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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잡록(龍蛇雜錄)
成均館大 史學科敎授 李章熙
이 책은 藥圃 鄭琢先生의 親筆本으로 慶尙北道 醴泉郡 普門面 高坪里 旌忠祠에 보관되어 先生의 宗孫 鄭完鎭氏가 관리해오는 藥圃遺稿 및 文書 13種(寶物 第494號) 가운데 그 일부를 脫草하여 原本과 함께 간행한 것이다.
이 책에 앞서 이미 전년에 遺稿 가운데 壬辰記錄과 龍灣聞見錄을 合編하여 本 國史編纂委員會에서 韓國史料叢書 第36으로 출간한 바 있다. 書題上으로 보면 이번에 간행된 龍蛇雜錄이 작년에 간행된 壬辰記錄 및 龍灣聞見錄과 내용에서 중복되는 것이 있을 법도 하나, 전혀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書名이 말해주는 것과 같은 雜記類는 아니다. 「雜錄」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것은 上疏文, ?子, 王과의 問答, 書狀, 諭示文, 牌文, 報告書 등 다른 사람의 각종 文件을 모아 적은 데서 붙인 이름인 듯싶다. 각 文件들은 대체로 年月日順으로 配列되어 있으나 앞뒤가 바뀐 것도 있는데 그것은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文件들을 접하는 대로 기록하다보니 그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內容은 크게 朝·明 관련 文件, 朝·日 관련 文件, 明·日 관련 文件, 朝鮮만의 單獨 文件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朝·明 관련 文件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먼저 宣祖 26년(1593-癸巳年) 7월 明援軍이 돌아가기 이전의 明軍陣營과 朝鮮朝廷과의 問答을 들 수 있겠다. 明軍陣營에서는 敵中에 있는 朝鮮人으로 하여금 敵의 動情을 살피게 하여 그것을 그때 그때 明陣營에 보고해주도록 조선 조정이 都元帥나 諸將에게 지시할 것이며, 조선이 명군을 철수하지 말 것을 요청하자 명나라측은 자기들이 철수한다 해도 조선은 벼와 곡식을 추수하여 淸野策으로 적의 침입에 대처하되 全羅·慶尙道地方을 철저히 지키면 된다는 대처방안을 제시한 것과, 兵部主事 丁應泰가 經理 楊鎬, 提督 馬貴, 總兵 李如梅 등을 본국에 誣告하여 해치려는 데 대한 조선조정의 구제방안, 명나라 원군이 철수할 때 朝鮮婦女와 牛馬를 이끌고 鴨綠江을 건너지 말라는 兵部左侍郞 顧養謙의 지시내용, 丁酉再亂때 三路分送 明將 40명의 명단을 기록했다.
朝·日 관련 文件은 倭將 加藤淸正이 朝鮮國 總兵 高某(兵使 高彦伯을 지칭함인 듯)에게 보낸 答書인데, 그 要旨는 朝·日 兩國이 화합하면 天下가 太平해진다는 내용이다.
明·日 관계 文件은, 豊臣秀吉이 明皇帝에게 글을 보내 자신을 藩王에 ?封해서 名號를 特賜해달라는 것, 加藤淸正이 보낸 文書에 대한 의견 및 이에 대한 諭示文, 都督이 재차 加藤淸正을 曉諭하는 등의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朝鮮에 관한 단독 文件으로는, 계속되는 旱魁과 洪水와 관련하여 왕은 至治에 힘쓰라는 承政院의 啓文과, 왕도 이에 대해 걱정하는 글, 領議政(柳成龍)의 여러 차례에 걸친 呈辭와 이에 대한 不允答書, 大臣 柳成龍이 失政했다고 공박한 儒生들의 上疏文, 鍊兵·運糧에 관한 대처방안과 鍊兵은 紀效新書에 입각해서 훈련시켜야 한다는 黃愼의 書狀封草, 義僧將 惟政이 왜란 중에 僧兵을 일으킨 내력과, 平安道에서의 활약상, 왜진에 들어가 敵情을 정탐한 사실, 軍需 마련책과 山城을 보존하기 위한 設險策 등이 담긴 疏文 및 그의 論賞을 지시한 備忘記, 柳成龍이 民心을 잃었다는 이유로 領議政을 사양한 ?子, 敵兵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敵情을 供述한 蔚山校生 蔣希春의 招辭, 倭陣을 왕래한 李謙受의 倭人과의 問答記 및 敵情을 탐지한 기록, 蔚山 倭陣을 왕래한 蔣希春·鄭希韶의 말, 日本에 끌려간 康玉湖가 보내온 被擄를 변명한 書札, 明將의 節制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都元帥 權慄이 高彦伯에게 지시한 글, 鄭仁弘에 대한 비난과 鄭仁弘의 上疏文, 그리고 備邊司에서 各道에 公文을 보내 倭亂中에 나타난 忠臣·孝子·烈女 등의 姓名과 實跡을 啓聞하라고 지시한 데 대한 全羅道와 慶尙道 地方의 조사보고문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全羅道는 당시 觀察使 李廷?이 조사하여 癸巳년 12월 19일에 보고한 것인데, 조사지역은 全州·羅州·光州·南原·順天·長興·靈巖·綾城·鎭安·泰仁·玉果 등지였다. 慶尙道는 觀察使 韓孝純이 甲午년 1월 10일에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사지역은 慶州·大丘·義城·禮安·軍威·榮川·昌寧·新寧·安東·永川·龍宮 등지였다. 그러나 관찰사가 慶尙右道 地域은 二次 晋州城 싸움 때 晋州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고을도 적의 분탕질을 당하여 文案들이 없어져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 것을 보면 누락된 고을이 상당수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밝혀진 忠臣·孝子·烈女들에게는 응분의 특혜를 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龍蛇雜錄은 藥圃의 노력으로 收合된 資料集이다. 이 책은 壬辰記錄·龍灣聞見錄과 함께 壬辰倭亂史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資料로 활용될 수 있으며, 특히 全羅道觀察使 李廷?과 慶尙道觀察使 韓孝純의 報告文은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서 왜란 초기 兩南地方의 倡義起兵과 活躍相을 이해하는 데 크게 보탬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亂中社會相을 밝히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는다. 단 일부 文件 가운데 손상된 句節이 있어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움을 갖게 한다.
先生은 中宗 21년(1526) 慶北 醴泉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淸州이다. 字는 子精, 號는 藥圃이다. 李滉의 門人으로 明宗 13년(1558) 式年文科에 급제하여 正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宣祖 원년(1568) 明宗實錄 편찬에 참여 하였다. 그후 都承旨·大司成·江原道觀察使·大司憲·吏曹參判, 同王 15년 進賀使로 明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재차 大司憲이 되었다. 이어 禮曹·刑曹·吏曹判書를 역임한 후, 다시 謝恩使로 明에 다녀왔다.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左?成으로 왕을 義州까지 호종하였으며, 明의 經略으로부터 遊擊에 이르기까지 명나라 원군의 주요 지휘관을 餞慰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 전투에 차질이 없도록 열성을 다했다. 학문의 幅이 넓어 經史는 말할 것도 없고, 天文·地理·象數·兵書에 이르기까지 精通하였다. 왜란 중에 郭再祐·金德齡 같은 人材를 천거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선조 28년에 右議政에 올랐다. 丁酉再亂이 발발하자 72세의 노령으로 싸움터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자 하였으나 宣祖가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이해 3월에는 獄에 갇힌 李舜臣을 극력 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水陸?進挾攻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33년 左議政에 승진되고 判中樞府事를 거쳐, 領中樞府事에 오르고 扈從功臣 三等에 錄勳되었으며 西原府院君에 封하여졌다. 宣祖 38년(1605)에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貞簡이란 諡號가 붙여졌으며 醴泉 道正書院에 配享되었다.
龍蛇雜錄(용사잡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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蔚山校生蔣希春招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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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蔚山校生蔣希春招辭內. 西生浦賊勢探審事. 以.
深入賊窟根因及賊情. 竝以現告亦. 推考敎是臥乎在亦. 矣身亦生於蔚山境農所里. 長於斯土.
自少儒業. 名編校籍. 不事弓馬之才. 布衣寒生. 一自兵燹之後. 家業蕩盡. 父母妻子與門中族屬. 喪亡無餘. 隻身孤苦. 無以爲賴. 寄托於郡守結陣之處. 起變三年. 迄未決落. 疏闊儒生.
<94> 以常懷慷慨.
每欲躬探賊窟. 以觀其所爲爲如乎. 去正月二十九日. 向到于西生浦登公頒串北山. 往來留連看望. 遇見我國之人. 將向賊陣爲去乙. 趁時下山相見.
則本郡居前日被擄鄭連福等. 受倭書呈兵使. 通都元帥今始入歸是如言之爲良去乙. 因與偕往西生浦北門.
則賊徒不知矣身欲探入歸之故. 無奈委使鄭連福一時入來爲有臥乎去.
咸有喜色. 爭相來問. 鄭連福段置. 欲遂和諧往來之功. 偶然入歸之故. 不能乃陳. 矣身段置. 恐被淫怒.
亦不得開陳. 進退維谷. 幸名不知我 國通事稱云者. 率去于
<95> 一倭所在之家.
同倭乃大上官. 所管諸事無不摠檢者也. 見我之至. 喜不自勝. 設席相對而坐. 欣然待之. 饋以酒食. 仍曰. 前日略陳和偕之書. 以陣中被擄之人.
給送于慶州朝鮮將帥留駐之處. 中路爲被奪. 未能相傳. 以此爲恨之至. 公適到. 且聞文士云.
是則幸也. 急報于大上官. 上官聞來大喜. 卽令送人曰. 安頓精舍. 姑以暫歇. 則移時親見事言. 送酒杯夕飯. 極其精潔. 優待而撤. 日已曛黑.
同副上官與通事. 一時到上官所接門外. 歷見其堂室衛儀. 則高簷大廈宏壯之盛. 比如各官中大廳.
而佩劍勇士. 出入內外.
<96> 蜂屯蟻聚. 銃筒倭弓.
處處積置. 眼前所及. 壯觀難記. 及進前. 上官淸正云者. 年可三十一二.
形容豪邁. 身着錦衣. 頭戴髮角毛段之冠. 圍屛設席. 極其華麗. 眼前使喚之人. 亦甚恭順. 左右燈燭. 晃若白晝. 言辭動止. 雖不解聽. 待我之禮.
亦不倨然. 向我使通事問曰. 國王今在何處. 兩王子亦安在. 一自相離. 音信頓絶. 未知安否. 答曰.
布衣書生. 本無弓馬之業. 起變之後. 絜妻子登山今始下來. 九重千里. 遠莫聞知是如答說. 則倭曰. 曾與 王子. 有相約之事. 又有彼我兩間相厚之分.
而永斷回信. 其何故耶. 中原與日
<97> 本講和之奇聞耶否.
答曰. 有講和之奇. 而時未知其實矣. 倭曰. 沈遊擊與倭將魯內屯同謀反間. 雖云相和. 日本時未聞相和之端. 中原亦必不聽. 多有搖焉矣. 又曰.
王子使人. 無奈沈遊擊之輩抑沮不通. 亦搖之矣. 又曰. 今此來戰. 不求朝鮮褊地. 又不貪財貨.
皆由於一人之所弄. 起兵三年. 渡海他國. 恒在鋒劍之中. 尙未回土. 實非好事. 朝鮮人物. 亦何保焉. 日本之兵. 到此朝鮮. 土地. 無不蹂躪.
復犯不難. 而但無辜生民. 被害亦甚可憐. 我兵雖不鴟張. 仍駐不返. 則唐兵亦留此地. 必難運糧繼以此國之糧. 則此國
<98> 之人. 自就亡盡.
莫若速爲和親. 許和則釜山留館. 卷兵渡海. 各自農業. 甚爲便益. 農前定奪至可爲旀. 抑有可笑之事.
我兵或以舟行佃獵. 或以登山樵牧者. 朝鮮人潛伺斬殺. 此無異測海之類. 少無減損之理. 莫此諧和卷兵而已. 若不諧和. 則有損無益云云. 答曰.
我國禮義之邦. 只有交隣之道. 少無相格之端. 日本如是其攻伐. 未知其故. 義則義. 兵則兵. 日本請和. 則通于總兵. 轉達 朝廷云云. 倭曰. 若許和. 則不告大明而可爲耶. 必告而後爲之耶. 答曰.
朝廷與大明. 恩同父子之國. 如何忘其大義. 不告而自擅
<99> 乎. 答曰. 其然也.
又曰. 天使出來云. 今在何處. 大明已爲講和. 朝鮮獨不和乎. 修書契二道. 傳送鄭連福. 一時達矣.
力通此間之意事. 言之再三. 加以饋酒. 溫語慇懃. 仍夜深留宿副上官之家. 翌日出來時. 人馬整齊. 護送于五里之外爲良去乙. 鄭連福一時出來. 同書契封二道入納爲乎爾. 又扇子一柄許我云. 此前日 王子君記書之物.
若不信. 則以此爲驗. 亦爲爾上官通事. 問其姓名居趾.
則全羅海南居金三斤.
以昔年爲倭被擄前日本國人物刷逾時出來. 詣獄被推. 受刑九次. 北道會寧定配. 今因倭亂.
又
<100> 爲被擄.
至今留在是如爲乎矣. 觀其聲色. 則我國諸事. 十分慷慨. 又欲圖之本 國人物. 載舡入歸時乙良置. 多有力救得放者衆多爲齊. 所謂魯內屯之名及皆由一人者何也. 答曰. 對馬島主
平義智是如爲爾. 仍付酒一桶進之. 慶州大將返書云云爲臥乎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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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蛇雜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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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兵及蔣希春持來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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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再次行書. 可見有處心之意也. 今持使札披見. 貴處盡心竭意也. 此處遣送持書. 或有故不去.
令曰報知將處. 知文識理使來. 謀事的當. 明日相合面議. 密謀可望也. 我腹內于此使語渡者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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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希春及鄭希韶所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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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三日. 自慶州兵使陣發行. 左兵營城內止宿. 十四日到于賊陣相距十里公頒事到賊倭百餘名川邊屯聚爲有如可.
我等一倭追逐甚急詳見. 則乃前日待我副上官也. 見我喜甚敍寒暄. 輒引前往群倭. 執兵前後擁圍. 行至賊窟二里許. 則又有七十餘倭屯聚放砲爲去乙. 問其
<142> 所屯.
則乃上官之練兵也. 引我至于副上官之家. 設帳席而對坐. 食飯饋酒後. 引就大上官之家. 唐人與通事副上官等四人入坐. 使本國通事言我曰. 勞君往返.
無以爲諭. 且曰. 今次和親一事. 爾國何以爲之. 與我則易. 與行長則難. 沈之事不成明矣.
我之中情. 則兩 王子與順和君之丈人明知之. 早斷甚當. 唐將之使人. 目不知書中無所主. 不可與論大事.
亦當更遣知文解事者. 快定去就云. 卽封書啓二道. 饋酒而授之. 翌日使倭三十餘名.
護送於十里之外云云. |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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