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명 |
土地明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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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문서명 |
토지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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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한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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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수/찬자 |
장동형(蔣東衡)/정만석(鄭萬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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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급목적 |
1768년에 장동형(蔣東衡)이 자신의 가대전(家垈田)을 정만석(鄭萬石)에게 파는 전답매매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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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행년(서기력) |
英祖44(176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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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기 |
43×46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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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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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처 |
원소장처와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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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처1 |
경상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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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처2 |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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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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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분류 |
明文文記類, 明文類, 土地賣買明文 |
토지명문(土地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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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작성 |
정수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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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작성일 |
2003-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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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행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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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시기 |
1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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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8년에 장동형(蔣東衡)이 본인의 가대전(家垈田)을 정만석(鄭萬石)에게 파는
전답매매명문 |
| 유학 장동형은 긴요하게 소용되는 곳이 생기자 본인의 집터를 팔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매매대상이 된 집터는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양안상에 첨자(添字) 지번의 21번째에 위치한 밭이었다. 본 밭의 연간 생산량은 4복 3속이었다. 또한 본 밭은 종자 네 말을 파종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밭의 매매가격은 전문으로 30냥에 결정되었다. |
| 문서의 말미에는 본 매매 외에 예전의 본 토지와 관련한 매매에서 작성되었던 매매명문도 함께 건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는 사연이
나타나 있다. 즉, 본 매매대상이 되는 토지가 기재된 문서에는 이 외에도 여러 전답(田畓)이 함께 기재되어 있어 구문기를 건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매매와 관련하여 나중에 쟁송이 발생할 경우에는 본 문서를 바탕으로 관으로부터 사실을 확인받으라고
하였다. |
| 문서의 작성자는 김덕화(金德燁)이며, 작성시점은 2월 16일이었다. 증인으로는 유학 장동필(蔣東弼)이 배석하였다. 대전주인 장동형은 현재 상중에 있는 까닭으로 서압을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상중에 있을
경우 직접 매매행위를 하지 않거나, 혹 참여하더라도 서압을 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
| 鄭求福∙安承俊, 「慶州 良洞의 慶州孫氏家와 그들의 古文書」, 『古文書集成』32 - 慶州 慶州孫氏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7. |
| 李樹健, 『嶺南士林派의 形成』, 嶺南大學校出版部, 1979. 3. |
|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良佐洞硏究』, 嶺南大學校出版部, 1990. |
| 李樹健 編著, 『慶北地方古文書集成』, 嶺南大學校出版部, 1981. |
| 서지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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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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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 사용범위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을 통한 무료 이용 |
| 일시 |
2003.10.07 |
| 작업종류 |
해제작성,입력,교정 |
| 제작자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 제작내용 |
해제작성,교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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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明文
乾隆三十三年戊子二月十六日東江書院別庫庫
子 鄭萬石 處
右明文事段要用所致傳來垈田添字卄一田
肆卜參束庫乙皮牟肆斗落只供折錢文
參拾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段他田畓幷付故
不得出給爲去乎日後某人中雜
談是去等此文告官卞正事
岱主幼學 蔣東衡 喪不肖
證人同姓四寸幼學 蔣東弼 (署押)
筆執 金德燁 (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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