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釣耕) 장문익(蔣文益)

순암선생문집(順菴集) 제25권     안정복

  행장(行狀)
  봉정대부 수 군기시 부정 오휴당 안공 행장(奉正大夫守軍器寺副正五休堂安公行狀)기묘년
 
우리 안씨(安氏)의 본관은 광주(廣州)인데, 중세(中世)에 영남(嶺南)에 이주하여 영남에서 이름난 분이 많이 태어났다. 중랑장(中郞將) 휘 국주(國柱)와 이분의 아들인 생원(生員) 휘 강(崗)과 휘 강의 증손인 사간(司諫) 휘 구(覯)와 휘 구의 손자인 옥천 선생(玉川先生) 휘 여경(餘慶)과 휘 여경의 아들 정랑(正郞) 휘 숙(璹) 및 손자인 동만(東巒) 휘 상한(翔漢)이 그러한 분들이다. 중랑장공 부자는 고려가 망하자 지조를 지켰고, 사간공은 조정에 있으면서 청백하였으며, 옥천공은 예학(禮學)에 밝았는데 관산서원(冠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정랑공은 혼조(昏朝 광해조) 때에 벼슬하지 않았고, 동만공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국난(國難)에 달려갔으니, 아, 훌륭하여라. 시(詩)와 예(禮)의 명성이 빛나는 가문이었다.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이 사간공, 정랑공의 묘지(墓誌)를 지었고 《옥천집(玉川集)》의 서문(序文)을 썼으며, 나도 동만공의 행장을 지었다. 그런데 종인(宗人) 경현(景賢) 씨가 그의 5대조 오휴공(五休公)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왔는데, 오휴공은 바로 사간공의 봉사 현손(奉祀玄孫)이자 옥천공의 재종질이며, 정랑공의 형이고 동만공의 백부이다.
공의 휘는 신(㺬)이고 자는 대지(待之)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다. 24세 때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같은 고을 사람인 병사(兵使) 김태허(金太虛)의 막하(幕下)를 따르며 계획하여 도운 일이 매우 많았으므로 난리가 평정되자 조정에서 공을 기록하여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고 밀양(密陽)의 고향에 돌아와서 명리(名利)를 초개(草皎)처럼 여기고 경전(經傳)에 전심하였으며, 《소학(小學)》과 《심경(心經)》을 매우 좋아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 노력하였다.
이 때에 왜적(倭賊)의 전란(戰亂)을 갓 치른 뒤라서 예문(禮文)이 손실되었기에 《주자가례(朱子家禮)》에다가 우리 나라 유현(儒賢)들의 말을 참고로 하여 질(質)과 문(文)이 적합하게 한 내용의 《가례부췌(家禮附贅)》란 책 6권을 저작하였다. 그리고 지평(持平) 이신(李申),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 문충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 우졸자(迂拙子) 박한주(朴漢柱),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은 밀양의 향선생(鄕先生)이었는데, 시대가 오래 되어 이분들의 언행이 인몰되었으므로 《오현전(五賢傳)》을 지어 드러내어 밝혔다. 또 우리 나라와 중국 두 나라의 자음(字音)을 구별하여 방언(方言)으로 주석을 달아 《자해(字解)》 2권을 저술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모두 이처럼 우리 학문에 도움이 되고 실천성이 없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소강절(邵康節)의 학문을 깨달았으니, 작은 수(數)로는 12벽괘(辟卦)를 추연(推衍)하되 1월은 30분, 1기(氣)는 15분으로 나누어 음(陰)과 양(陽)의 기운이 오르내리며 추위와 더위가 다가오고 밀려나는 뜻을 밝히고, 큰 수로는 12회(會)를 추연하되 60년을 1주(周)로 삼고 1백 80주를 1회로 삼아 1회를 1월에 해당시키고 반회를 1기에 해당시켜 치란(治亂) 및 득실(得失)과 음양이 자라고 사라지는 이치를 밝힘으로써 일가(一家)의 견해를 이루었다.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조경(釣耕) 장문익(蔣文益)은 모두 영남에서 명망이 높은 분들인데, 공은 이분들과 사우(師友)가 되어 나이가 많아질수록 학문이 더욱 깊어지고 덕이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사는 곳의 성만(星巒)에다 정자를 짓고 현판을 오휴당(五休堂)이라 하였는데, 대체로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고 만족할 줄을 안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륜에 더욱 돈독하였으니, 여러 조카들을 친아들처럼 보살피면서 재산을 나누어 주어 그들의 곤궁한 것을 풍족하게 하였고, 정랑공과는 우애롭고 화락하게 대하면서도 간절히 타이르며 가르침이 있는 도움을 주었다. 정랑공이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을 때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는데, 공이 늘 출처(出處)의 도리로 충고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랑공이 혼조(昏朝) 때 절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공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젊었을 때 옥천공에게 수업하였고 만년에는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 장여헌(張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노닐며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더 들어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학문이 유래한 연원이다.
참봉 휘 영(嶸), 생원 휘 수연(守淵), 증 참판(贈參判) 휘 광소(光紹)는 공의 증조, 조부, 부의 삼대가 되고, 어머니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증 참의(贈參議) 이교(李郊)의 딸이며 좌상(左相) 이원(李原)의 오대손이다. 공은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 2)에 태어나 숭정(崇楨) 갑신(1644) 5년 후인 무자년(1648, 인조 26) 6월 5일에 별세하였으니, 향년이 80세이다. 모월일(某月日)에 금포(金浦) 선영(先瑩)의 자좌(子坐) 자리에 장사하였다. 전배(前配) 담양 이씨(潭陽李氏)는 참봉 이염(李恬)의 딸이고 후배(後配)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첨사(僉使) 정기남(鄭奇男)의 딸인데, 모두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전에 지은 행장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에,
“공의 성품은 순진하고 기량은 깊었으며, 몸가짐은 순박하기에 힘쓰고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으며, 가정 생활은 몸과 행실을 근신하여 한결같이 검소하였다.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기만 하여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선조(先祖)를 받드는 일에 있어서는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정랑공과 함께 영천(永川)에 피난 갔는데, 어느 날 밤 꿈에 사간공(司諫公)이 와서 발로 차 깨우며 이르기를, ‘왜적이 나의 무덤을 파냈으니, 너는 급히 가서 구제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놀라 깨어나 정랑공과 함께 밤에 달려갔더니, 과연 사간공의 묘소가 발굴되어 체백(體魄)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공이 목이 쉬도록 통곡하며 다시 염하여 흙을 져다 봉분을 쌓았는데, 당시 듣는 이들이 모두가 공의 효성에 대해 탄식하였다. 공이 마을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침묵을 일삼으며 시속에 따라 행동하여 사람들과 달리 행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을 대할 경우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샀다. 이리하여 간혹 마을에 나가면 사람들이 서로 자리를 내놓고 기다리며 말하기를, ‘오휴공께서 오신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모두 직접 목격하고 사실을 기록한 말이니, 이로써 공의 평소의 일을 알 수 있다.
공이 둔 자식으로는, 정씨(鄭氏)가 낳은 3남은 종한(宗漢), 유한(維漢), 준한(俊漢)이고, 측실(側室)이 낳은 2남은 충한(忠漢)과 운한(雲漢)인데 충한은 무인(武人)으로서 만호(萬戶)이다. 종한은 1남 1녀를 두었고, 유한은 5남 2녀를 두었고, 준한은 3남 4녀를 두었으며, 충한은 4남 3녀를 두었고, 운한은 1녀를 두었으니, 지금 내외의 자손이 번창하여 1백여 명이나 된다.
경현(景賢) 씨가 서로 종인(宗人)의 사이라 하여 너무 지나치게 나를 믿고는 전에 《가례부췌(家禮附贅)》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교정을 받아 갔는데, 지금 또 나로부터 공의 행장을 지어 받아 성호 선생(星湖先生)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청하려고 하기에, 나는 사절하지 못하고 삼가 차례대로 기록하기를 이상과 같이 하였다. 종인인 후학(後學) 정복(鼎福)은 삼가 행장을 쓴다.

 

모친은 아산장씨(牙山蔣氏)로 처사 희적(熙績)의 따님이다

순암선생문집 제21권
  묘표(墓表)
  송와처사 안공 묘갈명(松窩處士安公墓碣銘)병서. 기해년
 
송와처사 안공이 돌아가신 지 이미 20여 년이지만 묘도에 비석이 없었다. 이에 집안의 자제들이 아름다운 행적이 민멸할까 두려워 서로 모의하여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다. 그 아들 인복(仁復)씨가 이공 상정(李公象靖)에게 행장을 받아서 정복에게 편지를 보내 간청하기를, “나의 선고께서 그대의 선친과 침개(針芥)주D-006의 교분이 있었으니 오직 종친의 정의로 그러할 뿐만 아니었다. 나의 선묘에 일이 있는데 그대가 차마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복은 선대의 교분이 무거웠음을 생각하여, 비록 공의 문하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일찍이 훈계의 글을 받은 적이 있어 그 글이 책상자에 지금 남아 있으니,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명하(命夏), 자는 국화(國華)이고 선계는 광주(廣州)에서 나왔으며, 고려의 대장군 휘 방걸(邦傑)의 후예이다. 시조에서 몇 대를 내려와 시어사 휘 유(綏)에 이르러 처음으로 함안에 살게 되었고, 6대를 지나 참판 휘 엄경(淹慶)은 단종조의 충신인 감사 완경(完慶)의 형이다. 이 분이 예안 현감(禮安縣監) 휘 억수(億壽)를 낳고 또 밀양의 신포(薪蒲)로 이사했는데, 바로 공의 9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홍익(弘翼)이고, 조부의 휘는 응두(應斗)이고, 부친의 휘는 한걸(漢杰)인데 모두 문학으로 일컬어졌다. 모친은 아산장씨(牙山蔣氏)로 처사 희적(熙績)의 따님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단정하고 정성스러웠으며 총명한 재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서당의 스승에게 배웠는데 서당의 스승이 감탄하기를, “후일에 군자유(君子儒)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성해서는 금양(錦陽)주D-007이공(李公)이 옛 도로써 후진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폐백을 갖추어 편지로 가르침을 청하여, 사서(四書)·서명(西銘)·옥산강의(玉山講義) 등의 글을 배웠는데 이공이 자주 칭찬하였다. 또 이공의 아들 밀암(密庵) 재(栽),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곡천(谷川) 김상정(金尙鼎) 등과 함께 서찰을 주고 받으며 탁마했는데, 제공이 모두 공을 추중하였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9세에 조모의 병환을 보살피는데 하루는 병이 갑자기 위독해지자 공이 손바닥을 깨물어 피를 내서 입에 넣어주어 곧 소생하게 하였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몸을 훼상하고 예제를 지키기가 마치 어른과 같았다. 모친을 섬기기에 뜻을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집 주변에 소나무가 있어 버섯(菌)이 났는데 이로써 맛난 음식을 해 드리니 전사 손석관(孫碩寬)이 송균설(松菌說)을 지어 찬미하였다. 병신년(1656, 효종 7)에 모친상을 당하여 몹시 슬프게 울부짖고 기한이 넘도록 죽을 먹으니, 부사 김공 시경(金公始慶)이 듣고 어질게 여겨 부의를 보내서 제사를 도왔다.
공은 평소에 멀리 노닐려는 생각이 있어 산수의 명승을 두루 유람하였다. 모렴당(慕廉堂)은 곧 공의 6대조가 지은 집인데, 세월이 오래 되어 집이 폐하게 되자 공이 소나무 아래 집을 짓고는 송와(松窩)라는 편액을 걸고, 벽에는 도서를 갖추어 그 가운데서 독서하고 한가로이 읊조리며 스스로 즐거워하면서 세간의 분화(紛華)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공과 같은 이는 참으로 ‘성세(聖世)의 일민(逸民)’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영조 임신년(1752, 영조 28) 12월 그믐에 정침에서 세상을 마치니, 숙종 임술년(1682, 숙종 8) 4월 9일에 태어나신 때로부터 향년 71세였다. 부의 동쪽 율동(栗洞) 임좌(壬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오천정씨(烏川鄭氏)이니 종양(宗陽)의 따님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가 된 양계(暘溪) 호인(好仁)의 현손인데, 현숙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다. 공보다 1년 늦게 태어나고 10년 앞서 돌아가셨는데, 공과 합장하였다.
슬하에 3남을 두었다. 장남 인리(仁履)는 종형(宗兄)의 후예가 되었는데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경귀(景龜), 경준(景駿), 경표(景豹)이고, 딸은 성계달(成啓達)에게 출가했다. 차남 인복(仁復)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규(景珪)와 경형(景珩)이고, 딸은 강윤상(姜允尙), 조선여(曺善餘), 이환계(李桓季)에게 출가하였다. 삼남 인태(仁泰)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호(景顥)와 경선(景璿)이고 딸은 도필권(都必權)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목눌(木訥)주D-008이 인에 가깝다는 / 木訥近仁
선성(先聖)의 말씀이 있고 / 先聖有言
박실(朴實)하게 공부하라는 / 朴實用功
주자(朱子)의 가르침이 빛나네 / 朱訓炳然
공이 실로 가슴에 명심하여 / 公實服膺
백수의 연세에 이르렀네 / 至于白首
안으로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 內篤孝弟
밖으로는 스승과 벗에게 삼갔네 / 外謹師友
성세(聖世)의 유일(遺逸)이고 / 聖代遺逸
사림(士林)의 긍식(矜式)일세 / 士林矜式
온전히 하여 돌아갔으니 / 全而歸之
집에서 지냄이 또한 길하였네 / 家食亦吉
율동의 언덕에 / 栗洞之原
높은 무덤이여 / 宰如其阡
이돌에 명을 새겨 / 有鑱斯石
오랜 후세에 보이네 / 垂示來千
   
[주 D-006] 침개(針芥) : 침개상투(針芥相投). 자석에 잘 붙는 바늘과 호박에 잘 붙는 먼지라는 말로, 사람끼리 의기가 투합하는 것을 일컬음.
[주 D-007] 금양(錦陽) : 조선 중기의 학자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을 말함. 자는 익승(翼升), 관향은 재령(載寧)이고 퇴게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거두였음. 시호는 문경(文敬).
[주 D-008] 목눌(木訥) : 질박하고 둔한 품성. 공자가 “강의하고 목눌함이 인에 가깝다.[剛毅木訥 近於仁]”고 한 말이 있음. 《論語 子路》
Cyber World ASANJANG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