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고려사절요에서 위계정에 관한 검색내용입니다.

고려사절요 제6권 > 선종 사효대왕 宣宗思孝大王

경오 7년(1090), 송 원우 5년ㆍ요 대안 6년
 ○ 봄 정월에 좌복야 참지정사 최사량(崔思諒)이 병으로 물러가기를 청하므로, 치사하는 예(例)에 의하여 녹봉의 반을 급여하게 하니, 유사(有司)가 논박하기를, "신하의 나이가 70이 되어서 치사한 자에게 반록(半祿)을 급여함은 국로(國老)를 봉양하는 바이오나, 병들어 집에 있는 자에게 녹봉을 주는 것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량은 여러 대의 대신으로서 문장과 식견이 보통 사람보다 매우 뛰어나니, 어찌 통례에 구애되겠느냐." 하고, 마침내 좇지 않았다.
 ○ 탁라구당사(乇羅句當使)가 아뢰기를, "성주(星主)였던 유격장군(游擊將軍) 가량잉(加良仍)이 죽고, 그의 동복 아우 배융부위(陪戎副尉) 고복령(高福令)이 그 뒤를 이었사온데 부의(賻儀)하는 물품을 전례에 준하여 보냄이 합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좇았다.
 ○ 보제사(普濟寺) 수륙당(水陸堂)에 화재가 났다. 이보다 앞서 폐인(嬖人)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 최사겸(崔士謙)이 송 나라에 들어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구해 와서 왕에게 수륙당을 짓도록 청하였는데,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화재가 났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폐인(嬖人)이 왕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구해 하늘이 경고(警告)함인가. 옛날에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동태사(同泰寺) 부도(浮屠)를 영건하여 겨우 완성되자마자 화재가 일어났으니, 하늘과 인간의 감응함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세상에 불교의 화복설(禍福說)에 의혹된 자가 이것을 보면 또한 거울삼아 경계될 것이로다." 하였다.
 ○2월에 동여진의 도령(都領) 야사(也沙) 등 17명이 와서 말을 바치므로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유홍(柳洪)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병부사로, 최사제(崔思齊)를 중서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로, 이자위(李子威)를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수국사(修國史)로 삼았다.
 ○ 동여진에서 도령(都領) 뇨어내(褭於乃) 등 22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독달(禿達) 등 34 명이 내조(來朝)하였다.
 ○ 3월에 송 나라 상인 서성(徐成) 등 1백 5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무자일 밤에 큰 뇌성과 벼락으로 신흥창(新興倉)에 불이 나서 창고에 쌓였던 많은 곡식이 다 타서 불꽃이 공중을 가리니, 조야가 크게 놀랐으나 백성의 가옥은 손해가 없었다. 어사대(御史臺)에서 일관(日官)을 힐란하여, "이런 화재가 발생할 경우 반드시 징조가 있었을 터인데 너는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태사승(太史丞) 오상(吳相)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화성(火星)이 천균성(天囷星)을 지키므로 자세히 보고하였는데, 본국지사(本局知事) 최사겸(崔士謙)이 막고 아뢰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사겸을 내치고 상(相) 등도 연좌되었다.
 예부(禮部)에서 아뢰기를, "위 명제(魏明帝) 청룡(靑龍) 2년 4월에 화재가 있자 명제가 고당륭(高堂隆)에게, '이것은 무슨 잘못인가. 예(禮)에도 빌어서 재앙을 소멸시키는 뜻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개 재변이 발생하는 것은 하늘이 경고하여 가르치는 것이니, 오직 예(禮)에 따르고 덕을 닦아야만 재앙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옛날 화재에 대하여 점친 것을 살피오니 모두 누대(樓臺)나 정자에 관한 것을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공역을 파하고, 검소함을 힘쓰시고 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재초(齋醮)를 베풀도록 하소서." 하므로, 왕이 좇아서 곧 홍원(弘圓)ㆍ국청(國淸) 두 절의 공역을 파하였다.
 ○ 여름 5월에 이경필(李景泌) 등 26명, 명경(明經) 2명과 은사(恩賜)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6월에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영원 병마록사(寧遠兵馬錄事) 우여유(禹汝維)는 변경 백성을 침해하여 재물을 모으고 뇌물을 거두니 법관에게 내려서 죄를 논하여 처단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 제(制)하기를, "금년 이래로 재변이 여러 차례 일어나고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으니 짐이 매우 두려워하노라. 내외에 공죄(公罪)로 도형(徒刑)받은 자와 사죄(私罪)로 장형(杖刑)받은 자 이하의 가벼운 죄인은 모두 방면할 것이며, 여러 관리 가운데 범법하여 파직된 자로서 정상이 나쁘지 않은 자는 너그럽게 참작하여 본래의 품계대로 서용하고, 이속(吏屬)이나 백성이 정묘년에 신흥창(新興倉) 미곡을 차대(借貸)하고도 아직 돌려 갚지 못한 것은 모두 탕감하게 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호부상서 이자의(李資義)와 예부시랑 위계정(魏繼廷)을 송 나라에 보내어 사은하고 겸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 8월 신해일에 우박이 내리고 시서항(市西巷)의 사람과 말에 벼락이 떨어졌고, 또 건릉(乾陵)의 소나무와 도성(都城) 동북쪽 산 소나무에도 벼락이 떨어졌다.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서상지(瑞祥志)》에 우뢰와 번개가 사람을 죽이고 육축(六畜)을 상하게 하며, 구릉과 수목을 깨뜨리는 것은 임금이 형벌로 사람을 죽일 때에 정당한 도리를 벗어나 참소를 받아들여 억울하게 베어 죽였기 때문인데, 바로잡지 아니하면 반드시 폭도가 일어날 걱정이 있습니다. 바로잡는 방법은 참소하는 신하를 물리치고, 교만하고 사나운 자를 죄주고 문서(文書)를 자세히 살피면 재앙이 소멸된다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두려워하여 여러 능(陵)에 두루 고하고 또 액막이로 빌기를 명하였다.
 ○ 9월에 요에서 이주(利州) 관내 관찰사 장사열(張師說)을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요의 사신에게 두 번이나 잔치를 베풀어 주고 삼절인(三節人 외국에서 온 사절(使節) 중에서 지위가 높은 세 사람을 가리킴)을 전내(殿內) 좌우에 앉게 하였다. 유사가 아뢰기를, "사신에게 두 번씩이나 잔치를 베푸는 것은 옛날에는 이런 예가 없었사옵고, 삼절인을 전내에 앉게 하는 것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자가 요의 황제가 지은 천경사(天慶寺) 비문(碑文)을 가지고 왔으니 특별히 예우함이 마땅하다." 하고 좇지 않았다.
 ○ 동여진에서 회화장군 아어대(阿於大) 등 15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 겨울 10월에 왕이 태후를 모시고 삼각산(三角山 서울)에 거둥하다가 길에서 백살 및 80살 된 백성 세 사람을 보고 각각 물품을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 11월 삼각산에서 돌아와서 사(赦)하였다.
 ○ 12월에 요에서 횡선사(橫宣使)로 익주(益州) 관내 관찰사 야율리칭(耶律利稱)을 보내왔다

고려사절요 제6권 > 선종 사효대왕 宣宗思孝大王

경오 7년(1090), 송 원우 5년ㆍ요 대안 6년
 ○ 봄 정월에 좌복야 참지정사 최사량(崔思諒)이 병으로 물러가기를 청하므로, 치사하는 예(例)에 의하여 녹봉의 반을 급여하게 하니, 유사(有司)가 논박하기를, "신하의 나이가 70이 되어서 치사한 자에게 반록(半祿)을 급여함은 국로(國老)를 봉양하는 바이오나, 병들어 집에 있는 자에게 녹봉을 주는 것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량은 여러 대의 대신으로서 문장과 식견이 보통 사람보다 매우 뛰어나니, 어찌 통례에 구애되겠느냐." 하고, 마침내 좇지 않았다.
 ○ 탁라구당사(乇羅句當使)가 아뢰기를, "성주(星主)였던 유격장군(游擊將軍) 가량잉(加良仍)이 죽고, 그의 동복 아우 배융부위(陪戎副尉) 고복령(高福令)이 그 뒤를 이었사온데 부의(賻儀)하는 물품을 전례에 준하여 보냄이 합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좇았다.
 ○ 보제사(普濟寺) 수륙당(水陸堂)에 화재가 났다. 이보다 앞서 폐인(嬖人)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 최사겸(崔士謙)이 송 나라에 들어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구해 와서 왕에게 수륙당을 짓도록 청하였는데,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화재가 났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폐인(嬖人)이 왕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구해 하늘이 경고(警告)함인가. 옛날에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동태사(同泰寺) 부도(浮屠)를 영건하여 겨우 완성되자마자 화재가 일어났으니, 하늘과 인간의 감응함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세상에 불교의 화복설(禍福說)에 의혹된 자가 이것을 보면 또한 거울삼아 경계될 것이로다." 하였다.
 ○2월에 동여진의 도령(都領) 야사(也沙) 등 17명이 와서 말을 바치므로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유홍(柳洪)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병부사로, 최사제(崔思齊)를 중서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로, 이자위(李子威)를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수국사(修國史)로 삼았다.
 ○ 동여진에서 도령(都領) 뇨어내(褭於乃) 등 22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독달(禿達) 등 34 명이 내조(來朝)하였다.
 ○ 3월에 송 나라 상인 서성(徐成) 등 1백 5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무자일 밤에 큰 뇌성과 벼락으로 신흥창(新興倉)에 불이 나서 창고에 쌓였던 많은 곡식이 다 타서 불꽃이 공중을 가리니, 조야가 크게 놀랐으나 백성의 가옥은 손해가 없었다. 어사대(御史臺)에서 일관(日官)을 힐란하여, "이런 화재가 발생할 경우 반드시 징조가 있었을 터인데 너는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태사승(太史丞) 오상(吳相)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화성(火星)이 천균성(天囷星)을 지키므로 자세히 보고하였는데, 본국지사(本局知事) 최사겸(崔士謙)이 막고 아뢰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사겸을 내치고 상(相) 등도 연좌되었다.
 예부(禮部)에서 아뢰기를, "위 명제(魏明帝) 청룡(靑龍) 2년 4월에 화재가 있자 명제가 고당륭(高堂隆)에게, '이것은 무슨 잘못인가. 예(禮)에도 빌어서 재앙을 소멸시키는 뜻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개 재변이 발생하는 것은 하늘이 경고하여 가르치는 것이니, 오직 예(禮)에 따르고 덕을 닦아야만 재앙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옛날 화재에 대하여 점친 것을 살피오니 모두 누대(樓臺)나 정자에 관한 것을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공역을 파하고, 검소함을 힘쓰시고 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재초(齋醮)를 베풀도록 하소서." 하므로, 왕이 좇아서 곧 홍원(弘圓)ㆍ국청(國淸) 두 절의 공역을 파하였다.
 ○ 여름 5월에 이경필(李景泌) 등 26명, 명경(明經) 2명과 은사(恩賜)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6월에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영원 병마록사(寧遠兵馬錄事) 우여유(禹汝維)는 변경 백성을 침해하여 재물을 모으고 뇌물을 거두니 법관에게 내려서 죄를 논하여 처단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 제(制)하기를, "금년 이래로 재변이 여러 차례 일어나고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으니 짐이 매우 두려워하노라. 내외에 공죄(公罪)로 도형(徒刑)받은 자와 사죄(私罪)로 장형(杖刑)받은 자 이하의 가벼운 죄인은 모두 방면할 것이며, 여러 관리 가운데 범법하여 파직된 자로서 정상이 나쁘지 않은 자는 너그럽게 참작하여 본래의 품계대로 서용하고, 이속(吏屬)이나 백성이 정묘년에 신흥창(新興倉) 미곡을 차대(借貸)하고도 아직 돌려 갚지 못한 것은 모두 탕감하게 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호부상서 이자의(李資義)와 예부시랑 위계정(魏繼廷)을 송 나라에 보내어 사은하고 겸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 8월 신해일에 우박이 내리고 시서항(市西巷)의 사람과 말에 벼락이 떨어졌고, 또 건릉(乾陵)의 소나무와 도성(都城) 동북쪽 산 소나무에도 벼락이 떨어졌다.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서상지(瑞祥志)》에 우뢰와 번개가 사람을 죽이고 육축(六畜)을 상하게 하며, 구릉과 수목을 깨뜨리는 것은 임금이 형벌로 사람을 죽일 때에 정당한 도리를 벗어나 참소를 받아들여 억울하게 베어 죽였기 때문인데, 바로잡지 아니하면 반드시 폭도가 일어날 걱정이 있습니다. 바로잡는 방법은 참소하는 신하를 물리치고, 교만하고 사나운 자를 죄주고 문서(文書)를 자세히 살피면 재앙이 소멸된다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두려워하여 여러 능(陵)에 두루 고하고 또 액막이로 빌기를 명하였다.
 ○ 9월에 요에서 이주(利州) 관내 관찰사 장사열(張師說)을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요의 사신에게 두 번이나 잔치를 베풀어 주고 삼절인(三節人 외국에서 온 사절(使節) 중에서 지위가 높은 세 사람을 가리킴)을 전내(殿內) 좌우에 앉게 하였다. 유사가 아뢰기를, "사신에게 두 번씩이나 잔치를 베푸는 것은 옛날에는 이런 예가 없었사옵고, 삼절인을 전내에 앉게 하는 것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자가 요의 황제가 지은 천경사(天慶寺) 비문(碑文)을 가지고 왔으니 특별히 예우함이 마땅하다." 하고 좇지 않았다.
 ○ 동여진에서 회화장군 아어대(阿於大) 등 15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 겨울 10월에 왕이 태후를 모시고 삼각산(三角山 서울)에 거둥하다가 길에서 백살 및 80살 된 백성 세 사람을 보고 각각 물품을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 11월 삼각산에서 돌아와서 사(赦)하였다.
 ○ 12월에 요에서 횡선사(橫宣使)로 익주(益州) 관내 관찰사 야율리칭(耶律利稱)을 보내왔다.

고려사절요 제6권 > 숙종 명효대왕 1 肅宗明孝大王一
신사 6년(1101), 송 휘종 건중 정국(建中靖國) 원년ㆍ요 천조제(天祚帝) 건통(乾統) 원년

 ○ 봄 정월에 제하여 구경(九經)과 제자서ㆍ사서 각 한 벌씩을 대성(臺省)과 추밀원에 나누어 두었다.
 ○ 태자의 생신을 창녕절(昌寧節)이라고 하였다.
 ○ 동여진에서 여라불(余羅弗)ㆍ사온(沙溫) 등 7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요동경에서 지례사(持禮使) 예빈부사(禮賓副使) 고극소(高克少)가 왔다.
 ○ 송 나라 사람 소규(邵珪)ㆍ육정준(陸廷俊)ㆍ유급(劉伋)이 와서 의탁하자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불러서 시험하고 아울러 8품 관직을 제수하고 정준에게는 정걸(廷傑)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 주부 이경택(李景澤)의 아내 김씨가 그 지아비의 계모를 죽이고자 계집종을 시켜 밥에 몰래 독을 넣어서 올리게 하였더니, 어미가 알고 어사대에 고발하였으나, 김씨는 자백하지 않았다. 어사대에서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죄상이 이미 명백하니 곧 처결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김씨는 선조(先朝)의 외척(外戚)이므로 사형에서 감등되어 안산현(安山縣 경기 시흥)에 귀양보내고 경택은 옥중에서 죽었다.
 ○ 형부에서 아뢰기를 "주부동정(主簿同正) 조준명(趙俊明)은 아비가 죽은 지 4년이 되었는데도 그 어미를 봉양하지 아니하고 그 아우와 우애하지 아니하여 모두 의지할 곳을 잃게 하였으니 법에 따라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이 정사를 함에 있어 효제(孝悌)를 우선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있느냐." 하고 그 아룀을 윤허하였다.
 ○ 2월에 동여진에서 귀덕장군 보마(甫馬) 등 55명이 입조하기를 청하므로 윤허하였다.
 ○ 동여진에서 도령괴부(都領怪夫) 등 30명이 내조하였다.
 ○ 참지정사로 치사한 신수(愼修)가 졸하였다. 수는 송 나라 사람이었는데 학식이 있고 의술에는 더욱 정통하였다.
 ○ 조하여 역신 이자의(李資義)를 추종하다 연좌된 자를 모두 양이(量移)하였다.
 ○ 제(制)하여 외방 관리의 녹봉을 공수조(公須租)로 급여하였다.
 ○ 3월에 제하기를, "비서성(祕書省)에 문적(文籍)의 판본을 마구 쌓아 두어 훼손되었으니, 국자감(國子監)에 명해서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여 문적의 판본을 옮겨 간직하는 동시에 인출하여 널리 반포하게 하라." 하였다.
 ○ 왕이 요 나라 황제와의 혐명(嫌名)을 피하여 이름을 옹(顒)이라 고치고 태묘와 8릉에 고하니 여러 신하가 표를 올려서 축하하였다.
 ○ 요에서 검교 우산기상시(檢校右散騎常侍) 야율곡(耶律轂)을 보내어 황제가 붕(崩)하였음을 알려 주었다.
 ○ 여름 4월 1일 신묘에 일식이 있었다.
 ○ 국자감에서 문선왕전(文宣王殿)의 좌우 익랑(翼廊)에 새로 그린 61자(子)와 21현(賢)을 석전(釋奠)할 때에 종사할 것을 청하므로 좇았다.
 ○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요의 고애사(告哀使)가 전명(傳命)한 뒤에 검은 삼(衫)과 오모(烏帽)로써 잔치에 참여함은 예가 아니니 영송한 관리를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이것은 사신의 잘못이다. 영송한 관리야 무슨 죄가 있느냐." 하고 듣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천복정(司天卜正) 유녹춘(柳祿春)이 일식하는 시각을 그릇되게 아뢰었사오니 법에 따라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 조하여 가난해서 자력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백성은 보리[麥] 익을 때까지 제위포(濟危鋪)에서 구제하도록 하였다.
 ○ 평주(平州)의 요승(妖僧) 각진(覺眞)이 음양을 망령되게 말하여서 많은 사람을 현혹하게 하므로 조(詔)하여 곡주(谷州 황해도 곡산(谷山))에 귀양보냈다.
 ○ 대부소경(大府少卿) 왕공윤(王公胤)과 각문사(閣門使) 노작공(魯作公)을 요에 보내어 조위(弔慰)하고 회장(會葬)하였다.
 ○ 한림원(翰林院)에서 아뢰기를, "비서성에 명하여 어휘(御諱)와 같은 음의 글자를 판목에다가 조각해서 널리 알리어 사람들이 피할 어휘와 같은 음을 알도록 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송충이 번식하여 방술을 하여도 효험이 없습니다. 신들이 삼가 경방(京房)의 역(易)을 살펴 보니 '녹(祿)을 먹으면서 국가에 유익함이 없으면 하늘이 충재(蟲災)로써 나타낸다.' 하였으니, 신들이 못나서 전하에게 걱정만 끼치오니 불초한 자를 물리치시고 어진이를 등용하시어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답하지 않았다.
 ○ 임진현(臨津縣) 보통원(普通院)에 명하여 3개월 동안 행려(行旅)에게 음식을 주도록 하였다.
 ○ 일월사(日月寺)에 행차하여 금자(金字)로 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완성을 축하하고 후비(后妃)ㆍ태자와 함께 절 뒤 언덕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고자 하니,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지금 한창 농사철이온데 한재가 들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술을 즐기시면 어느 백성이 전하께서 '백성의 근심을 자신의 근심으로 한다.' 하겠습니까." 하니, 중지하였다.
 ○ 조하기를, "지금 농사철에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니, 아마도 주ㆍ군의 관리가 나의 뜻을 받들지 아니하고 은혜스러운 명령을 중간에서 정체시켜서 백성은 면세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거나, 혹 억울하게 옥에 갇힌 죄수들을 오랫동안 판결하지 아니하였으며 굶주려 죽은 자를 장사지내지 않고 해골(骸骨)이 노출된 그대로 버렸거나, 공사(公私)로 세를 거둠이 매우 무거워서 백성이 원망하여 화기(和氣)를 손상하게 하였는가. 유사는 나의 은혜스런 명을 선도하여 비법(非法)을 금하고 신문을 공평히 하도록 옥을 다스리고 드러난 해골을 덮고 묻어서 하늘의 꾸지람에 빨리 보답하게 하라." 하였다.
 ○ 여진의 담자리[氈] 공인(工人)인 고사모(古舍毛) 등 6명이 와서 귀화하므로 토지와 집을 주고 호적에 편입시켰다.
 ○ 5월에 조하기를, "짐이 장생고(長生庫)에 쌓인 곡식이 이미 많으므로 곡식을 내어서 이식(利息)을 취하게 하였으나, 이제 들으니 해묵은 곡식이 썩어서 백성이 혹 해를 본다 하니 그 관리하는 관원에게 곡식으로 은과 베를 무역하게 하여 그 폐단을 없게 하라." 하였다.
 ○ 임진현 보통원에서 행려에게 음식 제공하는 것을 입추(立秋)에 그치도록 유사에 다시 명하였다.
 ○ 임의(任懿)ㆍ백가신(白可臣)이 송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 의서(醫書)의 일종)》을 하사하므로 왕이 선정전에서 조서를 받았다. 일행 사람이 모두 재리(財利)를 탐내었으나 임예는 홀로 청렴하고 삼가니 송 나라 사람이 칭찬하였다.
 ○ 6월에 조하기를, "금은(金銀)은 천지의 정기이며 국가의 보배이다. 근래에는 간특한 백성이 몰래 구리를 섞어 주조하니 이제부터는 유통하는 은병(銀甁)에 모두 표인(標印)하는 것을 영구한 격식으로 하고 어기는 자는 중한 죄로 처단하라." 하였다. 이때부터 은병을 화폐로 사용하였는데, 그 제도는 은 1근으로써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만들었으며 속칭은 '활구(闊口)' 라고 하였다.
 ○ 장연현(長淵縣)에 해마다 수재와 한재가 들었으므로 3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였다.
 ○ 왕하(王嘏)ㆍ오연총(吳延寵)이 송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왕에게 《태평어람(太平御覽 송 나라 때에 편찬한 백과사전 유의 책)》 1천 권을 하사하였다. 연총이 아뢰기를, "신들이 송 나라에 있을 때에 관반(館伴) 중서사인 사문관(謝文瓘)이 신에게 말하기를, '국왕께서 글을 좋아하여 근래에 해동(海東)에 문물이 크게 일어난다는 소문이 들리고 올린 표장(表章)의 문장이 매우 아름다워 조정에서 아주 탄미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태평어람》은 문종(文宗)께서 일찍이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던 것이고,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은 세상에 구제하는 요긴한 의서인데, 이제 짐이 두 가지를 모두 얻었으니 이것은 사신의 능력이로다. 등극을 축하하려고 갔던 사신과 봉위사(奉慰使)로 갔던 정ㆍ부 사신과 수행원의 관작을 모두 올려 주라." 하였다.
 ○ 임간(林幹)을 판상서 형부사로, 위계정(魏繼廷)을 판한림원사로, 오수증(吳壽增)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하였다.
 ○ 남녀와 승니(僧尼)가 무리를 지어 만불회(萬佛會)를 조직하는 것을 금하였다.
 ○ 조를 내려 양경(兩京) 군졸에게 급하지 않은 역사는 없애게 하였다.
 ○ 집을 희사하여 절 만드는 것을 금하였다.
 ○ 가을 8월에 조를 내려 "짐이 왕위에 오른 뒤로 항상 세심하게 북으로 대요(大遼)와 사귀고, 남으로는 대송(大宋)을 섬기었는데, 또 여진이 동쪽에 버티고 있다. 군국이 힘쓸 것은 백성을 편안케 함이 가장 급하다. 마땅히 급하지 아니한 요역은 혁파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지금 요의 동경 병마도부서(東京兵馬都部署)에서 공문으로 정주관(靜州關) 내의 군영(軍營)을 혁파하도록 요청합니다. 지난 대안(大安) 연간에 요에서 압강(鴨江)에 정(亭 지금의 초소(哨所)와 같은 것)과 각장(榷場)을 설치하려 하니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파하기를 청하여 요 황제가 들어주었으니 이번에는 그들의 청에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좇았다.
 ○ 9월에 동지 추밀원사 곽상(郭尙)과 상서좌승(尙書左丞) 허경(許慶)을 요에 보내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 서여진에서 고시모(古時毛)가 와서 귀화하므로 토지와 집을 하사하였다.
 ○ 총지사(摠持寺 경기도 장단(長湍))에 행차하여 중 후(煦)를 문병하였는데, 열흘이 못 되어서 죽었다. 정당문학 이오(李䫨)가 아뢰기를 "후는 왕과 근친이기는 하나, 예(禮)에 출가(出家)자에게는 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는 재주와 행실이 모두 우수(優秀)하며 명망이 요와 송에 드러났으니 복을 입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모든 신하와 더불어 현관(玄冠)과 소복(素服)으로 3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하사하였다.
 ○ 회경전에 인왕도량(仁王道場)을 두고 구정과 외산(外山)의 여러 절에서 중 3만 명을 밥먹였다.
 ○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최사추(崔思諏)ㆍ어사대부(御史大夫) 임의(任懿)ㆍ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돕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동지(東池) 귀령각(龜齡閣)에 나와서 장사(將士)들의 활쏘기와 말 다루는 것을 사열하였다.
 ○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경기(京畿) 포적군사(捕賊軍士)가 함부로 백성을 약탈하므로 도리어 해가 심하니 혁파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 탐라성주배융부위(乇羅星主陪戎副尉) 구대(具代)를 유격장군에 임명하였다.
 ○ 최사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노원역(盧原驛)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 여러 곳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옛 문서와 부합되니 주산 줄기의 중심 큰 맥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지형에 따라서 도성을 건설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 11월에 송 나라 상인과 탐라와 동북번(東北蕃) 추장들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동경 관내 여러 고을에 가뭄이 너무 심하여 백성들이 그 재해를 입었으니 장생고(長生庫)와 여러 창고의 곡식을 방출하시고 공사(公私)의 포흠(逋欠)은 풍년 들기를 기다려서 수납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 12월에 요에서 고주(高州) 관내 관찰사(管內觀察使) 고덕신(高德信)을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고, 숭록경(崇祿卿) 오전(吳佺)은 도종(道宗 요 황제)의 유물인 의대(衣帶)와 비단 등 물품을 가지고 왔다.
 ○ 위계정(魏繼廷)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주국에, 이오(李䫨)를 참지정사 주국에, 오수증(吳壽增)을 상서 좌복야 겸 태자빈객(尙書左僕射兼太子賓客)에, 유신(柳伸)을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로, 김경용(金景庸)을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로 한형(韓瑩)을 상서우복야에 임명하였다.
 

 

고려사절요 제7권 > 숙종 명효대왕 2
갑신 9년(1104), 송 숭녕 3년ㆍ요 건통 4년  

 ○ 봄 정월 동여진의 1천 7백 53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 동여진의 추장 오라수(烏羅首)는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와 사이가 나빠 공형(公兄) 지조(之助)를 보내서 군사를 내어 이를 치게 하는데, 기병(騎兵)이 정주(定州)의 관문 밖에 와 주둔하므로,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삼고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부월(鈇鉞)을 주어 가서 대비하게 하였다. 또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위(李瑋)로 서북면행영병마사, 위위경(衛尉卿) 김덕진(金德珍)을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삼았다.
 ○ 서여진의 종곤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2월에 임간이 여진과 정주성 밖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과거에 내시 임언(林彦)이 출병의 논의를 주장하니 직사관(直史館) 이영(李永)이 말하기를, "무기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니 망동함이 옳지 않습니다. 임언이 아무 일도 없는데 군사를 일으켜 외국과 틈을 내려 함은 심히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듣지 않았다. 임간이 또 공을 세우려고 교련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오직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 척준경(拓俊京)이 병기ㆍ개마(介馬 갑옷을 입힌 말)를 임간에게 요청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그 장수 한 사람을 베고, 사로잡혔던 두 사람을 빼앗았다. 드디어 교위(校尉) 준민(俊旻)ㆍ덕린(德麟)이 각각 적 한 사람을 쏘아 죽이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군사를 되돌리자, 적은 백여 명의 기병으로 추격하였다. 준경이 대상(大相) 인점(仁占)과 더불어 적장 두 사람을 쏘아 죽이니 적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여 아군은 입성할 수 있었다. 그 공으로 준경을 천우위록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로 삼았다. 유사(有司)가 임간 및 병마사좌복야(兵馬使左僕射) 황유현(黃兪顯), 부사대장군(副使大將軍) 송충(宋忠), 호부시랑 왕공윤(王公胤), 우승선(右承宣) 조규(趙珪) 등의 패전의 죄를 아뢰어 탄핵해 모두 파면시켰다.
 ○ 서여진의 거라불(居羅佛)ㆍ마포(麻浦) 등 49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삼고, 중광전에 거둥하여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윤관이 여진과 싸워 30여 급을 베었는데, 우리 군사의 사상ㆍ함몰자도 반이 넘었다.
 ○ 3월에 인왕도량(仁王道場)을 회경전(會慶殿)에 베풀고, 중 1만여 명을 구정(毬庭)에서 밥먹였다.
 ○ 전주목사(全州牧使) 오연총(吳延寵)을 불러 추밀원 좌승선 형부시랑 지어사대사(樞密院 左承宣刑部侍郞知御史臺事)로 삼았다. 애초에 왕은 오연총이 재상의 재능이 있다 여겨 크게 쓰려고 시험삼아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과연 최(最)로 보고되자 불렀다.
 ○ 송위(宋瑋) 등 27명과 명경 2명, 은사 5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여름 4월에 요(遼)는 안원군절도사(安遠郡節度使) 야율가모(耶律嘉謨)ㆍ이주 관내 관찰사(利州管內觀察使) 하자목(夏資睦)을 보내 왕을 충근 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겸 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칠천호 식실봉칠백호(忠勤奉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太尉兼中書令上柱國高麗國王食邑七千戶食實封七百戶)로 책봉하고, 거로(車輅 천자가 타는 수레)ㆍ의대(衣襨)ㆍ피륙ㆍ안마ㆍ활ㆍ화살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왕은 교외에 단을 쌓아 책봉을 받고,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태태태태태태태 재투태태주(泰州) 관내 관찰사 야율사부(耶律師傅)ㆍ홍로경(鴻臚卿) 장직(張織)이 와서 태자를 순의군 절도삭무 등주관찰처치등사 특진 검교태위 겸 시중사지절 삭주제군사 행 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삼천호 식실봉오백호(順義軍節度朔武等州觀察處置等使特進檢校太尉兼 侍中使持節朔州諸軍事行朔州刺史上柱國三韓國公食邑三千戶食實封五百戶)로 책봉하고, 거로ㆍ의복ㆍ피륙ㆍ안마ㆍ활ㆍ화살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소태보를 수태사(守太師)로 삼고, 협모공신(恊謀功臣)의 호를 주었다.
 ○ 남경(南京)의 궁궐이 완성되었다.
 ○ 6월에 동여진이 스스로 장채(場寨)를 헐고, 공형지조 등 68명이 관문에 와서 화친을 청하였다.
 ○ 가을 7월에 좌복야정당문학 유신이 졸하였다. 유신은 외모가 보통 사람을 넘지 못하였으나, 담력과 도량이 있었다. 젊어서 급제하고 청렴과 근신으로 명성이 있었다. 일찍이 청주목사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신(神)과 같이 공경하였다. 나라에서 도읍을 남경으로 옮기려 하자 재상 및 모든 관리가 다 옳다고 하였으나, 유신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騎기기기상시시시시시 ) 유녹숭과 유독 그 불가함을 말하였다. 무릇 국가의 일을 논함에 모두 충의를 위주하니, 당시의 의론이 중하게 여겼다.
 ○ 이오를 중서시랑평장사, 윤관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 추밀원사 최홍사ㆍ비서감 정문(鄭文)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 무술일에 남경에 거둥하였다. 신축일에 어가(御駕)가 봉성현(峯城縣)에 행차하였다. 관전(官錢)을 내어 군신(群臣)ㆍ군사(軍士)에게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때에 화폐[泉貨]가 시행된 지 3년이 지났지만 백성이 가난하여 통용할 수 없자, 이에 주(州)ㆍ현(縣)에 명해 미곡을 내어서 주식점(酒食店)을 열어 백성에게 매매를 허가함으로써 돈의 이로움을 알게 하였다.
 ○ 8월 신해일에 왕은 남경에 이르러 누대와 정자와 원유(園囿)를 유람하였다. 모든 일은 다 일관(日官)이 아뢴 바에 따랐기 때문에 예법이 맞지 않았으나, 유사(有司)로 말하는 자가 없었다.
 ○ 송의 도강(都綱) 주송(周頌)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연흥전(延興殿)에서 군신(群臣)에게 잔치를 베풀고 폐백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최홍사를 참지정사, 임의(任懿)를 동지추밀원사, 오연총을 추밀원부사한림학사, 육조(陸肇)를 상서우복야로 삼았다.
 ○ 9월에 장원정(長源亭)에 거둥하였다.
 ○ 보승군(保勝軍)을 소집하여 병진을 사열하였다.
 ○ 겨울 10월 신해일에 왕이 환궁했다.
 ○ 요의 동경에서 사신을 보내 빙문하였다.
 ○ 지총연(智寵延)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을 축하하고, 문관으로 봉책(封冊)을 사례하게 하며, 최준(崔濬)으로 생신을 축하하게 하고, 김한공(金漢公)으로 예물을 바치게 하고, 최덕개(崔德愷)로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다.
 ○ 11월에 중서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김선석(金先錫)이 졸하였다. 선석은 청렴하고 굳세며 관리로서 일을 처리하는 솜씨가 있었고, 치산에 힘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70이 되어도 오히려 관직에 애착이 있어 물러나지 않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비방하였다.
 ○ 밀진사(密進使) 김고(金沽)를 요에 보냈다.
 ○ 12월에 위계정(魏繼廷)을 문하시랑평장사로 삼았다.
 ○ 요에서 마직온(馬直溫)을 보내 생신을 축하하였다.
 ○ 윤관이 아뢰기를, "신이 여진에게 패한 까닭은 저들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비로소 별무반(別武班)을 설립하여, 문(文)ㆍ무(武)ㆍ산관(散官)ㆍ이서(吏胥)로부터 장사하는 사람, 종 및 주ㆍ부ㆍ군ㆍ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을 가진 자를 신기(神騎 고려 때 별무반에 딸린 기병)로 삼고, 말 없는 자를 신보(神步 별무반의 보병)ㆍ조탕(跳蕩)ㆍ경궁(梗弓)ㆍ정노(精弩)ㆍ발화(發火 적진에 불을 지르는 군사) 등의 군으로 삼아, 나이 20 이상의 남자로 과거 응시자가 아니면, 모두 신보에 속하게 하였으며, 문무 양반(文武兩班)과 여러 진(鎭)ㆍ부(府)의 군인을 사시(四時)로 훈련하였다. 또 승도(僧徒)를 뽑아서 항마군(降魔軍)을 삼아 다시 거병하기를 도모했다.
 

고려사절요 제7권 > 숙종 명효대왕 2

을유 10년(1105), 송 숭녕 4년ㆍ요 건통 5년

 ○ 봄 2월에 문하시랑 최사추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사추가 늙었다고 물러나기를 매우 간절하게 청하니, 위계정이 말하기를, "최공이 관(官)에 계시어 저희들이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러보고, 군국(軍國)의 대사를 한결같이 그의 말을 좇았는데, 이제 만약 늙어 사퇴하면 우리들은 어찌하랴." 하였다. 후에 수춘궁(壽春宮)의 잔치에서 사추가 일어나 축수(祝壽)하니, 왕이 그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경이 만약 진실로 물러난다면 누구와 정사를 함께 하겠소."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치사(致仕)는 예(禮)입니다. 신은 늙어서 일을 할 수 없사오니, 한가롭게 살면서 여생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 여름 6월에 위계정을 태자태부, 최홍사를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겸 태자태보, 윤관을 태자소보 판상서병부사, 이오를 수사도태자소사, 정문(鄭文)을 형부상서정당문학 겸 태자빈객, 임의를 추밀원사이부상서, 왕하를 지추밀원사병부상서, 오연총을 동지추밀원사, 이위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 가을 8월 을해일에 서경에 거둥했다.
 ○ 태조 진영(眞影)을 감진전(感眞殿)에서 배알하고, 그길로 오성전(五星殿)까지 배알하였다.
 ○ 사신을 보내어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에 제사드리고, 의폐(衣幣)를 바쳤다.
 ○ 협주 수(陜州守) 고민익(高旻翼)이 백성을 토색하므로 제(制)하여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 창화문(昌化門)에서 활쏘기를 사열하였다. 태자가 과녁을 맞히자 여러 신하가 모두 축하하였다.
 ○ 9월에 영작원(營作院)에 거둥하여 활쏘기와 말타기를 사열하였다.
 ○ 병진일에 왕이 편찮았다. 정사일에 서경을 떠났다.
 겨울 10월 을축일에 병이 매우 심했는데 금교역(金郊驛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이르렀다. 병인일 밤에 금교를 떠나 장평문(長平門) 밖에 이르러 수레 안에서 훙(薨)하여, 밝을녘에 서화문(西華門)에 이르러 발상(發喪)하였다. 태자와 여러 신하들이 곡용(哭踊)하고 연영전(延英殿)에 봉입(奉入)하였다. 선덕전(宣德殿)으로 빈궁(殯宮)을 옮겼다. 이날 태자 우(俁)는 유조를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하고, 시호를 명효(明孝), 묘호를 숙종(肅宗)이라 하였다. 갑신일에 영릉(英陵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津西面) 판문리(板門里))에 장사지냈다.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한(漢) 고조(高祖)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지혜로도, 매양 혜제(惠帝)는 유약하고 조왕(趙王) 여의(如意)가 나를 닮았다 하여 여러 번 태자를 바꾸려 하면서 대왕(代王 문제(文帝))이 마침내 태평천자가 될 줄은 모르고 그를 변방에 봉했다. 그러나 대왕(代王)이 여(呂)씨의 화를 모면한 것은 고조의 총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唐) 태종의 현명함으로도 후계자를 옳게 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혼암한 자[高宗]를 세웠다가 흉한 암탉으로 하여금 그 자손을 쪼아 거의 다하게 한 것은 더욱 탄식할 만한 일이었다. 양한(兩漢) 4백 년에 천자 노릇한 자는 모두 효제ㆍ문제(文帝)의 후예요, 당 3백 년에 중종(中宗)ㆍ예종(睿宗)으로부터 소종(昭宗)ㆍ애종(哀宗)에 이르기까지 역시 대제(大帝)의 후손이었으니, 이로써 본다면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문종께서는 아들이 열아홉이면서도, 어린 숙종을 문종이 그가 나라를 중흥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더니, 숙종이 번후(藩侯 지방에 봉한 황자(皇子))로서 대통(大統)을 이어 지혜로 난을 평정하고, 인덕(仁德)은 태평을 이룩하였으며, 아들과 손자가 현명하고 닮아서 대대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4백 년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옛 책에 이르기를 '아들을 알아보는 것은 아버지만한 이가 없다.' 하였는데, 그것은 문종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중서사인 김연(金緣)을 요에 보내어 부음을 알렸다. 김연이 요에 이르자 잔치를 베풀어 주고 음악을 연주하려 하므로, 김연이 아뢰기를, "신이 올 때 본국의 여러 신하는 모두 상복을 입었는데, 이제 상국(上國)에 이르러 연회를 받으니, 비록 은혜와 영광을 느끼나 신자의 정으로 차마 음악은 들을 수 없습니다." 하여, 말이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요의 임금은 의롭게 여겨 허락하였다. 조현(朝見)할 때 또 길복(吉服)과 무도(舞蹈)를 없애기를 청하자, 학사 맹초(孟初)가 김연에게 말하기를, "전정(殿庭)의 복색은 마땅히 길복을 따르되, 무도만 없애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귀국함에 이르러 간의대부를 제수하였다.
 ○ 제하여, 삼경(三京)ㆍ팔목(八牧)의 통판(通判) 이상 및 지주사(知州事) 현령 중에 문과에 의해 출신한 자는 겸하여 학사(學事)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 사(士), 서인(庶人)이 내환(內宦)과 왕래ㆍ청탁하는 것을 금하였다.
 ○ 어머니 유(柳)씨를 높이어 왕태후로 삼고, 전(殿)을 천화(天和)라 하며, 부(府)를 숭명(崇明)이라 하였고, 생일을 지원절(至元節)이라 하였다.
 ○ 형부시랑 최위(崔緯)를 요에 보내어 천흥절을 축하하였다.
 ○ 11월에 위계정을 문하시중, 최홍사ㆍ이오를 아울러 문하시랑평장사, 윤관을 중서시랑동평장사, 임의를 참지정사, 왕하를 추밀원사, 오연총을 지추밀원사어사대부로 삼았다.
 ○ 제하여, 잠저(潛邸) 때와 즉위하던 날에 옆에서 시위하던 장교ㆍ원리(員吏)로 공로가 있는 자에게, 유사(有司)로 하여금 특별히 작상(爵賞)을 내리도록 하였다.
 ○ 신봉문(神鳳門)에 거둥하여 사(赦)하였다.
 ○ 조하기를, "짐은 민간에서 매매할 때 쓰는 미곡과 은의 품질이 매우 나쁘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전대(前代) 이후로 법을 엄하게 하여 이를 금했으나, 지금에 이르도록 아직 그 징계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대개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법으로 금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구해서이다. 모래를 쌀에 섞고 구리와 철을 은에 섞어서 우매한 백성을 현혹함은 매우 천지신명의 뜻이 아니다. 백성의 빈곤은 실로 이에 연유하니, 이것을 법으로써 징계할 것이나, 요(堯)ㆍ순(舜)은 의관에 그림만 그려도 백성이 법을 범하지 않았으며, 형벌이 폐지되고 쓰이지 않아 집집마다 표창할 만하였다 하니, 짐은 매우 이것을 사모하는 바이다. 중외의 군민(軍民)과 공상 잡류(工商雜類)는 마음을 고쳐서 개과천선하여 죄를 멀리하면 자연히 형벌이 맑아지고 덕교(德敎)가 넘칠 것이다. 부(富)ㆍ수(壽)의 업과 태평의 풍교(風敎)를 어찌 이룩하기 어렵겠는가. 만약 이 뜻을 모르고 고의로 어기고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벌하고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 어사대에서 상주(上奏)하기를, "지금 옥이 텅 비었으니 '옥공(獄空)' 두 글자를 써서 법사(法司)의 남쪽 거리에 걸어, 거룩한 조정의 형조(刑措)의 아름다움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재상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였다. 이때에 대사면을 거쳐 죄수를 모두 석방하였던 것인데, 어사에서 방(榜)을 써 붙이자고 청하고 재상이 하례하니, 식자가 이를 기롱하였다.
 ○ 12월에 정당문학 정문(鄭文)이 졸하였다. 정문은 배걸(倍傑)의 아들로, 사람됨이 공경하고 겸손하고 질박하고 말이 어눌했으며, 치산에 관심이 없어 집이 누추하여 겨우 비바람을 가렸다. 관직에 임해서는 근신하여 형조(刑曹)를 맡은 10여 년 동안 일찍이 함부로 남의 죄를 잘못 출입시키지 않았다. 일찍이 서경에 호종하여 기자사(箕子祠)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사신으로 송에 들어가, 황제가 그에게 내려주는 돈과 비단을 받아 따라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다 책을 사가지고 돌아왔으며, 달리 구하는 바가 없었다. 송 나라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 무진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유자유(柳子維)를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로 삼았다.
 ○ 재신(宰臣)과 추신(樞臣)을 건명전(乾明殿)으로 불러 동계(東界) 변방의 일을 물었다.
 ○ 오연총을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 김기감(金奇鑑)을 지병마사, 임신행(任申幸)을 병마부사로 삼았다.
 ○ 대녕궁(大寧宮)이 불탔다.
 ○ 교(敎)하기를, "우리 조종(祖宗)께서 초창기에 경륜(經綸)하여 나라를 세우신 후 여러 조종(祖宗)이 잘 지켜 과인(寡人)에 이르렀다. 지금 여러 도(道)ㆍ주(州)ㆍ군(郡)의 수령으로 청렴하며 백성을 근심하고 구휼하는 자는 열에 하나 둘도 없고, 이익을 부러워하고 명예를 구하여 대체(大體)를 손상하며, 뇌물을 좋아하고 자기 이익만을 꾀하며 백성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유리(流離)하여 도망하는 백성이 잇달아 열 집에 아홉은 비었다고 하니, 짐은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한다. 마땅히 명망 있는 신하를 보내어, 군(郡)ㆍ현(縣)을 순시(巡視)하고 수령의 전최(殿最)를 자세히 고과하여 아뢰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7권 > 예종 문효대왕 1 睿宗文孝大王一
병술 원년(1106), 송 숭년 5년ㆍ요 건통 6년

 ○ 봄 정월에 재상이 육선(肉膳)을 드시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네 번 표문을 올려 이를 청하자 윤허하였다.
 ○ 정유일에 혜성이 서남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열 자 가량이었으며, 한 달 남짓 후에야 없어졌다.
 ○ 예부가 아뢰기를 "양계(兩界)ㆍ삼경(三京)ㆍ삼도호(三都護)ㆍ팔목(八牧)은 원정(元正)ㆍ동지 및 지원절(至元節)에 표문(表文)을 올려, 곤성전(坤成殿 왕비의 정전(正殿))에 하례하는 일을 항구적인 법으로 삼으소서." 하니, 좇았다.
 ○ 왕의 생신을 함녕절(咸寧節)이라 하였다.
 ○ 요에서 제전사(祭奠使)로 야율연(耶律演)ㆍ좌기궁(左企弓)을 보내왔다.
 ○ 동계병마사 오연총이 아뢰기를, "지금 징발하는 중외(中外)의 신기군(神騎軍)으로서 부모의 나이 70 이상으로 독자인 사람은 면제하고, 한 집안에 3ㆍ4명이 종군(從軍)하는 경우는 1명을 감하며, 재신과 추신의 아들은 자원하여 종군한 자가 아니면 역시 면하여 주소서." 하니, 따랐다.
 ○ 요에서 조위사(弔慰使)로 야율충(耶律忠)ㆍ유기상(劉企常)을 보내왔다. 또 유정신(劉鼎臣)을 보내어 왕에게 명하여 기복(起復)하게 하였다.
 ○ 동여진의 공아(公牙) 등 10명이 내조하였다. 왕이 선정전에서 인견하고 주식(酒食)과 관례에 따른 물품을 하사하였다. 이전에 임간이 출병하자, 추장 연개(延盖)가 지훈(之訓) 등으로 하여금 맞아 치게 하여 우리 군사가 패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훈이 공아를 보내어 내조하였다. 왕은 정전에서 예를 갖추어 대접하려 하자, 잡단(雜端) 최위(崔緯) 등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오랑캐나라의 사람이 왔을 때 일찍이 정전에서 인견하지 않았으니, 옛 제도에 의하여 편전(便殿)에서 대접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 신봉문에 거둥하여 신기군을 사열하였다.
 ○ 2월에 요의 횡선사(橫宣使)가 왔다.
 ○ 아우 보(俌)를 검교태위 수사도 겸 상서령 대방후(檢校太尉守司徒兼尙書令帶方侯), 효(侾)를 검교태보 수사도 겸 상서령 대원후(檢校太保守司徒兼尙書令大原侯), 서(偦)를 검교상서령 수사공 제안후(檢校尙書令守司空齊安侯), 교(僑)를 검교상서령 수사공 통의후(檢校尙書令守司空通義侯)로 삼았다.
 ○ 재상이 누차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청했으나, 왕은 상복이 끝나지 않았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 서여진의 망간(亡間) 등이 왔다.
 ○ 일관이 아뢰기를, "송악은 곧 서울의 진산(鎭山)인데, 여러 해의 빗물로 토사가 흘러내려 암석이 드러나 초목이 무성하지 않으니, 마땅히 나무를 심도록 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 북여진의 사팔(沙八) 등이 내조하였다.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이전에 우리가 토벌한 적괴 고수(高守)는 바로 사팔의 아비입니다. 반드시 숙원(宿怨)을 품고 있을 것이니, 신흥관(新興館)에 머무르게 하고 군교(軍校) 중의 굳세고 용맹스러운 자로 이를 지키게 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 북여진의 추장 고란(高亂)ㆍ아어대(阿於大) 등 42명이 내조하였다. 예빈성(禮賓省)에서 아뢰기를, "고란 등이 요에서 준 관고(官誥)를 바치고 우리나라의 작명(爵命)을 받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따라 중윤(中尹)을 주었다.
 ○ 3월에 동서제위도감(東西濟危都監)에 명하여 가난한 사람과 병자를 구휼하게 하였다.
 ○ 요가 우리나라 군사 종지(宗志) 등 12명을 돌려 보냈다. 종지 등은 갑신년 전투 때 동번(東蕃)에 들어갔다가 요로 도망해 들어간 자이다.
 ○ 서해안찰사가 아뢰기를, "곡주(谷州) 협계현(峽溪縣 황해도 신계(新溪))의 백성이 유리 도망한 자가 많아서 공납을 빠뜨리고 있으니, 3년의 조세를 면제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 유신(儒臣) 김연ㆍ최준ㆍ이재(李載)ㆍ이덕우(李德羽)ㆍ박승중(朴昇中) 등 10여 명에게 명하여, 태사관(太史官)과 함께 장녕전(長寧殿)에 모여서 지리에 관한 여러 사람의 책을 모아 같고 다른 점을 교정하고 그 번잡한 것을 산정해서《해동비록(海東祕錄)》이란 책 한 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 동여진의 지훈이 기병 2천을 거느리고 관문 밖에 와 주둔하여 복종하기를 청하며 아뢰기를, "왕년의 전쟁에 관한 일은 고려의 신왕이 안 바가 아닐 것입니다. 공아(公牙)의 내조(來朝) 때에 왕께서 이 뜻으로 타이르고 후히 상주고 돌려 보내셨으니, 상은(上恩)이 지극히 두텁습니다. 바라건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진심으로 삼가고 힘써 조공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동계가발병마사 김덕진과 부사 임신행을 소환하였다.
 ○ 북조(北朝)의 해가(奚家) 군사 내가(乃哥)가 번적(蕃賊) 상구(霜丘)의 아들 아주(阿主) 및 철갑 한 벌을 가지고 와서 정성을 표하였다.
 ○ 여름 4월에 북여진의 추장 아어대 등 38명이 내조하였다.
 ○ 황보허(皇甫許) 등 3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묘통사(妙通寺)에 거둥하였다. 이로부터 자주 사원(寺院)에 거둥하였다.
 ○ 조하기를, "요즈음 서해도(西海道)의 유주(儒州 황해 신천(信川))ㆍ안악(安岳 황해 안악(安岳))ㆍ장연(長淵 황해 장연(長淵)) 등 현(縣)의 사람들이 유리 도망하므로, 비로소 감무관(監務官)을 차출(差出)해서 이들을 어루만져 드디어 유민이 점차 돌아와 산업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 지금 우봉(牛峯 황해 금천(金川))ㆍ토산(兔山 황해 금천(金川)) 등 24현의 사람들이 또 점점 유리 도망하니, 마땅히 유주의 예에 준하여 감무를 두어서 불러 안정시켜라." 하였다.
 ○ 5월에 가창루(嘉昌樓)에 거둥하여 시를 짓고, 시신 허경(許慶)ㆍ유인저(柳仁著) 등 10여 명으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게 하고,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또 누대 앞에서 은잔을 과녁으로 삼아 시종(侍從)ㆍ장상(將相)에게 명해서 활쏘기를 겨루어 맞힌 자에게 이를 하사하였다.
 ○ 6월에 선종(宣宗)의 딸 연화궁주(延和宮主)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을 건덕전에 친히 설치하였다.
 ○ 조하기를, "이달부터 큰 가뭄이 더욱 심함은 대개 나의 덕이 없는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밤낮으로 애태우고 조심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사과하여 부처와 신령에게 빌고 빌어서 마음을 다 기울이지 않음이 없었으나, 보응(報應)을 입지 못하였다. 짐이 왕위를 이은 뒤로 정치와 교화에 어그러진 것이 많아 하늘이 혹 짐을 꾸짖고 훈계함인가 한다. 마땅히 양부ㆍ근신 및 대성(臺省)ㆍ간관ㆍ제사(諸司)ㆍ지제고(知制誥)로 하여금 각각 봉사(封事)를 올려 시폐(時弊)를 직언하게 하라." 하였다.
 ○ 유형(流刑) 이하의 죄를 사면하였다.
 ○ 장령전(長齡殿)에 거둥하여 중 담진(曇眞)에게 명해서 비를 빌게 하였다. 그때 국가에는 거리를 돌며 독경하는 일이 성행하여, 5부의 백성들이 이를 본받아 각기 그 마을에서 행독(行讀 거리를 다니며 경문을 읽음)하였다. 대궐의 서쪽 마을에 행독하는 날 마침 비가 내렸다. 왕은 쌀과 비단을 하사하고 다시 행독하게 하였으나, 비가 오지 않았다.
 ○ 가을 7월에 회경전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에게 친히 제사하며 태조를 배향하고 비를 빌었다.
 ○ 조하기를, "짐이 양부ㆍ대간ㆍ양제(兩制 내지제고(內知制誥)와 외지제고) 및 장령전 수교원(讐校員) 등의 봉사(封事)를 보니, 그 논한 바 몸소 행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조종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계승하라 한 것은 이미 마음에 두고 잊지 않고 거의 실행하였고, 사철의 절기를 맞아 월령(月令)을 행할 것과 종묘와 사직단을 수리하고 거기 따른 그릇과 의복을 갖추라 한 것은, 유사로 하여금 상세히 알려 시행하게 할 것이다. 천수사(天壽寺)의 공사는 선고께서 세우기 시작한 것인데, 얼마 되지 않아 승하(昇遐)하시자, 중론이 봉기해서 다투어 중지하도록 간언하였다. 짐도 그 불가함은 알지만 다만 선고의 뜻을 따르려고 아직 감히 그만두지 못하였으니 이는 짐의 허물이다. 또 돈을 사용하는 법은, 곧 오랜 옛날 제왕이 나라를 부하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요, 나의 선고께서 재화를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대요(大遼)가 근년에 또 돈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들음에 있어서랴. 무릇 한 가지 법을 만들면 많은 비방이 따라 일어나는 까닭에, 옛글에 '백성과는 시작할 때 의논해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뜻밖에 여러 신하는 태조의 유훈에 당(唐)과 거란의 풍속을 금하였다는 것을 핑계하여 돈 사용을 배척하나, 그 금한 바는 대개 풍속의 사치를 말한 것뿐이니, 문물(文物)ㆍ법도 같은 것이야 중국 것을 버리고서 어떻게 할 것인가. 선조의 유훈이 금한 바는 돈 사용을 말함이 아님이 분명하다. 지금 마땅히 그만두어야 할 것은 오직 관문과 나루의 상세(商稅)뿐이다.
 복식(服飾)의 제도가 상하가 혼잡되었다는 것은 선대부터 아직 정해진 법식이 없었고, 근자에 제도를 만들어 존비를 구별하였지만, 다만 임금과 신하가 백성에게 솔선하여 검소를 행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상하의 등급이 없음이 이처럼 심해졌다. 그러므로, 옛글에 말하기를 '백성은 윗사람의 명령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윗사람의 좋아하는 행동을 따른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윗사람이 행하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그보다 심한 자가 생긴다.'고 하였다. 만약 임금과 신하가 절약과 검소를 몸소 행하여 백성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여러 백성이 보고 감동하여 존비의 구별이 있을 것이다.
 또 문무 관료가 공도 없이 이록만 탐내고 직책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가뭄과 황충(蝗蟲)의 재해가 자주 발생하니, 대개 어진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물러가게 하는 것이 정치하는 요체(要諦)이다. 그러나 온갖 관직이 지극히 번잡하여 짐이 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만약 어질고 착한 이가 아랫자리에 있으면 재상이 이를 천거하고, 간사하고 탐한 자가 벼슬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직책을 다하지 않거든 대간에서 이를 내쫓아라.
 또 을해년에 악역(惡逆)을 범하여 유배한 자는 마땅히 각각 죄를 참작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서용(敍用)할 것이며, 연좌되어 재산이 몰수되고 노예가 된 자는 이를 면제하고, 노예에 속하지 않은 자도 아울러 돌보아 주라. 또 승도(僧徒)로 간음을 범하면 영구히 향호(鄕戶)에 충당하여 사면령이 내려도 용서되지 않음은 가혹한 법에 가깝다.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시켜 조사하고 살펴서 아울러 군역(軍役)에 충당하라. 또 중외의 법사(法司)에서 죄를 신문할 때 비록 명확한 증거가 있더라도 반드시 세 번 고문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기 때문에, 범법 행위가 더 무겁지 않은 자도 이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는 수가 있으니, 옛글에 '그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법대로 다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라.'고 한 뜻에 어긋나지 않는가. 이제부터 법사(法司)는 짐의 형벌을 조심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알아서, 이미 죄상을 자백한 자는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논할 것 없이 반드시 고문하지 말라." 하였다. 이날 비가 조금 내렸다.
 ○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지난번 동번과의 싸움에서 군령이 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로서 감히 힘껏 싸우는 자가 없고, 병졸들 또한 모두 무너져 달아나 여러 번 패전에 이르렀으니, 대개 호령이 엄숙한 연후에라야 군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해ㆍ무오년 간에 현종께서 출병할 때 명령하시기를 '처음 훈련할 때를 당하여 이르지 않는 자는 관직의 고하를 물론하고 장척(杖脊) 15대, 두 차례 이르지 않는 자와 전진하고 후퇴할 때 대오를 잃은 자, 혹은 복서(卜筮)를 가지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리를 미혹하는 자, 잘못하여 무기를 잃어버리는 자, 대정(隊正) 이하로 명령을 듣고 전하지 않거나 이를 전했는데도 행하지 않는 자, 병졸이 되어 그 윗사람을 구했다 할지라도 죽음을 면하게 하지 못한 자, 혹은 몰래 모계(謀計)를 적에게 누설하거나, 혹은 적이 군중에 들어온 것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자는 모두 장척(杖脊) 20대, 군사를 소집하는데 기일에 이르지 않는 자, 도망해 달아날 마음이 있거나, 혹은 싸움에 임하여 망동하는 자, 사졸로서 그 장수의 절제(節制)에 좇지 않는 자, 병장기계(兵仗器械)를 적중에 버리는 자, 병졸이 되어 그 윗사람을 구하지 않아 함몰되게 한 자, 싸우는 자의 위급함을 보고도 자기 부대(部隊)가 아니라 하여 구하지 않은 자, 남의 활과 칼을 빼앗고 남과 수급(首級)을 다투는 자, 장군ㆍ장교로서 군진에 임하여 싸우지 않거나 혹은 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혹은 적에 항복을 말하는 자, 혹은 진을 방비하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충돌하게 한 자는 모두 목을 베고, 적에 투항하는 자는 그 가산을 몰수하고 그 처자를 종으로 삼고, 적이 스스로 항복한 것을 고하지 않고서 함부로 죽인 자는 목을 벤다.'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이 영을 준수함으로써 군사를 단속하되, 다만 적이 스스로 항복한 것을 고하지 않고서 함부로 죽인 자는 마땅히 베지 말고 장(杖) 20을 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그때 동정(東征)의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군법을 거듭 밝혔다.
 ○ 8월에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병진(兵陣)을 교습하게 하였다.
 ○ 9월에 나이 80 이상된 자와 의부(義夫)ㆍ절부(節婦)ㆍ효자ㆍ순손(順孫)ㆍ홀아비ㆍ과부ㆍ고아ㆍ자식 없는 늙은이ㆍ불구자ㆍ고칠 수 없는 병자에게 대궐 마당에서 친히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백좌도량(百座道場)을 회경전에 베풀고 중 1만을 대궐 마당에서, 2만을 주ㆍ부(州府)에서 밥먹였다.
 ○ 평장사 윤관으로 천수사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서대(犀帶) 하나를 내리고, 여러 요좌(僚佐)에게 속백(束帛)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나인(內人) 정극공(鄭克恭)에게 명하여, 사천소감(司天少監) 최자현(崔資顯)ㆍ태사령 음덕전(陰德全)ㆍ오지로(吳知老)ㆍ주부동정(注簿同正) 김위제(金謂磾) 등과 서경으로 가서 용언(龍堰)의 옛 터를 보게 하였다. 이전에 술사가 참언으로 왕에게 서경의 용언에다 따로 궁궐을 창건해서 때때로 순행하여 거처할 것을 권하였다. 왕은 양부 및 장령전의 수교(讐校)하는 유신에게 명하여 모여서 의논하기로 한바 모두 옳다고 하는데, 지추밀원사 오연총 혼자만이 아뢰기를, "근자에 남경의 역사가 비로소 끝나 백성은 지쳤고 재물은 죄다 없어졌으니, 지친 백성을 부리어 새 궁궐을 세움은 옳지 않으며, 만약 순행하시려 할진댄 옛 궁궐만 못합니다."하니, 응하지 않았다.
 ○ 겨울 10월에 시랑 김보위(金寶威)ㆍ낭장(郞將) 이수(李璹)를 요에 보내어 숙종에게 제사를 지내준 데 대하여 사례하고, 예빈소경(禮賓少卿) 최수(崔洙)는 천흥절을 축하하였다.
 ○ 11월에 서여진의 어대후(於大厚) 등이 내조하였다.
 ○ 윤관ㆍ오연총이 신기ㆍ신보군을 숭인문에서 사열하였다.
 ○ 김의방(金義方)을 요에 보내어 횡선사를 보내준 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 참지정사로 치사한 곽상(郭尙)이 졸하였다. 곽상은 소리(小吏)로 시작하여 연줄을 타서 선종을 국원(國原)의 잠저에서 섬겼다. 선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옛 은혜로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좌승선(左承宣)에 이르고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일찍이 왕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민 일이 있어, 유사가 탄핵하여 파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숙종이 사저에서 불러 보고 서대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선종의 병이 매우 심해감에 곽상은 병실에서 모시었다. 숙종이 침문(寢門)에 이르러 들어가 문병하려 하니, 곽상이 아뢰기를, "지금 주상께서는 병환이 위중하니 왕자라도 부르시는 명령이 없으면 마땅히 바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들이지 않았다. 숙종이 즉위하자, "곽상이 선군을 섬김에 두 마음이 없었다." 하여, 드디어 크게 임용하였다. 그때 평장사 윤관이 돈을 사용하자고 청하니, 곽상은 풍속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열 번이나 소를 올려 다투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곽상은 질박하며 곧고 다른 재능이 없었으며, 평생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아 집에 남은 재물이 없었다.
 ○ 시중 위계정이 세 번 표문을 올려 늙어 사퇴하기를 청하니, 왕은 손수 쓴 조서를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계정이 병을 핑계로 벼슬에 나가지 않자, 사신을 보내어 간곡히 타일렀다.
 ○ 서여진의 망간 등 30명이 내조하였다.
 ○ 12월 초하루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 문덕전(文德殿)에 거둥하여 평장사 윤관에게 명해 <무일(無逸)>편을, 지추밀원사 오연총에게는《예기(禮記)》를 강론하게 하고, 각각 의대(衣帶)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 중광전에 거둥하여 상대장군(上大將軍) 이하의 군사에게 활쏘기를 명하여 과녁을 맞힌 자에게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기사일에 혜성이 나타났다.
 ○ 김경용을 좌복야 참지정사로 삼았다.
 ○ 대녕궁이 불탔다.
 ○ 시중 위계정이 성(省)에 들어와 일을 보았다. 어사가 아뢰기를, "계정은 병으로 누운 지 여러 해 동안 일을 볼 수 없어 자주 휴가를 청하였는데, 주상께서는 이를 더욱 후하게 대우하여 2백 일의 휴가를 주었으나, 휴가 기일이 이미 다하고도 다시 수십 일 동안 나오지 않다가 뒤늦게 부축을 받고 일어나 성(省)에 들어왔으나 대신의 본의가 아니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史臣) 김부일(金富佾)이 말하기를, "계정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청백하고 바른말로 역대의 임금을 보좌하였다. 선종이 등석(燈夕 음력 정월 보름날 밤)에 주연을 베풀 때에 추밀원 승선이 되었는데, 왕은 술이 취하자 계정에게 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계정은 사양하고 아뢰기를 '광대가 있는데, 어찌하여 신에게 춤을 추라 하십니까.' 하니, 왕은 이를 강권하지 않았다. 계정이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을 때에 선종의 총희 만춘(萬春)이 집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다. 계정이 아뢰기를, '만춘은 주상의 뜻을 미혹시켜 백성을 지치도록 부려 사제를 크게 지었으니, 청컨대 이를 헐도록 하소서.' 하는 글을 올렸으나 답하지 않았다. 선종이 이자의(李資義)를 송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계정을 부사로 삼았다. 자의는 보물을 많이 샀으나 계정은 구하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양부(兩府)에 올라서도 결백한 지조를 변치 않았다.
 세상 사람이 모두 부처를 좋아하여, 벼슬이 높은 자는 절을 짓고 불경 베끼는 것을 일삼았으나, 계정 혼자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나라 사람들은 그가 크게 임용되어 시행하는 것을 보기를 바랐더니, 재상이 되어서는 묵묵히 따르기만 하고 뚜렷한 건백이 없었음은, 대개 당시 사세로 보아 할 수 없음을 알았고, 또 늙고 병든 때문이었다. 이때에 물러가기를 청하자, 임금은 그가 물러가는 것이 애석하여 재차 손수 쓴 조서를 내려 만류하고, 또 중사(中使)를 보내어 간곡히 타이르므로, 입조하였다가 며칠 뒤에 다시 휴가를 청하고 돌아갔는데, 어사가 사정을 알지 못하고 이를 탄핵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랴." 하였다.

 

 

정해 2년(1107), 송 대관(大觀) 원년ㆍ요 건통 7년
 ○ 봄 정월에 요가 고존수(高存壽)를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고, 또《대장경》을 하사하였다.
 ○ 시중 위계정이 다시 세 번 표문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니, 왕은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 윤허하였다.
 ○ 제하기를, "국학(國學)을 설치하여 어진이를 양성함은 삼대(三代) 이래 좋은 정치를 이룩하는 근본인데, 유사의 의론이 아직 결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신속히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바야흐로 문학에 뜻을 두어 드디어 이와 같이 명령하였는데, 대신은 한 사람도 이 뜻을 받드는 이가 없으니, 당시의 의론이 이를 애석해하였다
 ○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임개(林槩)가 졸하였다. 임개는 결백하고 곧아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 일찍이 태창서(太倉署)를 관리하게 하였는데, 한순(韓順)이란 자가 창고 곁에 살면서 창고의 곡식을 훔치고, 관리를 속이며 우롱하여 재산이 거만(鉅萬)이고, 높은 벼슬아치 중에는 교제하는 자까지 있었다. 임개가 그 죄상을 들추어내어 법으로 처단하니, 조정 의논이 이를 장하게 여겼다.
 ○ 중 담진(曇眞)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이전에 왕은 담진을 봉하여 왕사로 삼으려고 우간의(右諫議) 김연을 봉숭사(封崇使)로 삼았다. 김연이 사양하여 아뢰기를, "신의 직은 간원에 있는데, 이미 왕사로 봉함이 불가함을 말하여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또 명을 좇아 거행한다면 이는 전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재삼 강요했으나 굳이 사양하니, 내시 유태수(柳台樹)에게 고쳐 명하였다.
 ○ 위계정에게 다(茶)ㆍ약(藥)을 담은 은합(銀盒) 둘을 하사하였다.
 ○ 2월에 여러 도의 안무사를 나눠 보내어 백성의 질고를 묻고, 수령의 전최(殿最)를 살펴 아뢰게 하였다.
 ○ 3월에 조하기를, "만물이 생동하는 때에 짐승의 새끼와 새의 알을 취하지 않음은 실로 <예전(禮典)>의 정한 법으로서 선왕의 어진 정치였다. 지금 여러 도의 수령들은 나와 근심을 같이 한다고 하나 명령을 잘 준수하는 자가 드물다. 혹 공선(供饍 임금의 반찬으로 바침)을 핑계함으로써 상을 구하고, 혹은 사신을 후히 대접함으로써 그 뜻을 기쁘게 하고, 사냥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농부의 화전으로 생명을 태워 죽여 시절에 순응하여 만물을 기르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으니, 천지의 화기(和氣)를 상하는 것이다. 일체를 금단하고 어기는 자는 치죄하라." 하였다.
 ○ 천지 및 경내(境內)의 산천 신기(神祇)에게 대궐 뜰에서 친히 제사지냈다.
 ○ 여름 4월에 왕이 비로소 건덕전에서 조회를 받았다. 백관은 처음에 국상(國喪)이라 하여 붉은 가죽띠를 띠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다시 그것을 띠게 하였다.
 ○ 위계정이 재차 표문을 올려 녹봉을 사양하였다. 조하기를, "공은 학문을 넓게 하고 문장을 전공하여 문단의 종장(宗匠)이며,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곧은 절개로 세상의 명신이 되었는데, 병으로 인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감이 매우 애석하거늘, 또 따라서 녹봉을 사양함은 짐이 어진이를 우대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는 뜻이 아니니, 마땅히 삼사(三司)로 하여금 2분(二分)의 녹을 급여하게 하라." 하였다.
 ○ 사숙왕후(思肅王后) 이씨를 선종묘(宣宗廟)에 배향하였다. 이전에 선종이 국원공(國原公)이 되었을 때에 이예(李預)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졸하니, 이가 정신현비(貞信賢妃)이다. 또 좨주 이석(李碩)의 딸을 맞아들여 헌종(獻宗)을 낳자 왕후에 봉하였고, 헌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태후로 높이고 훙하자 시호를 사숙(思肅)이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선종묘의 배향을 의논함에 왕은 정신을 배양하려 하였다. 간관이 아뢰기를, "정신은 국원공의 비가 된 기간이 짧고, 사숙은 국원공의 비빈(妃嬪)이 되어 왕위에 오르기까지 내조가 많았으며, 태자가 대통(大統)을 이음에 이르러 조정에 임하여 칭제(稱制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하기 3년, 헌종이 숙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자, 물러나 옛 궁에 살면서 오래도록 조금도 허물이 없었으니, 사숙을 배향하소서." 하였다. 곧 제하기를, "적서(嫡庶)의 구분은 분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예전(禮典)>을 자세히 참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간관이 다시 아뢰기를, "《춘추》의 법에 국군이 즉위하여 해를 넘기지 않고 죽은 이는 소목(昭穆)의 차례에 들 수 없으니, 왕의 경우도 그러한데 후비에 있어서랴. 사숙을 배향하소서." 하니, 이에 따랐다.
 ○ 6월에 고공랑중(考功郞中) 박경백(朴景伯)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을 축하하고, 형부원외랑 이소영(李韶永)으로 생신을 축하하여 준 데 사례하고, 기거사인(起居舍人) 박승중(朴昇中)에게 신정을 축하하게 하고, 시어사(侍御史) 하언석(河彦碩)에게 방물을 올리게 하였다.
 ○ 가을 9월에 평장사 최홍사 등이 아뢰기를, "태사(太史)가 말하는데, 송악을 국도(國都)로 삼은 지 지금 2백여 년이니, 국운을 연장하려면 마땅히 서경 용언(龍堰)의 옛터에 따로 새 궁궐을 짓고 옮겨 거처하여 조회를 받아야 합니다." 하니, 지추밀원사 오연총이 다시 아뢰기를, "홍사 등이 아뢰는바 용언에 궁궐을 짓는 것은 세 가지의 불가함이 있습니다. 현명하신 문종께서도 오히려 술수(術數)에 혹하여 서경에 좌우궁을 지었다가, 얼마 후에 후회하여 효험이 없다고 여기어, 마침내 순행하지 않아 재물과 인력만 허비하였으니 그 불가함의 하나입니다. 근자에 남경을 개창(開創)한 지 7ㆍ8년에 이르러도 길한 징조가 없으니 그 불가함의 둘째입니다. 서경의 옛 궁은 지금 말하는 용언과 거리가 멀지 않아 지세의 길흉이 반드시 다른 것이 아닌데, 하물며 징험할 만한 명확한 비결이 없는데도 조종(祖宗)의 옛궁을 버리고, 따로 새로운 대궐을 세우려고 살림집을 철거하고 백성들을 소동함이 그 불가함의 셋째입니다. 바라옵건대 영명하신 판단으로 의심하지 마시고 노신(老臣)이 아뢴 바대로 옛궁에 순행하시고, 근거없는 말을 좇으셔서 함부로 공역을 일으켜 백성의 원한을 부르지 마소서." 하였으나, 왕이 마침내 홍사 등의 말한 바를 좇으니 당시의 의논이 애석히 여겼다.
 ○ 겨울 10월에 백좌도량을 회경전에 베풀고 중 1만 명을 대궐 마당에서, 2만 명을 주ㆍ부(州府)에서 밥을 먹였다.
 ○ 임인일에 여진을 치려고 순천관(順天館)의 남문에 거둥하여 열병(閱兵)하고, 은ㆍ베ㆍ술ㆍ주식을 나누어 하사하였다. 여진은 본래 말갈의 유종(遺種)으로, 산림과 수택(藪澤)에 흩어져 살며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 그 정주ㆍ삭주의 근경에 있는 자는 혹 복종해서 따른다고 하지만, 잠깐 복종하다가도 별안간 배반하곤 하였다. 영가(盈歌)ㆍ오아속(烏雅束)이 서로 계승하여 추장이 됨에 매우 인심을 얻어서 그 세력이 점점 사나워졌다. 이위(伊位 함남 초황령(草黃嶺)) 경계에 산들이 이어져, 동해안에서 우뚝 솟아 우리나라 북쪽 변방에 이르러, 매우 험준하고 가려져 있어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었다. 사이에 길 하나가 있는데 흔히 병목[甁項]이라 이르고, 그곳을 출입하는 데는 구멍 하나가 있을 뿐인데, 만약 그 길을 막는다면 여진의 길은 끊긴다고들 말한다. 까닭에 공을 이루려고 하는 자가 간간이 출병해서 이를 평정하기를 청하였다.
 숙종 7년, 여진이 정주 관문 밖에 와 주둔하였는데, 8년에 유인하여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잡아 광주(廣州)에 가두고 고문하니, 과연 우리를 치려고 도모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마침 변방의 장수 이일숙(李日肅) 등이 아뢰기를, "여진은 허약하니 족히 두려울 게 없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듬해 임간(林幹)을 보내어 몰래 출병해 가서 쳤으나 패전하였다. 여진은 이긴 기세를 타고 정주 선덕관성(宣德關城)에 쳐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음이 헤아릴 수 없었다. 또 윤관을 임간과 교대해 보내어 정벌하였으나 또 패전했다. 군세가 진작되지 않아 드디어 겸손한 말로 강화를 청하여 동맹을 맺고 돌아오니, 숙종은 분노하여, 천지신명에 고해서 신령의 도움으로 적의 지경을 소탕할 것을 빌었다. 드디어 병사를 훈련하고 곡식을 저축함으로써 다시 거병을 도모하였다.
 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상중이므로 미처 겨를이 없었는데, 이때에 변방의 장수가 아뢰기를, "여진이 멋대로 날뛰어 변성에 침돌(侵突)하고, 그 추장이 조롱박 하나를 꿩고리깃에 매달고 여러 부락에 돌려가며 보이면서 일을 의논하는데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듣고 중광전 불감(佛龕)에 간직하여 두었던 숙종의 맹세한 글을 꺼내어 양부 대신에게 보이니, 대신 등이 받들어 읽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성고(聖考)의 유지(遺旨)가 깊고 간절함이 이와 같은데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에 글을 올려 선고의 뜻을 이어 적을 치기를 청하였다. 왕은 망설이며 결정을 짓지 못하고 최홍사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점치게 하였더니, 감(坎)이 기제(旣濟)로 변하는 괘를 얻자 드디어 출병하기로 의논을 결정하고, 윤관을 원수(元帥)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았다. 윤관이 곧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성고(聖考)의 밀지를 받들고 또 지금 엄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적의 보루를 깨뜨려 우리 강토로 만들어 국치를 씻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연총이 자못 의아하게 생각하여 윤관에게 낮은 소리로 말을 하니, 윤관이 분연히 말하기를, "지금 공(公)과 내가 아니면 누가 목숨을 거는 계책을 내어 국가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겠는가. 계책이 이미 결정됐는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오연총은 말없이 잠잠했고 오직 김연(金緣)이 상소로 출병의 불가함을 극력 말하였다.
 ○ 11월 임자 초하루 동지일에 일식이 있었다.
 ○ 경오일에 서경에 거둥하였는데, 이때 일관이 아뢰기를, "마땅히 서경에 거둥하여 장수를 전송해야 합니다." 하자 이 행차가 있었다. 을해일에 서경에 이르렀다.
 ○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윤관ㆍ오연총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보냈다. 을유일에 윤관ㆍ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고 군사의 수가 대강 17만인데 호왈 20만이라 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ㆍ황군상(黃君裳)을 정(定 함남 정평(定平))ㆍ장(長 함남 정평(定平)) 2주에 나눠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 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 하였다. 추장이 이를 믿고 고라(古羅) 등 4백여 명이 이르니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출동시켜 이를 섬멸하였다. 그 가운데 용감하고 약삭 빠른 자 50, 60명이 의심을 품고 관문에 이르러 들어오려 하지 않으므로 병마판관 김부필(金富弼), 녹사(錄事) 척준경을 시켜 길을 나누어 복병하게 하고, 최홍정을 시켜 매우 날랜 기병으로 이에 호응하게 하여 거의 다 사로잡고 죽였다.
 을미일에 윤관은 스스로 5만 3천 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 7백 명을 이끌고 안륙수(安陸戍 함남 정평(定平))로 나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은 3만 3천 9백 명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고,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3천 8백 명을 이끌고 선덕진(宣德鎭 함남 함주(咸州)) 안해(安海)로 나가 양수(兩戍) 사이에서 막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陶) 등은 선병(船兵) 2천 6백 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麟浦)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 함남 함주(咸州))을 지나서 한나절을 가니 여진은 군사의 위엄이 매우 장대함을 보고 모두 도망쳐 달아나니 가축들만 들에 널렸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이 들어와 동음성(冬音城)을 확보하자 윤관이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과 홍정을 보내어,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여 깨뜨려서 달아나게 하였다.
 병신일에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이르러 여진이 모여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통역 대언(戴彦)을 보내어 항복하도록 권하였더니, 여진이 말하기를, "우리가 일전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항복을 말하느냐." 하고 드디어 석성으로 들어가 항거하여 싸우는데, 화살과 돌이 빗발 같아서 군사가 나아갈 수 없었다. 윤관이 척준경에게 말하기를, "해는 기울고 사태는 급하니, 너는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이 성을 공격하라." 하니, 준경이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에 종사(從事)로 있을 때에 죄를 범했는데, 공이 나를 장사라고 여겨 조정에 청해서 용서받게 하였으니, 오늘이야말로 준경이 목숨을 버려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하고, 드디어 석성 아래에 이르러 갑옷을 입고 방패를 가지고서 적중에 돌입하여 추장 두서너 명을 쳐 죽이자, 이에 윤관의 휘하 군사는 좌군과 더불어 공격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준경에게 능라(綾羅) 30필을 상주었다.
 또 홍정(弘正)ㆍ부필(富弼)과 녹사(錄事) 이준양(李俊陽)을 보내어 이위동(伊位洞)을 치게 하였는데, 적이 맞아 싸우므로 한참 만에야 이겨서 1천 2백 급을 베었다. 중군은 고사한(高史漢) 등 35촌을 격파하여, 3백 80급을 베고 2백 30명을 사로잡았으며, 우군은 광탄(廣灘) 등 32촌을 격파하여 2백 90급을 베고 3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군은 심곤(深昆) 등 31촌을 격파하여, 9백 50급을 베었다. 윤관은 대내파지에서부터 37촌을 격파하여, 2천 1백 20급을 베고 5백 명을 사로잡았다. 녹사 유영약(兪瑩若)을 보내어 첩보를 알리니 왕이 기뻐하여 영약에게 7품의 직을 주고, 좌부승지병부낭중 심후(沈侯)ㆍ내시형부원외랑 한교여(韓皦如)에게 명하여 조서를 내려 윤관ㆍ오연총 및 여러 장수를 권장하며 위유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윤관은 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확정하고,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보내어 터를 보아 몽라골령(蒙羅骨嶺 함남 초황령(草黃嶺)) 아래에 성(城) 9백 50칸을 쌓아 영주(英州), 화관산(火串山) 아래에 9백 92칸을 쌓아 웅주(雄州),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백 74칸을 쌓아 복주(福州),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백 70칸을 쌓아 길주(吉州)라 불렀다. 또 호국인왕(護國仁王)ㆍ진동보제(鎭東普濟)의 두 절을 영주성 안에 창건하였다.
 ○ 동여진의 요을내(褭乙乃) 등 3천 2백 30명이 와서 귀속하였다.
Cyber World ASANJANG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