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 효소왕(孝昭王) 때에 중 도증(道證)이 당 나라로부터 돌아와서 천문도(天文圖)를 올리었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누각(漏刻)을 만들었다.
《문헌비고》○ 태조(太祖)
무인년에 물시계를 종가(鐘街)에 두었다.
○ 을해년에 천문도를 돌에 새겼다.
○ 세종 임자년에 대제학 정인지ㆍ정초(鄭招)에게 명하여
간의대(簡儀臺)를 짓게 하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李蕆), 호군(護軍)
장영실에게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만들고, 드디어
구리를 녹여 모든 의상(儀象)을 만들었다. 첫째는 대소간의(大小簡儀), 둘째는 혼의(渾儀)ㆍ혼상(渾象), 셋째는 현주 천평 정남
앙부일귀(懸珠天平定南仰釜日晷), 넷째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다섯째는 자격루(自擊漏)인데 무오년에 준공되었다.
세종조(世宗朝) 조에 상세하다.○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돌을 쌓아서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는
31척, 길이는 47척, 넓이는 32척으로 하여 돌난간으로 둘렀다. 그 꼭대기에는 간의를 두고, 간의 남쪽에는 정방형의 안(案)을 두었다. 대의
서쪽에 동표(銅表)를 세웠는데 높이 5배(倍) 8척의 얼(臬)에다 푸른 돌을 깎아 규(圭)를 만들고, 규면(圭面)에
장(丈)ㆍ척(尺)ㆍ촌(寸)ㆍ분(分)을 새기어 경부(景符)를 써서 일중영(日中影)을 취하고 이기(二氣)의 영(盈)ㆍ축(縮)을 추측하였다.
○
간의의 제도는 대간의는 《원사(元史)》에 기재한 곽수경(郭守敬)의 법에 의거하였다. 소간의는 정(精)한 동(銅)으로 부(趺)를 만들며
수거(水渠)로써 빙 둘려서 자오(子午)를 표준하고, 지평(地平)을 정한다. 적도환(赤道環)의 면(面)에 주천도(周天度) 3백 65도 4분도의
1을 나누어서 동서로 운전하여 칠정 중외관 입숙도분(七政中外官入宿度分)을 측정하고, 백각환(百刻環)은 적도환(赤道環) 안에 있는데, 면(面)에
12시 백각(百刻)을 나누어 낮이면 해 그림자로 알고, 밤이면 중성(中星)으로 헤아린다.사유환(四游環)은 규형(窺衡)을 받아서 동서로 운전하고
남북으로 낮추었다 높였다 하여 규측(窺測)하기를 기다리며, 이에 기둥을 세워서 3환(環)을 관통하게 하여 기울이면 사유(四游)가 북극을 표준하고
적도는 하늘의 중심을 표준하며, 곧게 서면 사유가 입운(立運)이 되고, 백각이 음위(陰緯)가 된다.
○ 정초가 소간의에 명(銘)을 짓기를,
“천도가 한정이 없으므로 기계도 역시 간편함을 숭상한다. 옛날 간의는 층층으로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 이 기계는 가지고 다닐 만하다. 그 사용법은
간의와 같으니 대개 간편한 중에도 또 간편한 것이다.” 하였다.
○ 혼의(渾儀)ㆍ혼상(渾象)의 제도는, 혼의는 원 나라 선비 오징(吳澄)이
지은《찬언(纂言)》에 기록한 것과 같이 하여 칠목(漆木)으로 하고, 혼상은 베에 칠하여 만들었는데 둥글기가 탄환 같다. 둥글기는 10척 8촌
6분이다.종횡으로 주천(周天) 도분(度分)을 그어 적도가 가운데 있고, 황도는 적도 안팎 출입이 각각 24도 약(弱)이다. 중외관성(中外官星)을
벌여 놓아 하루에 한 번 돌아서 한 도수를 지나게 하고, 해를 황도에 달아 놓아 매일 꼭 1도씩 퇴행하여 하늘의 운행과 합하게 하며,
격수(激水)하는 기륜(機輪)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게 하였다.
○ 일귀(日晷 해시계)의 제도는, 현주(懸珠)는 방부(方趺)의 길이를 6촌
3분으로 기둥을 부(趺)의 북쪽에 세우고, 못을 부의 남쪽에 파고 십자(十字)를 부의 북쪽에 긋고 추를 기둥머리에 달아 십자와 서로 맞보게 하여
수준(水準)을 기다릴 필요없이 자연히 평정된다. 백각(百刻)을 작은 바퀴에 새겼는데, 바퀴는 직경이 3촌 2분이고, 자루를 만들어 기둥에
비스듬히 꽂았으며, 바퀴 가운데에 구멍이 있어 한 개의 가느다란 줄을 꿰어 위로 기둥 머리에 매고, 아래로는 부(趺) 남쪽에 매어 줄의 그림자
있는 곳으로써 시각을 알게 한다.천평(天平)은 그 제도가 현주와 대개 같으나 오직 못을 남북쪽에 파고 기둥을 부 가운데 세우고 노끈은 기둥
머리에 꿰었는데, 들어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다르다. 정남(定南)은 부의 길이가 1척 2촌 5분이 되고, 두 머리의 넓이는 4촌이요, 길이는
2촌이 되고, 허리의 넓이는 1촌이요, 길이는 8촌 5분이 된다. 가운데에 둥근 못이 있어 직경이 2촌 6분이요, 물도랑을 두어 두 머리를
통해서 기둥 곁에 둘렀으며, 북쪽 기둥은 길이 1척 1촌이고, 남쪽 기둥은 길이 5촌 9분이요, 북쪽 기둥이 1촌 1분으로 남쪽 기둥보다 3촌
8분이 낮다. 아래에 각각 바퀴가 있어서 사유환(四游環)을 받았으며, 환은 동서로 운전하는데 반주천도수(半周天度數)를 새겨 도마다 4분하여 북쪽
16도로부터 1백 67도까지 이른다.가운데가 비어 쌍환(雙環) 모양 같고, 나머지는 전환(全環)이 되어 안에는 한 금을 중심에 긋고 밑에 모난
구멍이 있는데, 직거(直距)를 가로 걸쳤으니 거(距)의 가운데가 6촌 7분이다. 비어서 규형(窺衡)을 받았으며, 규형은 위로 쌍환을 꿰고
아래로는 전환에 임하여 남북으로 저앙(低昻)하고 평평하게 지평환(地平環)을 설치하되 남쪽 기둥 머리와 같이 하여 하지의 해 출몰 시각을
표준하며, 반환(半環)을 지평 아래 가로 설치하여 안에 백각(百刻)을 나누어 모난 구멍에 맞보게 하고, 부(趺) 북쪽에 십자(十字)를 그어
추(錘)를 북쪽 바퀴 끝에 달아서 십자와 서로 맞보게 하니, 역시 평형(平衡)을 취하는 데 쓰는 것이다.규형(窺衡)은 매일 태양이 극도(極度)
분(分)에 투입되어 해 그림자가 정원(正圓)이 될 때에 모난 구멍으로부터 반환(半環)의 시각을 내려다보면 비록 정남침(定南針)을 쓰지 아니하여도
남쪽을 정하고 시각을 알 수 있다. 앙부(仰釜)는《원사(元史)》에 기록한 곽수경의 법을 따른다.
○ 김돈(金墩)이 앙부일귀(仰釜日晷)에
명을 짓기를, “무릇 베풀어 시행하는 것으로 시간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들었으니 그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원거(圓距)를 가로 설치하였으니 자(子)와 오(午)가 상대되고, 구멍이 굽이를 따라서 도니 점이
개자(芥子)씨 놓은 것만하다. 낮의 도수는 안에 있으니 주천(周天)의 반이다.신의 형상을 그린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함이다. 각(刻)과
분(分)이 또렷하니 해가 투영됨이 분명하다. 길가에 두는 것은 보는 이가 모이기 때문이니, 앞으로는 백성들이 지을 때를 알겠구나.”
하였다.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제도는 구리로 바퀴를 만들어 적도를 표준하였는데 자루가 있고, 바퀴의 직경은 2척이며, 두께는
4분이고, 넓이는 3촌이다. 가운데에 십자(十字)의 거(距)가 있어 넓이가 1촌 5분이고, 두께는 바퀴와 같고 십자 중에 축이 있는데 길이는
5분 반이며, 직경이 2촌이고, 북쪽편에 중심을 깎아 파서 일리(一釐)의 두께만 남겨 가운데 개자씨만한 둥근 구멍이 있다.
축으로는
계형(界衡)을 꿰고 구멍으로는 별을 본다. 아래에는 서려 있는 용이 있어 바퀴 자루를 머금었으니, 자루 두께는 1촌 8분인데, 용의 입에 1척
1촌이 들어가고 밖에 3촌 6분이 나왔다. 용 아래에 대가 있어 넓이 2척이고, 길이 3척 2촌이며, 도랑이 있고, 못이 있으니 평(平)함을
취한 것이다. 바퀴 윗면에 세 환(環)을 두었으니,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ㆍ‘일귀백각환(日晷百刻環)’ㆍ‘성귀백각환(星晷百刻環)’이다.
주천도분환은 밖에서 운전하는데 밖에 두 귀가 있어 직경이 2척이며, 두께는 3분이고, 넓이는 8분이다.
일귀백각환은 가운데 있어 들지
아니하는데 직경이 1척 8촌 4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외환(外環)과 같다. 성귀백각환은 안에서 운전하는데, 안에 두 귀가 있으며 직경이 1척
6촌 7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중환ㆍ외환과 같다. 귀가 있는 것은 운전하기 위한 것이다. 3환 위에 계형(界衡)이 있는데 길이는 2척 1촌이고,
두께는 5분이며, 넓이는 3촌이다. 두 머리 가운데가 비어 길이가 2촌 2분이며, 넓이는 1촌 8분이다. □은 3환의 그은 것을 가리는
것이다.
허리의 중간 좌우에 각각 한 용이 있어서 길이가 1척인데 모두 정극환(定極環)을 받치고 있다. 두 환이 있으니 외환ㆍ내환 사이에는
구진대성(勾陳大星)이 보이고, 내환 안에는 천추성(天樞星)이 보이는데, 남북 적도를 정한 것이다. 외환은 직경이 2촌 3분이고, 넓이는
3분이며, 내환은 직경이 1촌 4분 반이고, 넓이는 4리며, 두께는 모두 2분이 조금 작은데 서로 십자(十字)로 접속하였다. 계형 두 끝 빈
곳의 안팎에 각각 작은 구멍이 있고, 정극외환(定極外環) 양변에 역시 작은 구멍이 있는데, 가는 노끈으로 여섯 구멍을 꿰어서 계형 두 끝에 매단
것은 위로 일성을 측후하고 아래로 시각을 고찰하려는 것이다.
주천환(周天環)에는 주천도(周天度)를 새겨 매도에 4분을 만들고,
일귀환(日晷環)에는 백각을 새겨 각마다 6분을 만들며, 성귀환(星晷環)에도 역시 일귀환과 같이 새겼는데, 다만 자정이 새벽 전 자정을 지나는
것이 주천의 1도 지내는 것과 같이 된 것이 일귀환과 다르다. 주천환을 쓰는 방법은 먼저 수루(水漏)를 내리어 동지에 새벽 전 자정이 되면
계형으로 북극 제이성(第二星) 있는 곳을 측후해서 바퀴 가에 기록하여 주천 초도(初度)의 시초에 해당하게 한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면
천세(天歲)는 반드시 □하니 《수시력(授時曆)》으로써 고찰하면 16년이 조금 지나면 1분이 퇴보하고, 66년이 조금 지나면 1도가 퇴보하였다.
이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다시 측후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북극 제2성은 북신(北宸)에 가까워 붉게 반짝이어 뭇사람이 보기 쉬운 까닭에 그것으로써
측후하였다. 일귀환 쓰는 법은 간의(簡儀)에 성귀환 쓰는 법과 같다.
첫해의 동짓날 새벽 전 야반(夜半) 자정을 기하여 하늘 초도(初度)를
시초로 삼아서, 1일 1도, 2일 2도, 3일 3도로 3백 64일에 이르면 3백 64도가 된다. 다음해 동짓날 자정에 3백 65도가 되는데,
1일에는 영도(零度) 3분, 2일에는 1도 3분이 된다. 또 다음해 동짓날에 3백 64도 3분이 되며, 1일에는 영도 2분, 2일에는 1도
2분으로 3백 64일에 이르면 3백 63도 2분이 된다. 또 다음해의 동짓날에 3백 64도 2분이 되고 1일에는 영도 1분, 2일에는 1도
1분이니, 3백 65일에 이르러 이에 3백 64도 1분이 된다. 이것을 일진(一盡)이라 하는데 한 바퀴가 다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 소간의(小簡儀)는 두 벌인데, 하나는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었다. 앙부일귀는 두 벌인데
안에 시신(時神 짐승 그림으로 12시를 나타낸 것)을 그린 것은 대개 어리석은 백성들이 꾸부려 들여다보고 시각을 알게 함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두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두었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네 벌을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에 주며, 둘은 동계ㆍ서계 원수영(元帥營)에 나눠 주었다.
○ 김돈(金墩)이 일성정시의에 명을 짓기를, “요임금이
역상(曆象)을 흠정(欽定)하고, 순임금은 기형(璣衡)을 쓰니, 역대로 서로 전해 가며 제작이 더욱 정밀해졌으며, 의(儀)니 상(象)이니 하여
명칭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백성에게 역서(曆書)를 주었으나 시대가 더욱 내려오자 제도가
폐하여졌다.
책(策)이 비록 있으나 누가 그 뜻을 알 것이냐. 성신(聖神) 세종대왕이 때맞춰 나시어 요순의 제도를 계승하시니,
표(表)ㆍ누(漏)ㆍ의(儀)ㆍ상(象)이 모두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시(時)가 백각(百刻)이 있어 낮과 밤이 다르니, 해를 측후하는 데는 기계가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밤을 겸해서 측후하고자 새로 의(儀)를 만들었다. 그 이름이 무엇인고, ‘일성정시(日星定時)’라 하며, 그 사용함이
어떠한고. 별을 보며 해 그림자를 측정한다.
그 바탕은 구리로 만들었는데 제작은 비할 데가 없다. 먼저 둥근 바퀴를 설치하고 거(距)를
가로 설치하니, 남쪽과 북쪽이 낮고 높은 것은 적도의 규모를 모방한 것이다. 대(臺)에 용(龍)이 서리어 입에 바퀴 자루를 머금었으며, 도랑이
있어 못에 연(連)함으로써 수평을 이루게 된다. 바퀴 위에 3환(環)이 스스로 서로 의지해 붙었으니, 바깥 것을 ‘주천(周天)’이라 하여
도(度)와 분(分)이 벌여 있고, 안으로 2환이 있어 일환(日環)과 성환(星環)이 길을 나누었다.
성환의 각(刻)은 하늘 도수와 같이
하였는데, 안팎은 구름이요, 가운데만은 단단하게 굳었다. 형(衡)은 전면을 가로질렀고, 축(軸)은 그 가운데를 꿰었으며, 축을 파서 구멍을
만들었는데 겨자씨 같고 바늘 같다.
형(衡)의 끝을 비워서 도(度)ㆍ각(刻)을 분명히 표시하였고, 두 용이 축을 끼고 정극환(定極環)을
받들었다. 환이 안팎이 있어 별이 둘 사이에 보이는데, 그 별이 무슨 별이냐. 구진(勾陳)ㆍ천추(天樞)로다. 남쪽ㆍ북쪽이 정하여졌고 동쪽ㆍ서쪽이
서로 기다린다. 측후를 하는 데는 줄을 사용하여 관찰하니 바로 환 위에 걸쳐서 아래로 형 끝에 꿰었다.
해 측후에는 둘을 쓰고, 별
측후에는 하나로 한다. 제좌(帝座)는 붉고 밝아서 북극에 가깝다. 줄을 사용하여 엿보니 가히 시각을 알겠다. 먼저 누수(漏水)를 내리니 이에
자정(子正)을 알겠다. 윤(輪)과 환(環)을 표지(表誌)하였음은 천주(天周)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밤마다 주천(周天)하여 도(度)와 분(分)이
시종(始終)한다. 그릇이 간이하고 정미하여 사용함이 주밀하다. 몇 번이나 선철(先哲)을 겪었어도 이 제작이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우리 임금께서
하늘을 예측하여 이 의(儀)를 비로소 만드셨네. 희화(羲和 벼슬 이름)에게 주셨으니 만대에 보배될 것이다.” 하였다.
○ 자격루(自擊漏)의
제도는 파수호(播水壺)가 네 개인데,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수수호(受水壺)는 두 개인데 물을 갈 때에 번갈아 쓴다. 길이는 11척 2촌이며,
원(圓)의 직경은 1척 8촌이고, 살 두 개는 길이가 10척 2촌이다. 면(面)에 12시를 표시하고, 매시마다 8각을 나누어 초정(初正) 나머지
분(分)을 모두 백각으로 하여 각마다 12분을 만들었다.
야전(夜箭)은 옛날에는 21개였던 것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 복잡하여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거하여 밤과 낮에 승강(升降)을 나누어 비율이 대략 이기(二氣)에 1전(箭)이 해당되니 무릇 12전이다. 이에
사신목인(司晨木人)을 만들어 시각을 따라 스스로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집 세 채를 지어서 동쪽채 안에는 2층을 설치하여 윗층에는 3신(三神)을
세워 하나는 시(時)를 맡아 종을 치게 하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치게 하며, 가운데 층 아래에는 평륜(平輪)을 설치하여 12신(神)을
벌여 각각 철조(鐵條)로 간(幹)을 삼아 오르내릴 수 있게 하고, 각각 시패(時牌)를 잡아 번갈아 시를 알리도록 한다.
그 기계를 운전하는
방법은 가운데 집채 사이에 다락을 만들어 위에 파수호를 벌였고, 아래는 수수호를 두며, 호 위에 모난 나무를 세웠다. 가운데는 공(空)하고
면(面)은 허(虛)한데 길이가 11척 4촌이며, 넓이는 6촌이고, 두께는 8분이요, 깊이가 4촌이다.
공(空)한 가운데에 격(隔)이 있어
면에서 1촌쯤 들어가고, 왼쪽에 구리 판자를 설치하여 길이는 살[箭]을 표준하고 넓이는 2촌이다. 판자 면에 12구멍을 뚫어 작은 구리
환(丸)을 받게 하니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구멍에 모두 기계가 있어 열고 닫게 하여 12시를 주장하고, 오른쪽에도 구리 판자를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살을 표준하고 넓이는 2촌 5분이며, 판자 면에 25구멍을 뚫어 역시 작은 구리 환을 받기를 왼쪽 판자와 같이 하고, 12살을 표준하니
무릇 12판자이다.
절기를 따라 번갈아 쓰여 경(更)ㆍ점(點)을 주장하고, 수수호에는 살을 띄워 살 머리에 가로쇠를 받쳐 젓가락같이 하니,
길이는 4촌 5분이고, 병(壺) 앞에 함(陷)이 있다. 함 가운데 비스듬히 넓은 판자를 설치하여 모가 난 머리는 속 빈 나무 밑에 접속하고,
꼬리는 동쪽 집채 자리 아래 달하였다. 격(隔) 넷을 설치하여 각도상(角道狀)같이 하고, 격 위에 큰 쇠 철환을 안치하였는데 크기는
달걀만하였다.
왼쪽 12는 시(時)를 주장하고, 가운데 5는 경(更)과 경마다 초점(初點)을 주장하고, 오른쪽 12는 점(點)을 주장하니,
그 탄자[丸]를 안치한 곳에는 모두 환(環)이 있어 열고 닫는 것이 있다. 또 횡기(橫機)를 설치하여 그 기(機)의 모양이 숟가락 같아서 한
끝은 굽어서 환(環)을 걸 수 있으며, 한 끝은 둥글어 탄자를 받게 한다. 중간 허리에는 모두 둥근 축(軸)이 있어 저앙(低仰)하게 하고, 그
둥근 끝이 구리통의 구멍에 당(當)하게 하였다.
구리통이 두 개가 있어 비스듬히 격(隔) 위에 설치하였는데, 왼쪽은 길이가 4척 5촌으로,
원(圓)의 직경은 1촌 5분이며, 시(時)를 중심하여 아랫면에 12구멍을 뚫었다. 오른쪽은 길이가 8척으로, 원의 직경은 좌통(左筒)과 같은데
경점(更點)을 주장하여 아랫면에 25구멍을 뚫었다. 구멍마다 모두 기계가 있어 처음에는 구멍이 모두 열려서 구리 판자에 작은 탄자가 떨어져
기계에 닿으면 기계가 스스로 구멍을 가리어, 다음 환(環)이 굴러 지나가는 길이 되어 차례차례로 모두 그러하다.
동쪽 집채 자리 윗층 아래
왼쪽에 짧은 통 2개가 달려 있는데, 한 개는 탄자를 받고, 한 개는 안에 기계 숟가락을 설치하여 숟가락의 둥근 끝이 반만 나와 탄자를 받게
하며, 통 밑 오른쪽에 둥근 기둥과 모난 기둥을 각각 둘씩 세웠다. 둥근 기둥은 가운데가 공(空)하여 안에 기계를 설치하였는데 모양은 역시
숟가락 같고 반은 나가고 반만 들어 있으며, 왼쪽 기둥에는 다섯이고, 오른쪽 기둥에는 열이다.
모난 기둥에는 비스듬히 작은 통을 꿰어
기둥마다 각각 넷씩 설치하였는데 한 끝은 연꽃잎 모양을 하고, 한 끝은 용의 입모양을 하였다. 연꽃잎은 탄자를 받고, 용입은 탄자를 토하게
하였으니 용입과 연꽃잎은 위와 아래에 서로 마주본다. 그 위에 따로 달린 짧은 통 두개가 있어 한 개는 경탄자[更丸]를 받고, 한 개는
점탄자[點丸]를 받게 한다. 오른쪽 모난 기둥 연꽃잎 아래마다 각각 세로로 짧은 통 둘과 가로로 짧은 통 한 개를 붙이는데, 그 가로된 짧은 통
한 개는 왼쪽 모난 기둥 연꽃잎 아래에 접속한다.
왼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과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각각
용입에 해당하며, 연꽃잎 사이의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반만 곧은 통 안에 들어간다. 누수(漏水)가 아래로
수수호(受水壺)에 닿으면 뜬 살[浮箭]이 점점 올라가서 왼쪽 구리 판자 구멍의 기계를 건드리며, 작은 탄자가 떨어져 내려 굴러 구리통에 들어가
구멍을 따라 떨어지고, 그 기계를 건드리면 기계가 열리어 큰 탄자가 떨어져 굴러, 자리 아래 달린 짧은 통에 들어가서 떨어져 기계 숟가락을
움직이며, 곧 기계 한 끝이 통 안으로부터 위로 사시신(司時神)의 팔목에 닿아 곧 종을 친다.
경점(更點)도 역시 그러하다. 다만 경탄자는
달린 짧은 통에 들어가서 떨어져 기계 숟가락을 건드려 왼쪽 둥근 기둥 가운데로부터 위로 사경신(司更神) 팔목에 닿아 북을 치고 굴러
점통(點筒)에 들어가 다시 초점 기계를 건드려, 오른쪽 기둥 가운데로부터 위로 사점신(司點神)에 닿아 징을 쳐서 연꽃잎 아래 있는 곧고 작은
통에 멎는데, 그 굴러들어가는 곳에 기계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경탄자의 길을 막고 경탄자가 굴러 들어감에 의하여 막히었던 경탄자의 길이
열리게 되며 나머지 경(更)도 모두 그러하다. 오경이 끝남을 기다려 빗장을 빼고 낸다. 매경(更) 2점 이하의 탄자는 아래 달린 짧은 통에 닿아
굴러 연꽃잎에 들어가서 그 점(點)의 기계를 건드리고, 다음 점의 탄자가 굴러서 역시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 멈춘다.
그 탄자를 멈추는
통에 구멍이 있어 빗장을 걸쳐 닫게 하고, 다섯 개의 탄자가 떨어져 맨 아랫 기계를 움직이면 기계에 연결된 쇠줄이 차례차례로 모든 빗장이 빠져
잎쪽의 3개의 탄자가 일시에 한결같이 떨어진다. 시(時)를 주장하는 큰 탄자가 굴러 떨어져 짧은 통에 닿아 굴러서, 둥근 기둥 통에 굴러들어가
떨어지면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을 누른다.
나무 길이는 6척 6촌이요, 넓이는 1촌 5분이며, 두께는 1촌 7분이다. 가로 지른 나무
가운데에 중심을 맞추어 짧은 기둥을 세우고, 가로지른 나무를 끼고 둥근 축(軸)으로 받아 아래 위로 저앙하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 남쪽 끝에
손가락만한 둥근 나무를 세웠는데, 길이가 2척 2촌으로 시신(時神)의 발 아래에 당한다. 발 끝에 작은 윤축(輪軸)이 있어서 큰 탄자가 떨어져
북쪽 끝을 누르면, 남쪽 끝이 올라가서 신(神)의 발을 받들어 자리 중간층 위에 오르게 하고, 가로지른 나무 북쪽 끝의 북쪽에 작은 판자를
세워서 열고 닫을 수 있게 한다.
판자에 쇠줄이 있어서 위로 시(時)를 주장하는 매달린 통의 기계 숟가락에 연결되었는데, 숟가락이 움직이면
판자가 열려서 앞의 탄자를 나오게 하고, 가로지른 나무 남쪽 끝이 낮아지면 시신(時神)이 바퀴면에 돌아오고 다음 시신이 즉시 대신 올라온다. 그
바퀴를 굴리는 방법은 바퀴 바깥쪽에 길이 한 자 가량 되는 작은 판자를 가로지르고 그 가운데를 4, 5촌 가량 파고 구리 판자를 그 위에 가로
걸쳐 비스듬히 기울인 모양으로 하여 한 끝에 추(軸)를 설치하여 열리고 닫히게 한다.시(時)가 끝나서 바퀴면에 돌아오면 발끝의 쇠바퀴가 구리
판자에 순조롭게 굴러 내려와서 잠깐도 머물지 않게 하며, 다음의 시신(時神)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기계가 다 감추어져 보이지 아니하고 바깥에
보이는 것은 갓[冠] 쓰고 띠를 맨 나무로 만든 사람뿐인데, 이것이 자격루 제작의 대략이다. 그 기계를 설치한 집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고, 또 천추전(千秋殿) 서쪽에는 작은 집을 짓고 종이를 발라서 높이 7척 가량이나 되는 산(山)을 만들어 그 집 가운데에 넣어 둔다. 또 그
집 안에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하여 물의 힘으로 움직이게 하고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해가 오색 구름에 둘리어
산중턱으로 다니는데, 하루 한 번 산을 돌아 낮에는 산 밖에 보이고, 밤에는 산 가운데로 비스듬한 모양이 하늘의 운행하는 도수의 극(極)에 대한
원근(遠近)ㆍ출입(出入)의 등분을 표준하여 각각 절기(節氣)를 따라 천일(天日)과 맞게 한다.
해 아래 4명의 선녀(仙女)가
금목탁(金木鐸)을 들고 구름을 타고 사방에 서 있는데, 인(寅)ㆍ묘(卯)ㆍ진(辰)의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서 있는 선녀가 항상
진동(振動)하고, 사(巳)ㆍ오(午)ㆍ미시(未時)의 초정에는 남쪽에 서 있는 선녀가 항상 진동하는데, 서북 양쪽도 모두 그러하다. 아래로는
4신(神)이 각각 그 방위에 서서 모두 산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청룡(靑龍)이 인시(寅時)에는 북쪽으로, 묘시에는 동쪽으로,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도로 서쪽으로 돌아보고, 주작(朱雀)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차례차례로 향하는 방위를 청룡처럼 한다. 다른 것도 이와
같았다.
산 남쪽 비탈에 높은 대(臺)가 있어서 사신(司辰) 1명이 붉은 비단 공복(公服)을 입고 산을 등져 서 있고, 무사(武士) 3명이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었는데, 1명은 종 치는 방망이를 쥐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서 있으며, 1명은 북채를 잡고 북쪽에 가까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고 서 있고, 1명은 징채를 쥐고 역시 남쪽에 가까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시(時)가 될 때마다 사신(司辰)이
종 맡은 자를 돌아보고, 종 맡은 자는 역시 사신을 돌아보며 종을 치며, 경(更)마다 북 맡은 자가 북을 치고, 점(點)마다 징 맡은 자가 징을
친다. 서로 돌아보는 그 모양은 역시 같고, 경ㆍ점과 징ㆍ북의 수(數)는 항상 같은 법칙이다. 또 그 밑 평지 위에는 12신(神)이 각각 그
자리에 엎드리고, 12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어서 항상 닫혔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쥐 뒤의 구멍이 스스로 열려 옥녀(玉女)가 시패(時牌)를
쥐고 나오며 쥐가 앞에서 일어나고, 자시가 지나면 옥녀가 도로 들어가고 그 구멍이 다시 스스로 닫혀지며 쥐는 도로 엎드린다.
축시(丑時)가
되면 소 뒤의 구멍이 스스로 열려 역시 옥녀가 나오고 소가 역시 일어난다. 12시가 모두 그러한데, 또 오위(午位) 앞에는 대(臺)가 있고, 대
위에는 의기(欹器)가 있으며, 그 북쪽에 관인(官人)이 금병을 쥐고 물을 붓는데, 물시계의 남는 물을 써서 줄줄 계속 흘러 내리게 되어 있다.
의기가 비었을 때엔 기울어지고, 물이 알맞게 차면 반듯하고, 가득차면 엎어져서 모두 옛 사람의 교훈과 같다. 이것의 운용은 오로지 기계가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종을 쳐서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니 그 이름을 ‘흠경(欽敬)’이라 하였다.
○ 흠경각(欽敬閣)이 준공된 것은 무오년 정월
1일 병술이었고, 보루각(報漏閣)은 그보다 앞서 갑인년에 이미 준공되었으므로, 그해 7월 1일 병자부터 비로소 새 물시계를 사용하고,
서운관생(書雲觀生)들에게 번갈아 숙직하고 감독하게 하였다.
○ 김빈(金鑌)이 지은 보루각의 명(銘)에, “음양(陰陽)이 차례로 교대하여
낮과 밤이 엇갈리도다. 천도(天道)는 묵묵히 돌아가고, 지공(地功)은 자취가 없도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도와서 이룩하여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황제(黃帝) 때로부터 창조(創造)하여 시대마다 제도가 달랐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제도가 서툴다가 비로소 큰 제도를 만들었으니
우리 임금의 깊고 총명하심이로다. 옛날에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사용하였고 또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파수호(播水壺)가 네 개이고,
수수호(受水壺)가 두 개이다. 낮과 밤의 교대는 각차(刻差)에 의하여 시작되도다.
여기에 셈대[籌]를 세워 이륙(二六)으로 나타내고,
목탁을 치고 징을 치는 것은 혹 측후가 어긋날까 함이로다. 나무로 신인(神人)을 새겨 만들어 지켜보는 관리가 필요 없도다. 신인을 안치하여
물시계를 살피게 하고, 높은 집을 지었도다. 동쪽 채에는 상하로 자리를 설치하였는데, 위쪽에 3신(神)이 있어 종ㆍ북ㆍ징을 나누어 쥐었네. 닭
대신(代身)으로 신인이 부르짖는데 그 소리가 질서 있도다. 아래 12신은 신패(辰牌)를 가졌는데 편편한 바퀴 면에 둘러서서 차례로 올라오며 시를
알리도다. 그 기계의 움직임은 가운데 집에 징험하도다.
층루로 간격(間隔)을 하여 호(壺)를 서로 연결하였도다. 구리 판자 2개를 만들어서
구멍을 뚫어 살[箭]을 맞추었도다. 기계를 더하여서 탄자를 받게 하여 호 앞에 세웠도다. 살이 올라가서 기계를 움직이니 탄자가 떨어져 구르도다.
신인의 아랫쪽에 탄자 구르는 길이 가로로 비스듬하도다. 두 갈래가 넷이 되니 길이 통한 듯하도다. 통을 좌우로 이어서 탄자가 들어가는 것을
받도다. 통에 기계 구멍이 있어 통ㆍ판자의 수효와 맞추었도다. 특별히 큰 탄자가 있어 통가에 벌였도다. 번갈아 기계를 건드리니 번개처럼
빠르도다. 기계가 닿는 곳에 사신(司辰)이 제 구실을 다하도다. 귀신과도 같으니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도다. 위대하다.
이 넓은 규모여,
하늘에 순응하여 만들었도다. 제도가 조화와 같으니 규모가 틀리지 아니하도다. 이에 짧은 시간도 아껴 써서 여러 가지 공적을 빛내도다.
버드나무를 꺾어 울타리를 만들어도백성이 스스로 의혹하지 아니하도다. 이리하여 표준을 세워 영원히 보여
주도다.” 하였다.
○ 15년에 새 제도의 천문도(天文圖)를 새기었다. ○ 임금이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28수의 거리ㆍ도수 및
12부위(部位)의 궁(宮)에 드나드는 별의 도수를 일일이 《수시력(授時曆)》으로 측후한 바에 의하여 부지런히 새 천문도를 만들어 돌에 새기고,
또 이순지(李純之)에게 명하여 선유(先儒)의 의논과 역대의 제도를 모아 의상(儀象)ㆍ해시계ㆍ물시계ㆍ천문ㆍ역법 등 모든 글을 편찬하게
하였다.
○ 24년에 측우기를 만들었다. ○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들어 ‘측우(測雨)’라 이름하였는데, 길이는 1척 5촌이며, 둘레는
7촌이었다. 대(臺)를 서운관(書雲觀)에 쌓아 놓고 그릇을 그 위에 설치하여 비 온 뒤에는 항상 서운관의 관원들로 하여금 주척(周尺)으로 물
깊이의 분촌을 측량하여 알리게 하고, 측우기 제도와 주척의 양식을 모든 도(道)에 발표하여 여러 읍에 각각 하나씩 만들게 하여 객사(客舍)의 뜰
가운데 두고, 비 온 뒤에는 항상 고을 원이 친히 물 깊이의 분촌을 관찰하여 아뢰게 하였다.
영종조에
세종조의 옛 제도에 의하여 측우기를 만들었다.○ 성종(成宗) 22년에 규표(窺標)를 만들었다. 전교하기를, “요사이 관상감(觀象監)
관원이 경(更)ㆍ점(點)의 시(時)를 실수하여 간혹 사경(四更)에 3번, 삼경에 4번 북을 치니 매우 불가하다. 옛글을 상고하여 보면, ‘아무
시에는 아무 별이 보이고, 아무 별이 아무 곳에 보이면 날이 밝는다.’ 하였으니, 천시(天時)는 자연적으로 그 도수가 있는 것이니, 관상감
제조(提調)와 김응기(金應箕) 등을 시켜 하늘의 운행하는 도수를 참고하여 규표 3개를 만들어 1개는 대궐 안에 들여 놓고, 1개는 승정원에 두고
1개는 홍문관에 두어서, 천시를 측후하여 물시계의 착오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
○ 25년에 영의정 이극배(李克培)에게 명하여 구리를
녹여 소간의(小簡儀)를 만들게 하였는데, 세종조의 소간의에 의거하여 적도단환(赤道單環)과 사유쌍환(四遊雙環)의 직경이 모두 2척이었다.
○
중종 21년에 관상감이 아뢰기를, “오늘날 모든 의상(儀象)의 기구가 모두 세종조 때에 설치한 것이온데, 별의 위치가 간혹 깎여서 떨어진 데가
있사오니, 수리하기를 바라옵니다. 모든 의상이 모두 단벌이므로 만약 수리하게 될 때에는 다른 측후할 기구가 없사오니 다시 여벌을 만드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윤허하고 명하여 여벌을 만들어 내관상감(內觀象監)에 두게 하였다.
○ 명종 3년에 관상감에 명하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홍문관에 두게 하였다.
○ 임진왜란 때, 서운관에 있는 의상(儀象)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로부터 10년 뒤 신축년에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본국(本局)에 겸임하였을 때에 오래되면 그 제도가 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더니, 우연히 옛 간의(簡儀) 방법을 적은 글과 늙은
공인 2명을 구하여 사각(史閣)의 기록을 참고하여 옛 제도의 회복을 아룄더니 임금이 특히 윤허하였다. 때가 난리 뒤였기 때문에 공사는 크고 힘은
약하여 우선 그 정밀하여 만들기 어려운 누기(漏器)ㆍ간의(簡儀)ㆍ혼상(渾象) 같은 것을 만들어서 뒷사람으로 하여금 제도를 알게 하고, 기타
규표(圭表)ㆍ혼의(渾儀)ㆍ앙부(仰釜)ㆍ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 기구는 함께 만들 겨를이 없었다.
백사중수(白沙重修) 의상(儀象) 서문(序文)○ 흠경각은 일찍이 선덕(宣德) 갑인년에 경복궁 강녕전
옆에 창건하였었는데, 중도에 불이 나서 타버리고 가정 갑인년에 옛터에 재건하였더니 또다시 병화를 만나고, 만력 갑인년에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다시 지었다. 세종조 때에 만든 일성정시의는 그대로 보존되었었다. 효종 병신년에 흠경각을 헐어버리고 만수전(萬壽殿)을 지었다.
《잠곡집(潛谷集)》○ 만력 갑인년에 이충(李沖)이 역사를 감독하여 흠경ㆍ보루 두 각을 창덕궁에
세웠다가 뒤에 흠경각은 철폐하여 만수전 터가 되고, 보루각은 지금까지 시강원 동쪽에 있는데, 물시계와 사신목인(司辰木人)이 남아 있으며, 또
지금 관상감은 성종조 때에 지은 것으로 소간의가 남아 있다.
○ 현종(顯宗) 10년에 좨주(祭酒) 송준길(宋浚吉)이 흠경각의 옛 제도를
회복할 것을 아뢰었더니, 임금이 이민철(李敏哲)에게 명하여 《채씨순전주(蔡氏舜典註)》에 의하여 구리를 녹여 혼천의를 만들게 하였다.
혼천의를 만들었으나 내리고 올릴 수가 없어서 실제로 사용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대로 여러 번 수리하여
제정각(齊政閣) 가운데 안치해 놓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부지런하게.” 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정종(正宗) 때 또 서운관 제조
서호수(徐浩修)에게 명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숙종(肅宗) 13년에 이민철에게 명하여 현종조의 옛 혼천의를 중수해서,
제정각을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세워 안치하게 하였다.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
감독하였다.○ 34년에 안중태(安重泰)ㆍ이시화(李時華) 등에게 명하여 혼천의의 여벌을 만들게 하였다.
○ 34년에
관상감에서 탕약망(湯若望)의《적도 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올리었다.
○ 영종(英宗) 임자년에, 숙종조 때에 만든 혼천의의 여벌이
오래되어 어긋나므로 임금이 안중태에게 명하여 중수하게 하고, 규정각(揆政閣)을 경희궁(慶熙宮)
옛
경덕궁 흥정당(興政堂) 동쪽에 세워 안치하게 하였다.
○ 태조 을해년에 천문도를 돌에 새겨 경복궁에 두었더니, 오래되어
닳아버렸으므로 숙종 때에 인본(印本)을 구하여 다른 돌에 고쳐 새겨 관상감에 두고 작은 집을 지어 보호하였다. 영종 경인년에 태조 을해년의
구판(舊板)이 경복궁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명하여 관상감에 옮기게 하고, 각을 세워 신판(新板)과 함께 넣어두고 임금이 손수 각 이름을
‘흠경각’이라 쓰고 또 기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