卿)이 또 비맹론(非孟論)을 소식(蘇軾)이 변맹론(辨孟論)을, 여윤문(余允文)이 존맹변(尊孟辨)을 지었다.《맹자》 7편은,
조기가《맹자》를 주(注)하면서 7편을 각 상하(上下)로 갈라 놓아 모두 14편이 되었고, 당 나라 육선경(陸善經)이 다시 7편으로 환원시켜
놓았는데, 송 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진종(眞宗)의 연호) 연간에 손석(孫奭)이 조서를 받들어《맹자정의(孟子正義)》를 찬(撰)할 때 조기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전의《사기(史記)》예문지(藝文志)에는 모두《맹자》를 유가(儒家)에 넣었고, 진직재(陳直齋 직재는 진진손(陳振孫)의
호)의《서록해제(書錄解題)》에 비로소《논어(論語)》와 함께 경전류(經典類)에 넣었는데, 마귀여(馬貴與 귀여는 마단림(馬端臨)의 자)가
지은《문헌통고(文獻通攷)》의 경적고(經籍考)에서 그대로 따랐으며,
지금은《역(易)》ㆍ《서(書)》ㆍ《시(詩)》ㆍ《주례(周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ㆍ《좌전(左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ㆍ《논어(論語)》ㆍ《효경(孝經)》ㆍ《이아(爾雅)》와
함께 십삼경(十三經)으로 되었다.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맹자가
세교(世敎)에 큰 공로를 준 것은, 바로 사람의 본래 선(善)한 마음을 들어 인도한 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린이가 샘에 빠지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말로 사람의 측은(惻隱)해하는 마음을 지시하고, 멀리서 부르거나 발길로 차서 주는 것은 받지 않는다는 말로 사람의
수오(羞惡)하는 마음을 지시하고, 어린이도 자기의 어버이를 친애할 줄 안다는 말로 사람의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지시하고, 처(妻)와
첩(妾)이 서로 붙들고 흐느껴 운다는 말로 사람의 염치(廉恥)를 지시하고, 외물(外物)과 접하지 않은 아침에는 청명(淸明)한 기(氣)가
발로된다는 말로 누구나 선한 마음이 있음을 지시하고, 장사(葬事)를 너무 후하게 치른 듯하다는 충우(充虞)의 말에 혹 어버이의 시체를 구렁에
버린 뒤 썩는 것을 보게 되면 이마에서 진땀이 절로 솟는다는 말로 사람의 진정(眞情)을 지시하고, 죽으러 가는 소[牛]의 애처로운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제 선왕(齊宣王)의 말에 백성의 안보를 원칙으로 해야 함을 감동시켰으며, 풍악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에, 백성들과 함께 좋아해야 한다고 유도한 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본능을 들어 바른 개발점을 지시하여, 불인(不忍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곧 측은(惻隱)을 말한다)을 미루어 소인(所忍 하지 않을 일을 차마 하는 것. 곧 인의 반대를 말한다)을 버리게 하고 불위(不爲
하지 않을 일은 하지 않는 것. 곧 수오(羞惡)를 말한다)를 미루어 소위(所爲 당연히 해야 할 일)를 확충(擴充)시키게 한 것이다. 또
도덕(道德)을 논할 적에는 으레 요순(堯舜)을 지칭하였고 정벌(征伐)을 논할 적에는 으레 탕무(湯武)를 들어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政事)를 시행한다.'는 말로 묶어 오패(五霸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ㆍ진 목공(秦穆公)ㆍ송
양공(宋襄公)ㆍ초 장왕(楚莊王))의 패도(霸道)를 비루하게 여겼고, 양(楊)ㆍ묵(墨)을 금수(禽獸)에 비유하여 '처음에는 그 마음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정사(政事)를 망친다.'는 말로 묶어 놓았다. 끝으로 '임금의 그른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말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백성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말과 '사람이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그대로 실현시키기 위함이다.'는 말과 '지금 제(齊)를 천자(天子) 나라로 만들자면
마치 손바닥 뒤집듯 쉽다.'는 말들도 어느 것인들 이 본심을 가져 운용(運用)한 바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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