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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측우기
세종조 측우기 관련 기록
- 1441년(세종 23년, 45세) 4월 29일(발명의날은 양력으로 5월 19일 인가?)-세자가 비가 올 때, 구리를 부어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시험하다. 1441년 4월 세자(뒤에 문종)가 당시의 강우량 측정법인 천연강수측정법이 일정하지 않으니 구리로 정양측우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 -- 세종 23년 4월 실록에는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분수를 땅을 파고 보았으나 정확히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 1441년(세종 23년, 45세) 8월 18일-측우기를 제작 비치하고, 양수표를 세우다. 1441년 8월 (세종 23년) 호조의 제안으로 어전회의에서 결정되어 제작에 들어갔고 --- 호조에서 구리 측우기를 만드는 구체적인 방식과 설치할 장소까지 지적하여 왕에게 건의하였으며 그 건의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왕 재위 23(1441)년 8월 18일자의 기사를 보면,"호조(나라의 살림을 맡은 부서)에서 여쭙기를,
각도의 감사(監司)가 강우량을 보고하도록 하는 법이 있는데, 이 방법은 땅이 말랐을 때와 젖어 있을 때에 따라서 땅 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양을 정확히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 조선시대의 천문대 겸 기상청)에 받침대를 만들고 길이
2척(尺), 지름 8촌(寸)의 철 그릇을 주조하여 그 위에 올려놓고 빗물을 받아 서운관 직원에게 그 깊이를 재서 보고하도록 하고,….
(중략) 또한 각 지방의 관청에서는 서울에 있는 철기를 본떠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로 만들어 관청의 마당에 놓고,
직원이 물의 깊이를 재서 감사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감사가 다시 보고하도록 청하였으므로 세종이 이에 따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세계최고의 측우기에 제작연대가 한문으로 乾隆 庚寅 五月이라고 쓰인 것을 이유로 이것이 중국에서 제작하여 조선조에 보낸 것으로 세계과학계가 알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박성래 교수)
- 1442년(세종 24년, 46세) 5월 8일-측우의 제를
상정하다.1442년 3월에는 장영실은 임금님 수레파손사건으로 죄를 받아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어 시기적으로도 장영실이 제작한
것으로 보기에는 애매한 것이라고 문 교수는 말했다
- 1443년(세종 25년, 47세) 4월 17일-세자(문종)에게
서무를 섭행시키다. 세자 향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산 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사이버 역사기행 -
영릉
세계최초로 측우기를 만든 까닭은? (http://limyonghan.netian.com/essay/truth/truth-m2.htm#측우기)
금속활자와 측우기는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1441년(세종 23)에 길이 약42cm 직경 약 16.8cm의 원통형 측우기를 만들었다. 이 측우기는 전국의 감사와 수령에게 분배되어 측우대를
설치하고 매년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게 했다.
세계 최초란 자랑스러운 영예이다. 그러나 영예는 감정의 영역에
있다. 그것이 지혜가 되고 지식이 되기 위해선 현상을 분석해서 원인과 특성을 분석해 내야 한다. 에디슨이 말했듯이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다시 말하면 발명의 제일가는 동기는 필요이다.
그렇기 때문에 측우기의 발명을 논할 때는 세계 최초라는 말 이전에 왜 조선에서 세계 최초로 지방행정망과 측우기까지 동원한
강수량의 측정을 필요로 했느냐는 물음이 더 중요하다. 측우기를 발명할 무렵 세종이 고심하던 과제는 공법(貢法)이었다. 공법이란 작황의
풍흉에 관계없이 정액세를 징수하는 세제이다. 이전에는 답험손실법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매년 농사의 작황을 심사해서 세금액을 정했다. 그러다 보니
이게 불확실 하고 부정도 많았다. 그래서 세종은 정액세 제도를 추진했는데, 반대도 심하고 복잡한 사정으로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타협책이 토지의 질을 6등급으로 나누고 그해의 작황을 9등급으로 나누어 둘을 조합해서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세종은 공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데, 어떻든 공법을 시행하려면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준과 데이터의 파악이 중요했다. 또 우리나라는 봄가뭄이 심한
나라이다. 실록을 보면 매년 봄만 되면 가뭄이라고 걱정근심을 하고, 하던 행사를 멈추고, 기우제를 지내고, 군인들을 돌려보내곤 한다. 가장 큰
폐단은 수년간 지속하는 사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토지측량을 하다가도, 호구조사를 하다가도, 축성사업을 하다가도 가뭄이니 홍수니 농사철이니
하는 이유로 중단되었다. 그래서 2년 이상 장기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이 없다시피 했다. 이것은 각 지방에서 그들에게 부과되는 사업을 모면하기 위한
핑계도로 끊임없이 사용되었다. 이런 것 때문에라도 국가에서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데이터와 기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측우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보급하여 지방행정망을 통해 정기적으로 강우량을 측정, 보고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세금을 걷었을텐데 왜 유독 조선에서만 측우기를 만들었을까? 아마도 이 시대에 지방행정망을 통해 전국의 강수량을 측정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한 국가조직을 가진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놀라는 사실이 국토는 작은데 군현수는 중국과 맞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지방행정망이 발달해 있었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강했다. 이것이 측우기를 발명하게된 진정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인
동시에 교훈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강우량 측정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꾸준하게 계속되었다. 전국의 측정 자료가 남아 있다면 세계적인
자료가 되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못하다. 그러나 서울의 강우량 자료는 1700년대 후반부터 남아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세계적인 자료이어서
기상학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발명의날 (發明-)은 어떻게 정했나?
발명사상을 앙양하여 기술의 진보를 도모하기 위해 규정한 날. 5월 19일.
우리 민족은 500여 년 전부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측우기·거북선 등을 발명하였다. 이러한 민족의 우수성과 선조 때부터 계승된 발명사상을
앙양하여 우수한 발명을 장려하고 보호육성함으로써 기술의 진보발전을 도모하고, 우리 민족의 국가산업 발전을 위하여 발명의 날을 정하여 매년
기념한다. 1957년 2월 6일 각 분야를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들을 모아 상공부 장관의 주재하에 심의한 결과 세종대왕의 세자 문종(文宗)이
측우기를 발명한 날이 1442년 5월 19일인 데 착안하여 정하였다. 73년 3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상공의 날에 함께
행사를 열었으나 82년 5월 19일 제17회 행사 이후 민간주도로 바꾸어 실시하고 있다.
〈세종 대왕
해적이〉
- 1397년(태조 6년, 1세)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에서 정안군(태종) 이방원과 여흥 민씨(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 1408년(태종 8년, 12세) 2월 11일(양력 3월
17일)-충녕군에 책봉되다.
- 1408년(태종 8년, 12세) 2월 16일(양력 3월
22일)-우부대언 심온의 딸 심씨(소헌왕후)와 혼인하다.
- 1412년(태종 12년, 16세) 5월 3일(양력 6월
20일)-충녕대군에 진봉되다.
- 1418년(태종 18년, 22세) 6월 3일(양력 7월
15일)-왕세자에 책봉되다.
- 1418년(태종 18년, 22세) 8월 10(양력 9월
18일)-근정전에서 즉위 조선조 제4대 임금이 되시다.
- 1419년(세종 1년, 23세) 6월 17∼29일-대마도를
정벌하다.
- 1419년(세종 1년, 23세) 9월 20일-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다.
- 1419년(세종 1년, 23세) 9월 26일-노상왕 정종이
승하하다.
- 1420년(세종 2년, 24세) 윤1월 23일-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다.
- 1420년(세종 2년, 24세) 2월 22일-강무장을 일정한 장소로
정하다.
- 1420년(세종 2년, 24세) 3월 16일-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하고, 문신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고문에
대비하다.
- 1420년(세종 2년, 24세) 7월 10일-대비 원경왕후가
승하하다.
- 1420년(세종 2년, 24세) 10월-주자소에서 활자 경자자를
만들기 시작하다.
- 1420년(세종 2년, 24세) 11월 17일-서이궁이
낙성되다.
- 1421년(세종 3년, 25세) 1월 30일-유관과 변계량 등이
수교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 1421년(세종 3년, 25세) 3월 24일-경자자를 완성하고
인쇄법을 개량하니, 하루에 20배의 능률을 올리다.
- 1421년(세종 3년, 25세) 6월 9일-신장(訊杖)의 제도를
정하여 태장을 마구 못치게 하다.
- 1421년(세종 3년, 25세) 10월 27일-원자 향(문종)을
세자로 책봉하다.
- 1421년(세종 3년, 25세) 12월 22일-사죄
삼복계(死罪三覆啓)의 법을 엄히 하다.
- 1422년(세종 4년, 26세) 1월 15일-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다.
- 1422년(세종 4년, 26세) 5월 10일-태상왕 태종이
승하하다.
- 1422년(세종 4년, 26세) 6월 20일-새로 개조한 저울을
중외에 반포하다.
- 1422년(세종 4년, 26세) 10월 29일-주자를
개주하다.
- 1423년(세종 5년, 27세) 2월 26일-경성 남산의 봉화대를
축조하다.
- 1423년(세종 5년, 27세) 9월 16일-조선통보를 주조하게
하다.
- 1423년(세종 5년, 27세) 12월 24일-정종과 태종 양조의
실록을 수찬하게 하다.
- 1423년(세종 5년, 27세) 12월 29일-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다.
- 1424년(세종 6년, 28세) 2월 7일-주전소를 경상도,
전라도에 두다.
- 1424년(세종 6년, 28세) 4월 5일-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종, 교종 양종 36사로 통합하여 불도를 정하게 닦도록 하다.
- 1424년(세종 6년, 28세) 6월 8일-환자미의 출납을 철저히
다스리다.
- 1424년(세종 6년, 28세) 8월 11일-고려사를 수교 편찬
완료하다.
- 1424년(세종 6년, 28세) 11월 15일-본국의 지지(地志)와
주부군현의 고금 연혁을 편찬하게 하다.
- 1424년(세종 6년, 28세) 11월 18일-악기도감에서 악기를
제조하다.
- 1425년(세종 7년, 29세) 2월 24일-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게 하다.
- 1425년(세종 7년, 29세) 5월 13일-서강 효령대군 별서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짓다.
- 1425년(세종 7년, 29세) 8월 26일-경기 남양에
옥인(玉人)을 보내어 돌을 캐어 가지고 와서 석경을 고체제대로 만들어 시험하게 하다.
- 1425년(세종 7년, 29세) 9월 25일-평양에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게 하다.
- 1425년(세종 7년, 29세) 12월 5일-태조실록을
재필사하다.
- 1426년(세종 8년, 30세) 8월 15일-춘추관에서 정종실록을
올리다.
- 1426년(세종 8년, 30세) 12월 3일-속육전과 등록을 편찬
완료하다.
- 1426년(세종 8년, 30세) 12월 11일-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는 이를 뽑아 사가독서하게 하다.
- 1427년(세종 9년, 31세) 5월 15일-경기 남양에서 나는
돌로 1틀(12개)의 편경을 만들어 올리다.
- 1427년(세종 9년, 31세) 9월 4일-종학을 설치하게
하다.
- 1427년(세종 9년, 31세) 9월 11일-향약구급방을 간행하도록
하다.
- 1428년(세종 10년, 32세) 11월 29일-육전과 등록을
편찬하다.
- 1429년(세종 11년, 33세) 5월 16일-정 초 등이
농사직설을 찬술하다.
- 1430년(세종 12년, 34세) 7월 5일 및 8월
10일-공법(貢法)의 편의 여부를 각도의 수령과 인민들에게 물어 가부의 숫자를 파악하다(우리 나라 최초의 여론조사).
- 1430년(세종 12년, 34세) 9월 27일-수차(水車)를
장려하다.
- 1430년(세종 12년, 34세) 9월 29일-주척(周尺)을
바로잡게 하고, 악보를 찬하게 하다.
- 1430년(세종 12년, 34세) 10월 19일 및 25일-공처
노비 산아 휴가에 대한 법을 정하다.
- 1430년(세종 12년, 34세) 11월 21일-사람의 등에
매질하는 편배를 법으로 금하다.
- 1430년(세종 12년, 34세) 윤12월 1일-아악보가
이룩되다.
- 1431년(세종 13년, 35세) 1월 12일-대소신민의 가사
제도(家舍制度)를 정하다.
- 1431년(세종 13년, 35세) 3월 17일-춘추관에서 태종실록
편찬을 완료하다.
- 1431년(세종 13년, 35세) 4월 18일-광화문이
이룩되다.
- 1431년(세종 13년, 35세) 4월 25일-태조, 정종,
태종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다.
- 1431년(세종 13년, 35세) 12월-향약채취월령을
편찬하다.
- 1432년(세종 14년, 36세) 1월 19일-맹사성 등이 신찬
팔도지리지를 편찬하다.
- 1432년(세종 14년, 36세) 6월 9일-설순 등이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다.
- 1433년(세종 15년, 37세) 1월 4일-황희 등이 산찬
경제속육전을 올리니, 인쇄하게 하다.
- 1433년(세종 15년, 37세) 4월-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 등이
파저강 야인 이만주를 토벌하다.
-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1일-자성군을 설치하게
하다.
-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9일-정초, 박연, 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올리다.
-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11일-향약집성방을 편찬
완료하다.
- 1433년(세종 15년, 37세) 8월 11일-정초, 이천,
정인지, 김빈 등이 혼천의를 올리니, 천체를 관측하게 하고, 이로부터 세종이 세자와 함께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서 정초 등과 함께 혼천의의 제도를
의논해 정하다.
- 1433년(세종 15년, 37세) 9월 12일-민속 가요를
채록시키다.
- 1433년(세종 15년, 37세) 9월 16일-장영실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다.
- 1434년(세종 16년, 38세) 2월 14일-함길도 관찰사
김종서가 석막의 영북진 백안수소로 옮겨 배설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종성군을 설치하다. 이리하여 세종 31년(1449)까지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6진을 모두 개척하다.
- 1434년(세종 16년, 38세) 6월 26일-자치통감훈의 편찬에
들어가다.
- 1434년(세종 16년, 38세) 7월 2일-이천 등이 조판 주조의
법을 개량하고, 새활자 갑인자를 만들다.
- 1434년(세종 16년, 38세) 10월 2일-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다.
- 1435년(세종 17년, 39세) 9월 12일-주자소를 경복궁 안에
옮겨 두다.
- 1436년(세종 18년, 40세) 10월 5일-공법(貢法)을
제정하다.
- 1436년(세종 18년, 40세) 12월-납활자 병진자를
만들다.
- 1437년(세종 19년, 41세) 4월 15일-주야 측후기인
일성정시의가 이룩되다.
- 1437년(세종 19년, 41세) 9월 7일 ∼ 16일-평안도
도절제사 이천 등이 파저강 야인을 정벌하다.
- 1437년(세종 19년, 41세) 10월 20일-경원성과 경흥성을
쌓다.
- 1438년(세종 20년, 42세) 1월 7일-대호군 장영실이 건설한
흠경각이 이룩되다.
- 1438년(세종 20년, 42세) 11월-신주무원록 음주가
이룩되다.
- 1439년(세종 21년, 43세) 7월 3일-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짓게 하다.
- 1439년(세종 21년, 43세) 8월 6일-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공험진과 윤관의 구성 터를 조사하게 하다.
- 1440년(세종 22년, 44세) 3월 8일-성혼기를 정해서 남자
16세, 여자 14세 이상으로 하다.
- 1440년(세종 22년, 44세) 5월 13일-종루가
이룩되다.
- 1440년(세종 22년, 44세) 7월 27일-대소 신민
제사(第舍)의 제도를 한정하다.
- 1441년(세종 23년, 45세) 4월 29일-세자가 비가 올 때,
구리를 부어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시험하다.
- 1441년(세종 23년, 45세) 6월 28일-정인지 등에게
치평요람을 편찬하게 하다.
- 1441년(세종 23년, 45세) 8월 18일-측우기를 제작
비치하고, 양수표를 세우다.
- 1441년(세종 23년, 45세) 9월 29일-명황계감이
이룩되다.
- 1442년(세종 24년, 46세) 5월 8일-측우의 제를
상정하다.
- 1442년(세종 24년, 46세) 8월 12일-신개, 권제 등이
찬술한 고려사를 올리다.
- 1442년(세종 24년, 46세) 9월 4일-태조, 정종, 태종의
실록을 수개하게 하다.
- 1443년(세종 25년, 47세) 1월 7일-성혼기를
재조정하다.
- 1443년(세종 25년, 47세) 4월 17일-세자(문종)에게
서무를 섭행시키다.
- 1443년(세종 25년, 47세) 11월 13일-전제상정소를
설치하다.
- 1443년(세종 25년, 47세) 12월 30일-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다.
- 1444년(세종 26년, 48세) 2월 16일-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다.
- 1444년(세종 26년, 48세) 10월 11일-집현전에서
오례의주를 상정하게 하다.
- 1444년(세종 26년, 48세) 11월 13일-전제상정소에서 전분
6등, 연분 9등의 제도를 정하다.
- 1445년(세종 27년, 49세) 1월 7일-신숙주, 성삼문,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어 운서를 질문하여 오게 하다.
- 1445년(세종 27년, 49세) 3월 30일-화전, 화포를
개량하니, 천자화포, 지자화포, 황자화포, 가자화포, 세화포의 사정 거리가 배 이상으로 늘어나다.
- 1445년(세종 27년, 49세) 3월 30일-이달에 치평요람이
이루어지고, 제가역상집이 이루어졌으며, 또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다.
- 1445년(세종 27년, 49세) 4월 5일-용비어천가 10권을
지어 올리니, 주해를 붙여 판에 새겨 발행하게 하다.
- 1445년(세종 27년, 49세) 10월 28일-의방류취가
이루어지다.
- 1445년(세종 27년, 49세) 11월 21일-태조, 정종,
태종실록을 춘추관의 실록각, 충주사고, 전주사고, 성주사고에 나누어 갈무리하게 하다.
- 1446년(세종 28년, 50세) 2월 29일-이달에 환자 분급의
법을 상정하다.
- 1446년(세종 28년, 50세) 3월 24일-왕비 소헌왕후가
수양대군 제택에서 승하하다.
- 1446년(세종 28년, 50세) 7월 19일-소헌왕후를 영릉에
장사하다.
- 1446년(세종 28년, 50세) 9월 상한(양력 10월
9일)-훈민정음을 반포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루어지다.
- 1446년(세종 28년, 50세) 9월 27일-새 영조척으로
곡·두·승·홉의 체제를 정하다.
- 1446년(세종 28년, 50세) 10월 11일-고려사를 다시
교정하게 하다.
- 1446년(세종 28년, 50세) 11월 8일-언문청을
설치하다.
- 1446년(세종 28년, 50세) 12월 26일-이과와 이전 취재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취하게 하다.
- 1447년(세종 29년, 51세) 2월-용비어천가의 주해가 완성되어
간행하다.
- 1447년(세종 29년, 51세) 6월 5일-치화평, 취풍형,
여민락 등의 악보를 이룩하다.
- 1447년(세종 29년, 51세) 7월 25일-석보상절이 이루어져
간행되고, 월인천강지곡이 이루어지다.
- 1447년(세종 29년, 51세) 8월 30일-새로 숭례문을 짓게
하다.
- 1447년(세종 29년, 51세) 9월 29일-이달에 동국정운이
완성되다.
- 1447년(세종 29년, 51세) 11월-신숙주가 사성통고를
편찬하다.
- 1448년(세종 30년, 52세) 3월 28일-집현전에서 언문으로
사서를 번역하게 하다.
- 1448년(세종 30년, 52세) 7월 17일-문소전 서북의 공지에
불당을 짓게 하다.
- 1448년(세종 30년, 52세) 10월 17일-동국정운이 간행되어
반사하다.
- 1449년(세종 31년, 53세) 1월 4일-전찬(前撰)한 고려사를
다시 수교하게 하다.
- 1449년(세종 31년, 53세) 1월 28일-고려사의 보수를
춘추관에서 하도록 하고,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정창손에세 이를 감장하게 하다.
- 1449년(세종 31년, 53세)-사리영응기를
간행하다.
- 1450년(세종 32년, 54세) 2월 17일(양력 4월
8일)-세종대왕이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승하하다.
- 1450년(문종 즉위년) 6월 12일-소헌왕후 심씨가 안장된 영릉
서실에 합장하다.
- 1451년(문종 1년) 8월 25일-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고려사를
새로 편찬 완료하다.
- 1452년(문종 2년) 2월 20일-세종대왕의 신도비를 영릉에
세웠으니, 공조판서 정인지가 비문을 짓고, 안평대군 용이 전액을 썼다. 지금은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있다.
- 1452년(문종 2년) 2월 22일-세종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다.
- 1452년(단종 즉위년) 11월 28일-고려사를 인쇄하게
하다.
- 1454년(단종 2년) 3월 30일-춘추관에서 세종장헌대왕실록을
편찬 완료하다.
- 1455년(단종 3년) 중춘-홍무정운역훈을 간행하다.
- 1469년(예종 1년) 3월 6일-영릉을 여흥부치(지금의 여주)의
북쪽 성산의 남향한 언덕에 천안하다.
<해적이 도움: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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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간본 아정유고 제5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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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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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測雨器)에 대한 명(銘) 병서(幷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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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測雨器)는 실로 세종 24년(1442)에 만들어진 것이다.
구리[銅]를 녹여 모형을 떠 만든 것으로 길이는 1척(尺) 5촌(寸)이고, 둘레의 직경은 7촌이다. 그것을 서운관(書雲觀)에 두고 매양 비가
내린 뒤에는 주척(周尺)으로 수심(水深)을 쟀다. 그 제도를 각도 열읍(各道列邑)에 반포하였으나 중간에 그 법이 폐지되었다. 선대왕(先代王
선대의 임금 영조를 가리킨다) 46년(1770)에 다시 그 제도를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얻어내 주조하여 창덕궁(昌德宮)ㆍ경희궁(慶熙宮) 및
팔도(八道)ㆍ양도(兩都)에 설치하게 하였으니, 처음 창조되고 다시 회복된 것에서 때에 따라 순응하는 두 조정의 정치를 엿볼 수
있다. 금상(今上 정조를 가리킨다) 6년(1782)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제읍(諸邑)이 재변을 아뢰어 왔는데 기전(畿甸)이 더욱
극심하였다. 그러므로 기우제(祈雨祭)를 자주 올렸으나 영험의 감응이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우리 성상께서 자신을 책망하고 바른말을 구하며
몸소 기우제단에서 기도하였다. 산개(繖蓋)를 물리치고 곤면(袞冕)으로 납시어 저녁내 한데 앉아 기도하다가 아침에 환궁(還宮)하면서 종가(鍾街)에
이르러 사형수(死刑囚) 이하 경범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날 도성 사녀(士女)들 중에 간혹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걱정해 주심이 이와 같은데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지 않겠는가.
비록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백성들의 즐거워하는 것이 비와 같다." 하더니, 포시(晡時 신시(申時) 곧 지금의 오후 4시경)도 못 되어
단비가 밤까지 퍼부어 1척 2푼이나 되었다. 이것이 어찌 성상의 지성에 감동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상께서는 자신의 정성임을 자처하지
않고 오히려 미흡한 것을 걱정하며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측우기를 이문원(摛文院) 뜰에 두고 다시 비가
얼마나 왔나 보게 하였다. 비가 흡족하게 내리자 각신 등이 모두 춤추며 말하기를,
"신등은 근시(近侍)다. 비가 내리지 않을 적에는 반드시 먼저 우리 성상께서 백성의
걱정을 주는 것을 알아 감히 그 걱정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미 비가 내려서는 또한 반드시 먼저 우리 성상께서 백성의 기쁨을 기뻐해 주는
것을 알아 감히 그 기쁨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측우기는 신등의 기쁨과 걱정이 매인 것이라,
그 어찌 감히 조심스럽게 지키며 기후를 삼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검서관(檢書官) 신(臣) 덕무(德懋)는 다음과 같이
명한다. 임금이 해[歲]를 살피고자 측우기(測雨器)를
반포하였으니, 그 모양은 설호(挈壺 병의 일종. 들기에 편리하게 되었다)와 비슷하여 화살을 새겼도다. 영(零 뚝뚝 떨어지는 비)ㆍ음(霪
장마비)ㆍ동(涷 소나기)ㆍ주(澍 단비)가 모두 누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삼가 넘치고 부족함을 보아 농사를
징험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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